현란한 안무가 요구되는 뮤지컬 ‘인더하이츠’ 연습을 막 마치고 돌아온 정원영이 피곤한 몸을 이끌고 두산아트센터를 찾았다. 현재 공연 중인 ‘베어 더 뮤지컬’ 무대에 오르기 위해서다.
‘베어 더 뮤지컬’은 카톨릭계 고등학교에서 벌어지는 청소년들의 성장의 아픔, 불안한 심리와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담은 작품. 정원영은 킹카 제이슨(성두섭 전성우 서경수)과 비밀 연애를 하는 피터 역을 맡아 윤소호, 이상이와 트리플 캐스트로 공연한다.
“이전에 출연했던 ‘라카지’나 제가 무척 재미있게 본 ‘킹키부츠’같은 경우도 성소수자를 다루지만, 그 작품들은 쇼적인 부분이 많잖아요? 사실 ‘베어 더 뮤지컬’은 처음 브로드웨이 원작을 봤을 때 ‘동성애를 이해해달라’는 걸로 이해돼 좀 그렇더라고요. 출연을 결정하면서, (동성애에 대한)나의 정확한 의견은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이 많았죠. 이 공연을 보는 사람들에게 뭔가를 남겨줘야 할 테니까요.”
강렬한 록음악을 비롯해 다양한 장르의 넘버가 다이나믹함을 더하고 소재와 무대는 신선하다. 여기에 신뢰 가는 출연진과 제작진이 의기투합했으니, 구미가 당기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매력에 이끌려 작품을 선택했지만, 그 스스로가 독실한 크리스천이었기 때문에 ‘베어 더 뮤지컬’에 대한 고민은 더 치열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저 스스로가 이 작품에 대해 이해하지 않으려 했던 것 같아요. 솔직히 온전한 이해는 여전히 못하고 있는 것 같고(웃음). 하지만 이 작품을 하면서 생각이 넓어지고 종교적으로도 더 깊어졌음을 느껴요. (동성애를)인정하고 말고의 차원이 아니라, ‘베어 더 뮤지컬’은 그냥 ‘사랑’에 대한 게 아닐까…. 성경에 ‘죄 없는 자, 돌을 던져라’는 말이 있는데, 생각해 보면 우리 모두가 다 어떤 식으로든 죄를 지으며 살잖아요? ‘베어 더 뮤지컬’은 누군가에게 돌을 던져서 스스로 죄를 지을 게 아니라, 더 큰 사랑으로 보듬을 수 있도록 하는 따뜻한 작품이라 생각해요.”
브로드웨이 원작 가이드라인에서 피터는 소심한 왕따 소년으로 설명돼 있다. 이번 한국 초연 공연은 원작 그대로 올려달라는 브로드웨이 프러덕션의 요구로 제작 상 많은 한계에 부딪혔다. 다만, 피터에 대해서는 소심하다는 설정의 틀에 얽매이지 않았다. 정원영의 피터는 다른 친구들과 두루두루 어울리면서도, 진심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은 제이슨 뿐이라는 생각을 가진 평범한 소년이다.
“다른 두 친구(윤소호 이상이)와 비교하자면 일단 제가 제일 피터 같지 않은 것 같아요(웃음). 굳이 저의 피터가 다른 점이라고 한다면, 제가 좀더 자연스럽게 여성스러운 면을 보이는 것 같아요. 제가 체구가 작아서 제이슨을 안기 보단 제이슨에게 안기는 모양새가 만들어지거든요. 또, 제가 본 피터는 ‘제이슨이 나와 같은 마음일까’, ‘나와 달리 제이슨은 여자와도 사랑에 빠질 수 있는 게 아닐까’라는 물음표를 갖고 있는 아이에요. ‘제이슨은 언젠가 여자와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제이슨에게 안녕을 고하게 되는 건데, 그렇기 때문에 이별 통보가 단호할 수 있는 거죠. 윤소호, 이상이 피터는 그런 점에서 저와는 다르게 해석하지 않았나 짐작하고 있어요. (두 사람의 피터는)제이슨에게 헤어지자고 말은 했지만, 너무나도 사랑하기 때문에 조금은 덜 단호한 느낌?”
“관객과 팬들이 제가 미처 준비하지 못한 부분까지 봐 주세요. 볼 때마다 다른 인물, 다른 무대같다는 이야기도 하시고, 그래서 이 한 작품을 몇 번씩 보러 오는 관객도 있죠. 그 만큼 매력적인 작품을 만든 것 같아서 보람을 느낍니다. 사실 너무 파격적인 소재이고 도전이 될 수 있는 작품이라 걱정했거든요. 팬이라도 못 볼 수도 있겠다 생각했어요(웃음). 그런데 좋아해주시는 분들이 조금 더 많아질 수 있다는 게 배우로서 가장 큰 보람인 것 같아요.”
정원영은 앞서 ‘헤어스프레이’ ‘여신님이 보고 계셔’ ‘구텐버그’ ‘라카지’ 등으로 밝고 에너지 넘치는 모습을 보여줬다. ‘베어 더 뮤지컬’은 그의 새로운 면모를 관객에 각인시켰다는 점에서도 의미 있다.
“지금까지 항상 밝은 역만 했던 건 아니에요. ‘완득이’도 그렇고 어두운 작품도 꽤 했죠. 그런데 사람들이 생각하는 제 이미지는 ‘재미있는 사람’이란 게 큰 것 같아요. 이번 작품 통해서 저의 슬프고 진지한 부분을 많이 보여드리는 것 같아서 기분 좋아요.”
정원영의 무대 데뷔는 다소 얼떨결에 이뤄졌다. 2007년 10월 군대를 전역한 정원영은 학교에 복학하기에는 애매한 시기라는 이유로 방황(?)하다 선배의 추천으로 뮤지컬 ‘대장금’ 오디션을 봤고, 덜컥 합격했다. 그렇게 앙상블로 시작해 나중에는 누군가의 커버나 얼터를 경험했다. 소극장 조연부터 대극장 주연까지 성장 과정은 그야말로 자연스럽게 이뤄진 일이다.
“작은 배역을 하나씩 하다 보니, 제가 오디션을 보기 전에 콜이 들어오는 순간이 있더라고요. 그 때는 또 한 작품 끝내면 백수가 될 걱정이 있었는데, 시간이 지나니 꾸준히 작품을 할 수 있는 단계가 왔죠. 그 단계를 지나선 이제 작품을 선택할 수 있게 됐고요. 요즘은 드라마나 영화 오디션을 보기도 해요. 배우에게 끝은 없는 것 같아요. 연기적으로도 계속 새로운 걸 찾고 싶고, 오래도록 연기하고 싶은 배우가 되고 싶어요.”
그의 활약은 앞으로도 멈추지 않을 예정이다. ‘베어 더 뮤지컬’에 이어서 오는 8월 29일 개막하는 뮤지컬 ‘잃어버린 얼굴 1895’, 9월 4일 개막하는 ‘인더하이츠’로 관객 앞에 선다.
2000년 미국 로스앤젤레스 초연 이후 전 세계 8번째로 한국 초연의 막을 올린 뮤지컬 ‘베어 더 뮤지컬’은 오는 8월 23일까지 공연한다. 만 15세 이상 관람가. 6만6000원~8만8000원.
[뉴스핌 Newspim] 글 장윤원 기자(yunwon@newspim.com)·사진 이형석 기자(leehs@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