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포용적 유연성(flexicurity)의 선도자
스웨덴: 2014년 시장친화적 조세개혁
네덜란드: 포용적 유연성(flexicurity)의 선도자
네덜란드는 1970년대 후반 두 차례의 오일쇼크와 세계 경기 침체의 여파로 심각한 스태그플레이션에 시달리고 있었다. 실질임금은 상승했지만 생산성은 정체되었고, 실업률은 빠르게 증가하고 있었다. 기업은 고용을 줄였고, 청년세대는 노동시장 진입에 실패했으며, 여성과 고령층은 노동 참여 기회를 거의 갖지 못했다. 이처럼 경제적 위기와 사회적 불만이 팽배한 상황에서, 기존의 정쟁 중심 정치와 노사갈등은 더 이상 지속 가능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었다.
바로 이 시점에서 노동조합(FNV)과 사용자단체(VNO), 그리고 루드 뤼버스(Ruud Lubbers)가 이끄는 기민당(CDA) 중심의 정부는 바세나르에서 역사적인 협약을 체결했다. 핵심 내용은 '임금 자제를 통한 고용 확대'였다. 즉, 노동자 측은 임금 인상을 억제하고, 사용자 측은 고용을 유지하며 노동시간 단축을 수용하고, 정부는 세제 혜택 및 복지지출을 유지하는 삼자협약을 통해 경제 회복의 발판을 마련한 것이다. 1970년대 두 번에 걸쳐 진행된 유가파동으로 위축된 국내 노동시장과 경영환경의 해결책으로 세계적인 새로운 모델을 제시한 셈이다.
이에 따라 1982년 노사정 합의인 '바사나르 협약(Wassenaar Accord)'이 체결되었고, 이후 좌파 계열의 노동당(PvdA)이 주도하는 정부는 '유연성과 안정성의 조화'를 핵심 기조로 삼아 개혁을 단행했다. 네덜란드는 고용계약의 다양화를 허용하고 파트타임, 자영업, 프리랜서 노동을 제도권에 포함시키는 한편, 고용안정성을 위한 직업훈련과 재교육 시스템을 전국적으로 구축했다. 여성과 고령자 고용 확대 정책, 가족친화 근무제 도입, 사회보험 기금 통합도 이 시기 추진되었다.
이 협약은 네덜란드 노동시장에 구조적 변화를 불러왔다. 노동시간 단축을 통해 일자리를 나누는 '워크셰어링'이 제도화되었고, 파트타임과 비정규직의 비율이 증가하면서 여성과 고령층의 고용률이 크게 상승했다. 동시에 노사정 대화의 제도화는 이후 네덜란드 정치문화의 핵심 유산이 되었으며, 정당 간 극단적 대결보다는 합의와 타협을 중시하는 '합의 민주주의(concordantie-democracy)'의 토대를 형성했다.
국내적으로는 이 협약의 정신과 제도적 지속성이 여야를 초월한 공통된 기반으로 자리잡았다. 이후 후속 정부들, 예를 들어 좌파 노동당(PvdA)의 빔 코크(Wim Kok) 총리 시기(1994–2002), 우파 자유민주국민당(VVD)의 마르크 뤼터(Mark Rutte) 정부(2010-2024) 등의 지도자들도 바세나르 정신을 계승하며 유연한 노동시장과 보편적 복지의 결합을 유지시켜 왔다. 정치학자 안톤 헬더만(Anton Hemerijck)은 그의 '연구 변화하는 복지국가(Changing Welfare States, 2002)'에서 협약의 실체를 "공정한 유연성(flexicurity)의 모델이 실제 정책화되어 국민 대다수가 신뢰하게 된 유럽의 보기 드문 사례"라고 평가하고 있다. 또 다른 학자 에스핑-안데르센(Gøsta Esping-Andersen) 또한 그의 연구 '후기산업사회 경제의 사회적 기반(Social Foundations of Postindustrial Economies(1999)'에서 네덜란드의 사례를 "포스트산업사회형 복지국가의 대표 사례"로 지목하며, 노동시장 유연화와 사회통합이 함께 추진된 점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실제로 유럽연합(EU)의 2006년 보고서도 네덜란드를 '사회적 합의에 기반한 안정적 조정 국가'로 분류하며, 위기관리와 제도적 협치 측면에서 가장 모범적인 국가 중 하나로 평가하였으며(European Commission, 2006), OECD 보고서(Economic Surveys: Netherlands 2017)는 네덜란드를 "노동시장 혁신과 사회통합이 병행된 유럽 내 대표국가"로 명명했다. 국민들 역시 이 시스템을 통해 실질적인 '정치적 효능감'을 경험하고 있다는 점에서, 정치적 타협과 사회적 신뢰가 결합된 개혁 모델로 받아들이고 있다. 결과적으로 '네덜란드의 기적(Dutch Miracle)'이라 불릴 만큼 고실업과 경기침체의 악순환을 끊는 데 성공했다.
