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핌=글 장주연 기자·사진 김학선 기자] 당신의 이름은 추은주. 제가 당신의 이름으로 당신을 부를 때, 당신은 당신의 이름으로 불린 그 사람인가요. 당신에게 들리지 않는 당신의 이름이, 추은주, 당신의 이름이지요.
지난 2004년 제28회 이상문학상 대상 수상작인 김훈의 ‘화장’은 화장(火葬)과 화장(化粧)이란 서로 다른 소재와 의미를 통해 아내와 젊은 여자, 두 여자 사이에서 번민하는 한 중년 남자의 심리를 그린 작품이다. 뇌종양으로 죽어가는 아내를 간병하는 화장품 회사 간부 오상무가 건강하고 젊은 여인 추은주를 만나면서 그에게 연모의 감정을 갖게 되는 게 소설의 큰 줄기다.
그리고 11년 후, 삶과 죽음을 이야기하는 세 남녀의 이야기는 고스란히 스크린으로 옮겨졌다. 지난 9일 개봉한 동명의 영화는 한국 영화사에서 자신들의 색을 꼿꼿이 지켜내고 있는 명필름의 창립 20주년 기념작으로 영화계의 거장 임권택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여기에 국민 배우 안성기(63)가 오상무 역으로 가세, 영화에 힘을 보탰다.
“10년 전 소설을 처음 읽었어요. 그때 막연하게 영화로 만들면 좋겠다고 생각했었죠. 물론 글로 쓸 수 있는, 상상할 수 있는 부분을 완전히 형상화하는 거는 힘든 일이지만요. 사실 감독님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우려를 했고 힘들어했어요. 하지만 영화는 영화대로 또 하나의 완성된 작품을 만드는 거죠. 개인적으로는 영화에서 인물들 간의 균형은 괜찮았다고 생각해요. 다만 관객들이 어떻게 볼지 그런 궁금증은 있어요.”
데뷔 58년 차, 총 160여 편이 넘는 작품에 출연한 베테랑 배우지만 그는 ‘화장’ 촬영 당시를 회상하며 “힘들었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43회차 가운데 42회차를 촬영해 체력적으로도 힘들었지만, 무엇보다 가장 힘들었던 건 감정적인 부분이었다.
“전작 ‘신의 한 수’ 주님의 경우 만들어진 인물이잖아요. 하지만 오상무는 전혀 아니죠. 그가 가진 지병, 어떤 미래에 대한 불안과 일의 스트레스, 아픈 아내와 등 모든 게 사실적이란 말입니다. 이 시대 중년의 모습인 거죠. 그리고 이런 상황에 있는 사람이 상당히 많아요. 제 우려는 이런 사실적인 느낌을 표출해야 한다는 데 있었습니다. 그런 마음을 자칫 놓칠까 봐 힘들었죠.”
안성기는 오상무를 ‘중년의 자화상’이라고 했다. 이 시대 중년을 아우르는 캐릭터이자 중년이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인물이란 의미였다. 하지만 정작 오상무를 연기한 안성기는 그와는 사뭇 다른 중년을 보냈다. “오상무와는 다른 삶을 살았다. 하지만 차이가 있을지언정 충분히 공감한다”는 그에게 오상무처럼 여성, 젊음처럼 인간으로 도리 없이 올라오는 감정에 힘들어 본 적은 있느냐고 물었다.
“제가 근본적으로 절제를 잘합니다(웃음). 낚시, 바둑, 화투, 당구 같은 잡기를 아주 좋아하는데 잘 안 하려고 해요. 아마 제어하지 못했다면 일을 못 했을 겁니다. 내게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이냐고 했을 때 영화를 열심히 하는 것이죠. 그러기 위해서는 준비가 잘돼있어야 하고 몰두할 수 있는 자기만의 시간을 많이 가져야 하는데 잡기를 가지면 그게 힘들잖아요. 아마 이렇게 절제하는 삶을 살아와서 제가 영화가 재밌나 봅니다. 다양한 삶을 살아보면서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니까요.”
영화에서 아내는 죽음을, 추은주는 살아있음을 표상한다. 때문에 영화를 보면 자연스레 삶과 죽음, 그리고 인간의 보편적 감정에 대해 곱씹게 된다. 안성기 역시 ‘화장’이 삶과 죽음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할 기회가 됐다고 말했다. 특히 오십이 넘고서부터 죽음이란 단어를 실감하게 됐다는 그는 조금 더 잘 살 것이며 조금 더 열심히 살라고 조언했다.
“요즘 사십 대 후배들한테 ‘오십 대 돼봐라. 달라진다’고 그럽니다. 진짜 열심히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더 들죠. 어른들이 왜 ‘시간 아까운 줄 알라’ ‘젊을 때는 모른다’고 하지 않습니까. 물론 젊었을 때부터 알면 머리가 터질 겁니다(웃음). 어쨌든 죽음 역시 가까이 있는 거라 생각해요. 행복과 불행, 삶과 죽음, 성공과 실패. 이런 대비되는 단어는 거의 동시에 있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두 맛을 모두 알 수 있는 거고요. 그러니 하루하루 열심히 사는 수밖에 없지요. 그게 삶 아니겠습니까.”
안성기가 바라 본 임권택, 그리고 김호정 ‘화장’이 개봉 전 뜨거운 화제를 모은 데는 두 가지의 이유가 있다. 하나는 ‘영화계의 거장’ 임권택 감독과 ‘국민 배우’ 안성기의 8번 째 만남이라는 점이고, 또 다른 하나는 극중 아내를 연기한 김호정과 안성기의 화장실 신 때문이다. “임권택 감독님과는 지난 1964년 ‘십자매 전쟁’을 시작으로 ‘만다라’ ‘오염된 자식들’ ‘안개 마을’ ‘태백산맥’ ‘축제’ ‘취화선’, 그리고 ‘화장’을 함께 했죠. 감독님이 계속 자리를 지키시고 작품을 만드신다는 데 의미가 큽다고 봅니다. 그리고 그 작품에 제가 함께 한다는 것이 참 좋고요. 욕실 장면의 경우 제가 생각하는 최고의 명장면입니다. 욕실 신이 없었으면 우리 영화가 힘을 받을 수 없었을 거예요. 특히 김호정 씨가 온몸으로 열심히 연기했죠.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는 점에서 박수를 보내고 싶어요. 또 결코 아름다운 장면이 아닌데 아름답게 보이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참 대단합니다. 저는 그 장면이 힘들다기보다는 여배우들과 작업하는 게 힘들었어요(웃음). 제게는 ‘라디오스타’ 같은 작품이 더 재밌죠. 젊었을 때부터 멜로나 사랑 영화를 안 해서 익숙지가 않아요. 어색하더라고요. 그나마 이번엔 인간의 본질, 본성에 대한 이야기라 다행이었죠.” |
[뉴스핌 Newspim] 글 장주연 기자 (jjy333jjy@newspim.com)·사진 김학선 기자 (yooksa@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