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핵심 요약
beta- 가토 다카아키가 1925년 제50회 제국의회에서 국민 참여와 책임정치를 강조했다.
- 1925년 보통선거와 치안유지법이 함께 제정돼 민주주의의 확장과 통제가 병행했다.
- 1930년대 일본 의회는 정책 논쟁이 충성 논쟁으로 바뀌며 책임정치가 약화됐다.
!AI가 자동 생성한 요약으로 정확하지 않을 수 있어요.
'국민'과 '책임'의 언어가 살아 있던 의회
이 변화는 1925년 제50회 제국의회에서 매우 분명하게 드러난다. 3월 4일 귀족원 본회의에서 가토 다카아키(加藤高明) 총리는 남성 보통선거 도입을 설명하면서 헌법정치의 의미를 국민의 정치참여와 연결했다.
"헌법 제정의 궁극적인 취지는 널리 국민으로 하여금 국정에 참여하게 하고, 국민 전체가 국가의 발전을 떠받치도록 하는 데 있다고 믿습니다."
대일본제국헌법에서 주권자는 국민이 아니라 천황이었다. 그럼에도 총리가 국민을 단순히 통치받는 신민이 아니라 '국정에 참여하는' 존재로 설명했다는 점은 중요하다. 당시 의회에서 '국민'은 국가가 동원해야 할 집단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선거를 통해 정부를 평가하고 정치에 참여하는 주체라는 의미가 상당 부분 살아 있었다.
필자가 2026년 오타와 국제회의에서 발표한 제국의회 말뭉치 분석에서도 비슷한 변화가 확인된다. 1920~31년의 '국민'은 선거와 의회를 통해 정부를 판단하는 정치적 주체로, '법'은 절차와 권리를 지키는 장치로, '책임'은 정부가 자신의 정책을 설명하고 결과를 감당하는 의미로 사용되는 경향이 강했다.

그 다음 날 귀족원에서 가토가 한 답변은 당시 정치언어의 성격을 더욱 잘 보여준다. 정부가 충분한 '결심과 각오'를 가지고 법안을 추진하느냐는 질문을 받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정부는 깊이 숙고한 끝에 이것이 국가를 위해 바람직하고 적절하다는 확신을 가지고 법안을 제출한 것입니다. 충분한 책임을 진다는 것이 정치가의 언어라고 생각합니다. '결심과 각오'라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배라도 가르라는 말입니까."
훗날 일본 군국주의의 언어를 지배하게 될 '각오', '결단', '희생'이라는 비장한 말과 정치적 책임을 분리한 발언이다. 가토에게 정치인의 책임은 자신의 의지를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정책을 숙고하고 의회에 설명하며 그 결과를 감당하는 일이었다. 오타와 국제회의에서 제시한 장기 말뭉치 분석에서도 바로 이 차이가 일본 민주주의 언어의 중요한 변곡점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같은 1925년에 보통선거법과 치안유지법이 함께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다이쇼 민주주의의 모순을 상징한다. 만 25세 이상 남성에게 선거권을 확대하면서 한편으로 국체의 변혁과 사유재산제 부정을 목적으로 하는 정치운동을 처벌할 수 있는 법적 장치를 마련했다.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국민의 범위는 넓어졌지만, 정당한 정치적 사상의 범위에는 새로운 경계가 만들어진 셈이다. 1925년은 이런 의미에서 일본 민주주의의 가능성과 한계가 같은 해에 제도화된 해였다. 정치공동체에 참여할 수 있는 국민의 범위는 넓어졌지만, 그 안에서 허용되는 정치적 사상의 범위에는 동시에 새로운 경계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1928년 첫 남성 보통선거로 정당은 농민과 노동자, 도시 봉급생활자에게까지 정책을 확대해야 했다. 이 때부터 농촌부채, 쌀값, 노동조건, 실업과 교육이 정치의 언어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바로 그 무렵 1927년 금융공황과 1929년 세계대공황이 일본을 강타했다. 선거에 참여한 국민은 이제 의회가 자신의 생활을 실제로 개선할 수 있는지 묻기 시작했다. 민주주의가 참여의 확대를 넘어 성과와 정당성을 증명해야 하는 시기로 들어간 것이다.

