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평법 불안감 확산...예외조항 반영해야
![]() |
2015년부터 화학물질의 등록 및 평가 등에 관한 법률(이하 화평법)이 시행될 경우 R&D 시설 및 인력의 엑소더스(탈출) 현상이 가속화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이미지=송유미 기자) |
제출해야 할 시험등록 서류만 십수가지에 달한다. 하지만 거짓으로 등록하거나 등록하지 않을 경우 5년 이하의 징역 혹은 1억원 이하의 벌금이 부과된다는 섬뜩한 경고도 들었다.
결국 A씨는 신규 화학물질 등록을 받기로 하고 시험기관을 찾았지만 다시 한번 당황했다. 국내 시험전문기관의 업무가 밀려있어 지금 신청 하더라도 언제 등록이 가능할지 기약조차 없었던 것이다. 최근 신규 화학물질 등록이 급증하면서 국내 시험전문기관에 시험자료를 받기는 하늘의 별따기가 됐다고 한다. 결국 A씨는 해외 시험전문기관을 찾았지만 이번에는 가격에 놀랐다.
독성자료 4가지 등록비용은 8000만원, 물질의 순도 및 동일성 확인은 1700만원, 물리화학적 특성 시험은 1500만원으로 총 1억1200만원이라는 견적을 받은 것. 정작 신소재 연구개발을 통해 매출이 발생할지도 불확실한 상황에 1억원이 넘는 자금을 등록만으로 지출해야하는 상황이었다.
더 큰 문제는 제출서류 준비 기간이었다. 각 과정을 모두 합치면 등록을 받기까지 적어도 8개월에서 11개월까지 준비해야만 한다. 신속한 연구개발을 통한 제품 양산은커녕 글로벌 경쟁사들이 단물, 쓴물을 다 빨아먹은 뒤에야 R&D에 착수하게 생겼다.
결국 A씨는 국내에서 반도체 신소재 연구하기를 포기했다. 해외법인을 세우고 그곳에서 R&D를 시작하는 것이 오히려 더 빠르고 비용도 적게 든다는 결론을 내렸다. 적어도 해외에서는 소량의 화학물질 등록에 막대한 시간과 비용을 소모하지 않으니까.
이 A씨의 이야기는 2015년 1월 화학물질의 등록 및 평가 등에 관한 법률(이하 화평법)이 시행된 이후를 예상한 가상 시나리오다. 하지만 마냥 현실성이 없는 것만은 아니다. 화평법의 도입이 미치는 영향은 첨단 기업뿐만 아니라 중소기업 중견기업에게도 예외가 없기 때문이다.
화평법 도입 과정에서 가장 민감한 것이 바로 R&D 분야다. 기존 유해화학물질관리법에서는 화학물질 등록 면제 기준을 100kg/년으로 규정하고 있어 R&D 과정에는 큰 문제가 없었지만 향후 단 1g의 화학물질이라도 수입·생산할 경우 당국에 등록을 해야 한다.
화학물질 등록 과정이 길게는 1년까지 소모되는 점을 감안하면 사실상 시장에 대한 신속한 대응은 물 건너가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평가다.
국내 대기업 관계자는 “해외 주요 국가는 모두 자국 기업의 R&D 역량 강화를 위해 화학물질 등록 예외조항을 두고 있다”며 “예외를 두지 않는 법안을 도입키로 한 것은 한국 뿐”이라고 지적했다.
때문에 재계 일각에서는 R&D 시설의 엑소더스(탈출) 현상이 가속화 되리라는 우려까지 나온다. 규제가 약한 국가에서 R&D 시설을 운영하는 것이 신속한 시장 대응이나 제품 개발에 용이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실제 국내 R&D 시설 및 생산기지를 두고 있는 외국계 기업들은 이번 화평법 시행을 예의주시 중이다. 자칫 악재가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미 주한미국상공회의소에서는 환경부 등에 “시행에 앞서 기업들과 충분히 협의하고 보완책을 마련하는 등 신중을 기해달라”는 서한을 보내기도 했다.
향후 국제 퉁상마찰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환경부는 화평법 시행령에서는 R&D용을 등록면제대상으로 규정할 예정이라고 한발 물러났지만 업계의 걱정은 여전하다. 기존 유해화학물질관리법에도 R&D용 물질 예외조항이 있었지만 대부분의 대기업은 그보다는 소량면제(100kg이하 등록면제) 조항을 더 이용해왔던 것이 사실.
때문에 재계에서는 ‘공정개발 등 활동을 포함’한 R&D 예외조항을 요구하고 있는 상황이다.
재계 관계자는 “정부에서 창조경제를 통한 R&D의 중요성과 투자를 강조하는 상황에서 화평법의 시행은 찬물을 뿌리는 격”이라며 “향후 시행령 등 하위 법령 마련 단계에서 보다 신중하고 업계의 목소리를 담은 해결책이 제시되기를 바라고 있다”고 말했다.
[뉴스핌 Newspim] 강필성 기자 (feel@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