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는 책장에서 앨범들을 죄다 꺼내놓고 한장한장 펼쳐나갔다. 결혼 전 사진과 결혼 후 사진들. 아이들의 출생과 성장에 따라 새록새록 피어났던 신선함들. 서로의 존재조차 알 수 없었던 유년의 흑백사진들. 그리고, 단아하고 화사한 초여름 거리. 아카시아 향이 진동하는 골목에 보라색 원피스를 입고 디자인 북을 팔에 낀 채 청순하게 웃고 있던 너.....이 순간의 파탄에 이르기까지의 현란함이며 환영(幻影)이라고 말하기엔 너무도, 너무도 싱그럽게 빛나던 시간들.
현주. 난 너를 아내라고도, 친구라고도, 너라고도, 그대라고도 부르고 싶다. 꽃이라고, 영혼이라고, 새라고도 부르고 싶다. 이름이 달라질 때마다 그에 맞는 이미지가 피어오르고 색다른 향기가 번진다. 현주, 같이 꽃을 보고 싶다. 우리가 함께 여행했던 섬들과 바다, 계곡, 도시들에 다시 가보고 싶다. 우리 눈에 비슷한 정취로 비취던 풍경들 속에서, 우린 신선하지 않았었니?
어제 오늘 사이에 우리 딸 주혜, 경혜가 왜 이리 애처로운지 모르겠다. 내가 며칠 후면 아주 떠나는 사람처럼, 싱크빅에서 스티커 사줄 때도 마지막 선물인 양 만지작거리고, 애들이 웃어도 빤히 바라보다가 한참 후에야 따라 웃고, 내일은 퇴근하자마자 실컷 놀아줘야지, 쫒기는 기분도 들고....갑자기, 사물의 위치가 바뀌어버렸다.
주혜, 경혜와 나 사이, 아무 것도 없는 그 사이에, 비닐 같은 이물질이 생긴 것 같고....그대와 나, 아무 것도 없던 그 사이에도.....내 잘못이다. 이런 말 크게 할 생각 없다. 그대에게 더 이상 상처를 주고 싶지 않다. 그대는 현재 고독한 여행 중이다. 혼란스럽기도, 어지럽기도, 새롭기도, 역겹기도 할 것이다. 전혀 의외의 생소한 감각들이 피어날지도 모른다. 며칠 또 못 보는구나. 그대는 내 안 보이는 곳에서, 심야 고속도로를 질주하고, 상상에도 안 잡히는 이방의 도시를 배회하고, 낯선 곳에서 잠을 자고....
10.13. 새벽 2시. 집에서
현주야. 이 추운 밤, 어디에 있니? 아직도 무중력 속에 있니? 그 먼 곳에, 내 아무리 발목에 쥐나도록 다녀도 닿을 수 없는, 그 위험한 허공 속에 있니? 언제 그리 올라갔니? 나하고 상의도 안하고. 내가 그리도 미웠니? 차라리 미움뿐이었다면 고통도 덜 했겠지만, 확인되지 않는 심중 속에 미워할 수 없는 미움, 그 얼마나 착잡하고 메스껍고 속 뒤집어지고, 아무리 인내심 강한 인내의 화신이어도 견디기 어려운 그런 감정이었니?
내가 그랬었구나. 부부 싸움 끝에 화가 안 풀리면 탁상시계, 선풍기를 집어던지고 그래도 안 풀리면 내 몸을 미친듯이 날려 장롱에 머리를 박고....그랬었구나. 대화 아닌, 오기나 혈기의 폭발은 폭력보다 비겁했고, 정말 네 표현대로, ‘질리게’ 했겠구나.
아, 사람이란 무서운 것이구나. 내 속에 웅크린 것이 그리도 무서운 사람이었구나. 얼마나 힘들었니? 그리도 쉽게 무중력으로 날아간 현주야. 저 나뭇잎 끝에 폭풍이 곧 불텐데, 떨며 앉아있는 파리 같기도 하구나.
감각이 마비되었으면, 어쩌니? 그토록 감성이 풍부하고, 상쾌한 실로폰 소리로 재잘대던 너. 세상의 현악기들을 모두 모아 합주해도 따라올 수 없는 화술을 가진 너. 그런 너가 어쩌다가 감각을 앗는 무중력으로 날아갔단 말이냐. 현주야. 잠시만 견디고 있어라. 폭풍이 오기 전에, 내가 올라간다. 내 몸도 지치고 무겁지만, 발 딛는 가지마다 부러지고, 곧 닥칠 폭풍의 예감 앞에 추락의 공포로 흔들릴지라도, 나 너에게 올라간다. 올라딛는 걸음마다 너에 대한 모든 죄악 탕감 받으며, 눈물 다 쏟아 눈물의 병풍으로 폭풍우 막아, 기진맥진한 너를 안고 안전한 풀밭으로 내려오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