정책의 논쟁이 충성의 논쟁으로
1930년 런던해군군축조약은 일본 의회언어가 달라지는 중요한 경계였다. 하마구치 오사치(浜口雄幸) 정부는 해외전쟁과 국방력에만 관심을 두지 않았다. '국방의 안정', '국민부담의 경감', 열강과의 '평화친교 증진'을 함께 제시했다. 군함의 숫자와 국민이 부담할 세금, 미국·영국과의 관계를 동시에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군사정책도 다른 정책처럼 비용과 효과를 비교하고 타협할 수 있다는 의회정치의 언어였다.
그러나 해군 군령부와 야당 정우회, 우익세력은 정부가 군령부의 요구를 충분히 수용하지 않은 채 군축조약에 합의한 것을 천황의 '통수권' 문제로 바꾸어 공격했다. 이른바 '통수권 간범' 논쟁이다. 여기에서 질문은 "정부의 군축정책이 옳은가"에서 "정부가 천황의 권한을 침해했는가"로 이동한다.
전자는 정책의 적절성에 관한 질문이지만 후자는 정부의 정당성과 충성에 관한 질문이다. 정책은 바꿀 수 있고 예산 숫자는 타협의 대상이지만 충성심은 타협하기 매우 어렵다. 정치적 상대를 잘못 판단한 경쟁자가 아니라 국가의 근본질서를 침해하는 사람으로 보기 시작하면 설득해야 할 이유가 점점 줄어들게 된다.
그렇다고 당시 의회의 격렬한 대립 자체를 민주주의의 쇠퇴라고 보아서는 안 된다. 박수와 야유, 고함은 의회정치의 자연스러운 일부다. 중요한 것은 고함의 방향이 어디로 향하는가였다.
1920년대에는 정부의 예산과 정책효과를 놓고 야유가 터졌다면, 1930년대에는 그 말을 한 사람이 국가에 충실한지를 의심하는 언어가 점점 강해지기 시작했다. 민주주의가 위험해지는 순간은 갈등이 커질 때가 아니라 정책적 갈등이 존재의 정당성에 대한 갈등으로 변할 때다.
1931년 만주사변은 그 변화를 가속했다. 이전까지 의회는 군비와 외교정책을 심의하고 정부가 먼저 결정을 내린 뒤 책임을 져야 했다. 그런데 관동군이 먼저 행동하고 정부와 의회가 그 행동을 뒤따라 설명하는 상황이 나타났다.
군인이 이미 전선에서 싸우는데 군사작전을 비판하는 것이 애국적인가, 군사비를 문제 삼는 것이 정상적인 예산심사인가 아니면 국가안보를 약화시키는가라는 질문이 정치의 중심으로 들어왔다. 1925년의 국민이 '국정에 참여하는 국민'이었다면 이제 '국가의 위기 앞에서 단결하는 국민'이 앞에 나오기 시작했다.
일본 정치사학자 무라이 료타(村井良太)는 『政党内閣制の展開と崩壊 一九二七~三六年』, 『정당내각제의 전개와 붕괴 1927~1936』(2014)에서 이 과정이 군부의 일방적인 정변 하나로 끝난 것이 아니라고 본다. 정당 간 경쟁과 경제위기, 외교정책에 대한 불신, 군부의 독립성, 궁중과 관료제, 그리고 정치폭력이 몇 년에 걸쳐 정당내각의 규범을 침식했다는 것이다.

