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핌=글 장주연 기자·사진 김학선 기자] 아내를 두고 여행 온 것이 마음에 걸려 매일 한국에 안부전화를 한다. 혼자 보기 아까운 멋진 풍경은 눈에 넣기가 무섭게 카메라에 담는다.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노래도 부른다. “난 간직하오. 봄날 가득 피어 내린 눈꽃 같던 그대가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올해로 결혼 51년 차에 접어든 배우 박근형(75)의 로맨틱한 일상이다.
예능프로그램을 통해 달달한 일상이 전파를 타며 전 세대 여심을 흔들었던 박근형이 9일 영화 ‘장수상회’(제작 ㈜빅픽쳐·CJ엔터테인먼트, 제공·배급 CJ엔터테인먼트)를 선보였다. 그런데 어째 이번에는 여자 마음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 강제규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영화는 70세 연애초보 성칠과 그의 마음을 뒤흔든 꽃보다 고운 꽃집 여인 금님(윤여정)의 특별한 사랑 이야기다.
박근형은 극중 장수마트의 오랜 직원 성칠을 연기했다. 버럭이 취미, 까칠함을 무기로 살아온 인물이다. 한 마디로 동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호랑이’ 할아버지. 하지만 그간 회장님 특유의 묵직한 포스를 내뿜거나 최근 로맨티스트로 급부상한 박근형에게서는 좀처럼 연상되지 않는 캐릭터다. 베테랑인 그도 대중의 이런 반응을 모를 리 없다. 그래서 가장 먼저 외적인 변화를 줬다.
“선입견을 주는 이미지가 있어서 촬영 전에 역할 창조에 도움이 될 만한 걸 생각했어요. 그러다 감독님과 동시에 머리 이야기를 했죠. 감독님은 제가 다른 일도 하니까 어려울 거라 생각했나 봐요. 근데 제가 선뜻 머리카락을 자르겠다고 한 겁니다. 그래서 3cm 이내로 짧게 잘랐어요. 그렇게 안 하면 다른 작품 속 제 모습이 보일까 불안했죠. 새로운 이미지도 원했고요. 머리카락 색 역시 염색하지 않은 반백 머리 그대로 했어요.”
그렇게 외적인 것부터 시작한 박근형은 안정적인 연기력으로 성칠의 내면까지 고스란히 녹여냈다. 비록 실제 성향은 상반될지라도 그와 비슷한 세월을 살아왔기에 성칠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시점에 와있는 나이니까 그 절실함, 외로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무섭기도 하고 나라면 어떻게 해야 하나 그런 생각도 많이 했죠. 그 결과 가족 간의 소통을 해야 한다고 느꼈어요. 제가 가진 이야기를 많이 전해줘서 이해할 수 있게 해야지 제 것만 말하면 늙은이 잔소리로 들려요. 또 사회가 많이 달라졌다는 걸 억지로 부정해서는 안 돼요. 그 속으로 들어가야죠. 전 그런 마음가짐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박근형은 수차례 ‘소통’에서 그 답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실제 그 역시 세대 간 소통을 몸소 실천하고 있었다. 한 달에 한 번 고향인 전라북도 정읍을 찾아 40~50대 후배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 연간 회비 1만원인 회원제 모임에도 적극 참여하고 있다.
“고향 후배들과 술 마시면서 이야기도 하고 운동도 하죠. 그렇게 같이 슬픔과 기쁨을 나눕니다. 제 꿈이 하나 있는데 고향에 내려가 주민들에게 문화 혜택을 주고 싶어요. 조그만 서원을 차려서 17명 남짓 되는 아이들과 국수 끓여 먹으면서 이야기도 하고 적성을 찾아주며 작가, 연출자, 배우가 되는 기초 작업을 하고 싶죠. 꼭 서울에 오지 않아도 좋아하는 일에 다가갈 수 있도록 길을 마련하고 싶습니다.”
물론 그는 고향 후배들과 소통에 앞서 가족과도 많은 대화를 나눈다. 더욱이 그의 아들 박상훈은 배우 윤상훈이자 가수 마션(Martian)으로 활동 중이다. 같은 직종에 몸을 담고 있으니 아무래도 공감대를 형성하기도 수월하다.
“아들은 정극을 골라서 하다 보니 힘이 드나 봐요. 그래서 올해에는 연극단체를 골라서 소개해 주려고 합니다. 그런 부분은 도와야죠. 또 한 가지 희망적인 게 아들에 이어 고등학교 3학년인 큰 손자가 배우가 될 가능성이 커요. 배우가 되려고 일 년 반 전부터 연기 공부를 하고 있죠. 요번에 대학 합격하면 3대째 배우가 나오는 겁니다. 아들이 배우 한다고 할 때는 그렇게 야단을 쳤는데 손자가 한다니까 이렇게 무책임하게 좋을 수가 없네요. ‘할아버지가 도와줄게’ 이렇게 되더라고요(웃음).”
그래서인지 실제 박근형은 아들보다는 손자와 연기에 대한 대화를 많이 나눈다고 했다. 이제 막 배우의 꿈에 가까워지고 있는 손자에게도 연극판부터 밟아온 연기 경력 56차 할아버지만큼 좋은 선생님은 없을 터. 박근형은 그런 손자에게 언제나 “네 생각대로 연기하라”고 조언한다. 이는 박근형의 오랜 연기 철학이기도 하다.
“젊은 배우들한테도 그래요. 네 방식대로 해라, 왜 자꾸 남의 방식으로 연기하느냐고요. 그렇게 하면 같은 자리에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나만 가지고 하는 것이 독창적이고 특별한 거예요. 그걸 연기에 대입해야죠. 보편타당한 점만 찾으니까 모두가 똑같은 겁니다. 그리고 또 하나, 인간이 되라는 겁니다. 못된 놈이니까 사람이 되라는 게 아니라 무슨 역할을 해도 사람을 기본으로 두라는 거죠. 동시에 전체적으로 모든 분야가 합쳐진 예술이니까 그걸 조금씩은 다 알고 조합할 줄 알아야 된다는 의미에요.”
인터뷰를 마무리하면서 박근형은 ‘장수상회’가 사회적으로 외롭게 지내는 이들에게 작은 위로가 되길 바라는 마음을 전했다. 그들이 가족의 소중함, 사랑의 소중함을 알게 됐을 때 그 역시 새로운 에너지를 얻고 또 다른 일에 도전할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배우로서 그분들에게 가족과 사랑의 소중함을 느끼게 해줄 의무감이 있어요. 그렇게 된다면 저는 ‘장수상회’를 시점으로 또 한 번 도약할 거고요. 그분들 역시 새로운 세계를 맞이하기 위해서 또 다른 일에 도전할 거라 믿습니다. 반면 젊은이들은 역동적인 삶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노인들의 외로움을 이해하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네요. 그렇다면 어떻게 준비하고 마음을 열어야 하는가, 그건 답은 이 영화에 나와 있습니다(웃음).”
[뉴스핌 Newspim] 글 장주연 기자 (jjy333jjy@newspim.com)·사진 김학선 기자 (yooksa@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