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핌] 박상욱 기자 = 베네수엘라 야구가 2006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대회 창설 이후 20년 만에 미국을 꺾고 사상 처음 정상에 오르자 극심한 정치적 혼란과 경제난에 시달리던 상황 속에서 국민이 하나로 뭉쳤다. 정치권 여야도 한목소리를 냈다.
베네수엘라는 17일(현지시간) 미국 플로리다주 마이애미 론디포 파크에서 열린 2026 WBC 결승에서 미국을 3-2로 눌렀다. 첫 결승 진출만으로도 역사였지만, 2회 연속 우승에 도전하던 '야구 종주국' 미국을 꺾고 초대 우승팀 일본·미국·도미니카에 이어 새 챔피언으로 이름을 올렸다. 정치적 대립과 외교 갈등이 극에 달한 가운데 야구 대표팀의 승리는 분열된 민심을 잠시나마 하나로 묶는 계기가 됐다.

이번 우승은 더욱 극적인 정치적 배경 위에서 탄생했다. 지난 1월 미국 특수부대의 군사 작전으로 니콜라스 마두로 전 대통령이 체포·압송되면서 베네수엘라는 권력 공백과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마두로 체포 이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베네수엘라를 "미국의 51번째 주" 운운하며 영향력 확대를 공언해 현지 여론의 반발을 샀다. 그런 미국을 꺾은 승리는 단순한 스포츠 경기 결과를 넘어 베네수엘라 국민들에게 자존심 회복의 계기가 됐다.
공식 권력을 맡고 있는 델시 로드리게스 베네수엘라 임시 대통령은 우승 직후 곧바로 '국가 경축일'을 선포했다. 로드리게스는 사회관계망서비스(X)를 통해 "내일 하루를 국가 경축일이자 휴일로 지정하기로 결정했다"며 "우리 젊은이들이 거리와 광장, 공원, 경기장으로 나와 이 위대한 승리를 마음껏 축하하길 바란다"고 밝혔다.

텔레그램 등으로 공유된 영상에서 그는 "온 나라가 너무나 행복하다"며 대표팀을 향해 "감사의 포옹을 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어 "WBC에서 우승한 것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라고 강조하며 "이번 승리는 베네수엘라인 특유의 열정과 재능, 그리고 단결이 만들어낸 결과"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야권도 이번만큼은 정부와 발을 맞췄다. 지난해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야권 지도자 마리아 코리나 마차도는 엑스(X)에 "우리가 세계 챔피언이다. 베네수엘라 국민이라는 사실이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모르겠다"고 적으며 환호했다. 그녀가 이끄는 정치세력 '벤테 베네수엘라' 역시 "이번 승리는 베네수엘라인들이 그 무엇도 막을 수 없는 존재임을 보여주는 증거"라며 국민적 자부심을 강조했다.

마차도는 마두로 축출 작전에 대한 지지와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공개적 감사로 친미 논란에 휩싸여 왔다. 그럼에도 이번 우승 앞에서는 여야 구분 없이 "우리는 베네수엘라"라는 구호 아래 한목소리를 냈다. 집권 세력과 야권이 서로를 향해 날을 세우던 상황에서, 야구는 잠시나마 '정치 휴전'을 이끌어낸 셈이다.
미국과의 결승전 마지막 장면에서 베네수엘라 전 국민이 열광했다. 9회말 마운드에 오른 마무리 다니엘 팔렌시아는 시속 160km에 육박하는 강속구를 앞세워 마지막 타자 로만 앤서니를 헛스윙 삼진으로 돌려세웠다. 삼진이 확정되는 순간 글러브를 공중으로 던진 팔렌시아를 향해 동료들이 그라운드를 가르며 달려들었다. 베네수엘라 국기가 휘날리는 가운데 선수들은 눈물을 흘리며 애국가를 함께 불렀다. 주장 살바도르 페레즈는 "조국의 상황을 모른 척할 수 없었다. 국민을 위해, 거리로 나선 사람들을 위해 싸웠다"며 "이 트로피는 광장에 모인 모든 이들의 것"이라고 강조했다. 오마르 로페스 감독도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 조국에 잠시라도 기쁨을 줄 수 있어 영광"이라고 말했다.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는 밤새 '노란 물결'에 휩싸였다. 현지 일간지 엘 나시오날에 따르면 9회말 마지막 아웃카운트가 찍히는 순간 라 후벤투드 광장을 가득 메운 시민들은 일제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서로를 끌어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구름 한 점 없는 밤하늘엔 끊임없이 축포가 터졌고 광장 곳곳에선 맥주 세례가 쏟아졌다. 일부 시민들은 두 손을 모으고 무릎을 꿇은 채 신에게 감사 기도를 올리는 모습도 포착됐다.
카라카스 알프레도 사델 광장, 알타미라 프란시아 광장, 모누멘탈 경기장 등 주요 명소마다 설치된 대형 전광판 앞에는 수천 명의 팬들이 모여 단체 응원을 펼쳤다. 이들은 "베네수엘라"를 연호하며 밤새 도로를 행진했다. 전력난으로 일부 지역의 전기가 끊기는 악조건 속에서도 시민들은 휴대전화 불빛과 차량 경적을 이용해 축제를 이어갔다. 이날만큼은 여야도, 이념도, 진영도 없었다. 오직 한 가지 구호만이 카라카스를 가득 채웠다. "우리가 세계 챔피언이다. 우리는 베네수엘라다."
psoq1337@newspim.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