1932년 5·15 사건으로 이누카이 쓰요시(犬養毅) 총리가 암살된 뒤 본격적인 정당내각이 다시 구성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중요한 전환이었다. 오타와에서 발표한 비교연구에서는 이 시점을 일본 의회언어의 중요한 전환기로 보았다. 정당은 더 이상 국민의 다양한 이해를 조직하는 당연한 제도로만 인식되지 않았고, '거국일치'라는 말이 힘을 얻으면서 정당 간 경쟁 자체가 국가적 분열을 만들어내는 원인처럼 묘사되기 시작했다.
고든 M. 버거(Gordon M. Berger)는 『Parties Out of Power in Japan, 1931–1941』(1977)에서 이 점을 더 세밀하게 보여준다. 1932년 이후 정당은 사라지지 않았다. 중의원 의석도 가지고 있었고 법안심사도 계속했다.
그러나 정부를 구성하는 중심세력에서 밀려났고 군부·관료·천황의 힘을 의식하면서 자신들의 행동반경을 점차 축소했다. 민주주의는 정당이 없어졌기 때문에만 약화된 것이 아니라 정당이 존재하면서도 정권을 견제하고 통제할 수 없게 될 때 급속히 약화된다.
1933년 국제연맹 탈퇴에서는 '명예'의 언어가 강해졌다. 복잡한 외교협상을 "국제협조를 계속할 것인가"가 아니라 "일본의 명예를 지킬 것인가"로 바꾸면 선택의 폭은 좁아진다. 양보는 협상이 아니라 굴욕으로 들리기 시작한다.
1935년 천황기관설 논쟁에서도 비슷한 변화가 나타났다. 미노베 다쓰키치(美濃部達吉)가 천황을 국가의 최고기관으로 설명한 기존 헌법학설이 '국체'에 반한다는 공격을 받기 시작했고, 1935년 3월 12일 중의원 본회의에서는 오카다 게이스케 총리가 자신이 법률에는 밝지 않다고 말하면서도 국체에 대한 신념을 강조했다.
답변 뒤에는 박수가 기록되어 있었다. 다른 의원들이 재차 법리적 설명을 요구했다는 사실은 의회가 아직 살아 있었음을 보여주지만, 토론의 무게중심이 법리에서 신념과 충성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1936년 2·26 사건 뒤에도 정부와 군부를 비판하는 의원들은 존재했다. 정부가 '불온문서'를 단속하려 하자 일부 의원들은 군의 반란을 문서 탓으로 돌리지 말고 진상을 공개하라고 요구했다. 군부의 논리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발언도 있었다.
따라서 1930년대 일본을 '군부가 말하고 정치인은 모두 침묵한 시대'라고 단순화하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 문제는 의원이 말할 수 있는가만이 아니었다. 그 말이 실제 권력을 움직일 수 있는가였다. 군부가 내각의 성립과 유지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상황에서는 의회의 말이 남아 있더라도 책임정치의 힘은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필자 최연혁 교수는 = 스웨덴 예테보리대의 정부의 질 연구소에서 부패 해소를 위한 정부의 역할에 관한 연구를 진행했다. 스톡홀름 싱크탱크인 스칸디나비아 정책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매년 알메달렌 정치박람회에서 스톡홀름 포럼을 개최해 선진정치의 조건에 대해 함께 고민하고 그 결과를 널리 설파해 왔다. 한국외대 스웨덴어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정치학 석사 학위를 받은 후 스웨덴으로 건너가 예테보리대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고 런던정경대에서 박사후과정을 거쳤다. 이후 스웨덴 쇠데르턴대에서 18년간 정치학과 교수로 재직했으며 버클리대 사회조사연구소 객원연구원, 하와이 동서연구소 초빙연구원, 남아공 스텔렌보쉬대와 에스토니아 타르투대, 폴란드 아담미키에비취대에서 객원교수로 일했다. 현재 스웨덴 린네대학 정치학 교수로 강의와 연구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저서로 '우리가 만나야 할 미래' '좋은 국가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민주주의의가 왜 좋을까' '알메달렌, 축제의 정치를 만나다' '스웨덴 패러독스' 등이 있다.
kimsh@newspim.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