민주주의 국가들이 고질적 정치 분열과 사회 양극화, 고령화 및 노동시장 유연화라는 도전에 직면해 있는 상황에서, 바세나르 협약은 여전히 유효한 교훈을 제공한다. 경제와 정치가 분리된 구조를 넘어서, 사회 전체가 책임을 나누고 미래를 위해 타협하는 방식이야말로 지속가능한 정치와 복지국가를 만드는 실마리가 될 수 있다.
스웨덴: 2014년 시장친화적 조세개혁
한국 진보정권이 참고할 만한 또 다른 대표적 사례가 바로 스웨덴이다. 2000년대 초반, 스웨덴 사회민주노동당(SAP)은 전통적 복지국가 모델의 한계에 직면해 있었다. 높은 자산세와 법인세로 인해 기업 활동이 위축되고, 고용 창출력이 약화되며, 기술혁신이 정체되는 현상이 관측되었다. 이에 따라 예란 페손(Göran Persson) 총리 하의 진보정권은 전통적 좌파경제정책에서 벗어나, 시장친화적 조치들을 과감히 도입하기 시작했다.
2005년 스웨덴 의회에서는 상속세와 증여세 폐지안이 논의되었고, 사회민주당은 이 법안에 찬성표를 던졌다. 당시 의회 토론에서는 좌파 정당 내부에서도 격론이 오갔지만, "자본과 기업이 국경을 넘어 해외로 나가고 있다"는 현실적 인식에 따라 "복지를 유지하려면 성장하는 기업이 필요하다"는 실용론을 강조했다. "부의 대물림을 통한 신분사회의 고착화를 지지하는 배신자 정당"이라는 노동자와 하위소득계층의 신랄한 비난에도 불구하고 사민당 정부는 끝까지 이 법안을 밀고 나갔다.
요컨대, 스웨덴 진보정권의 우파적 정책 전환은 단순한 조세개혁이 아니라, 경제를 살리기 위한 전략적 통합이었다. 예란 페손 정부의 자산세·상속세 폐지 이후, 스웨덴 내 연간 약 500억 크로나(약 60억 달러) 이상의 자산이 국외로 빠져나가는 경향이 급격히 감소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헨렉슨과 발덴스트룀은 IFN 보고서(2007)에서, 정책 시행 이후 고소득층 자산가의 해외 이전비율이 40% 이상 줄었으며, 중소기업의 해외이전 계획도 5년 사이 30% 이상 감소했다고 분석하였다. 이는 국가 내 생산기반의 유지뿐 아니라, 고용안정과 지역경제 회복에 실질적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된다.
당시 스웨덴 주요 언론인 《다겐스 뉘헤테르》(Dagens Nyheter)는 "좌우의 구분보다 중요한 것은 세금의 실효성과 경제의 순환"이라며 페손 총리의 결단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학자들 사이에서도 이 변화는 긍정적 평가를 받았다. 경제학자 매그너스 헨렉슨(Magnus Henrekson)과 다니엘 발덴스트룀(Daniel Waldenström)은 『Entrepreneurship and Wealth Mobility in Sweden』(IFN Working Paper, 2007)에서, "자산세 폐지 이후 스웨덴 내 자본형성률이 증가하고 기업가 정신이 회복되었다"고 분석했다. 세제개혁 이후 스타트업 생태계가 급성장하며 Spotify, Klarna, Northvolt 같은 글로벌 유니콘이 등장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경제 외적 효과도 컸다. 글로벌 투자자들은 스웨덴을 '사회적 안정과 시장개방이 공존하는 나라'로 인식하게 되었고,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에도 스웨덴 크로나는 상대적으로 안정된 통화로 평가되었다. OECD와 IMF는 스웨덴의 이러한 전환을 '사회적 시장경제(social market economy)의 모범 사례'로 지목하였다.
또한 이념적으로도 흥미로운 변화가 관측됐다. 사민당 지지층 내에서 '복지를 지키기 위해 경쟁력을 먼저 확보하자'는 인식이 확산되며, 진보정당 내부에서의 경제정책 노선이 다변화되었다. 보수당은 과거보다 더 적극적으로 고용시장 개혁과 복지투자를 주장하며 정책 중심이 유연해졌다. 이른바 '중도 블록화' 현상은 스웨덴 정치 전반의 타협 기반을 강화시켰으며, 이는 한국과 같은 정치 양극화 상황에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더불어 스웨덴국립통계청(SCB)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자산세 폐지 이후 국민의 67%가 "세금 구조의 합리성 향상이 국가경쟁력 강화에 기여한다"고 응답했으며, 청년층의 창업 인식이 2010년대 들어 크게 개선되었다. 기업가 정신에 대한 사회적 인식 역시 긍정적으로 바뀌었으며, 이는 장기적으로 스웨덴의 무역흑자 확대, 글로벌 기업 위상 제고, 노동시장 유연화와 연결되었다.
국제적으로도 스웨덴은 더 이상 '복지만 강조하는 고세율 국가'가 아니라, '혁신과 안정이 조화를 이루는 사회시장경제 모델'로 재평가되었다. OECD, IMF, 그리고 세계은행은 스웨덴을 "지속가능한 자본주의의 유럽 모델"이라 명명했고, EU 내에서도 스웨덴식 개혁은 핀란드·덴마크 등 북유럽 국가에까지 영향을 주었다. 이 사례는 한국이 성장과 공정, 복지와 기업, 시장과 국가를 어떻게 조화시켜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살아 있는 교과서라 할 수 있다.
역사에서 배우는 실용정책
이들 네 나라의 사례는 진보정권이라 할지라도 글로벌 경쟁 환경에 발맞춘 정책 조정 없이는 지속가능한 성장을 담보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특히 국제신용평가사와 글로벌 투자자들은 '좌파 정부의 실용 노선'에 대해 긍정적 신호를 보내며 장기 투자 확대, 기술이전, 고용 창출 효과가 동반되었다고 진단했다.
요컨대, 유럽의 진보정권이 보여준 우파적 전환은 이념을 뛰어 넘는 '국가적 전략의 수정'이었다.성장과 복지를 동시에 추구하는 이 유연한 모델은 한국이 현재 직면한 무역전쟁과 글로벌 공급망 재편, 산업 전환기에 주목해야 할 지침이 될 수 있다. 무역과 산업, 세제와 기업, 복지와 생산성 등 이 모든 것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의 순환고리이며, 통합전략 하에서만 실현될 수 있다.
실용정권을 표방한 새 정부는 과거의 교훈을 지렛대 삼아 미래의 기회를 동시에 품어야 한다. 현실을 외면한 이상주의나 과거지향적 정책은 파국으로 향하는 길이며, 과감한 전환은 생존의 지름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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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핌] 최지환 기자 = 최연혁 스웨덴 린네대학교 교수 |
*필자 최연혁 교수는 = 스웨덴 예테보리대의 정부의 질 연구소에서 부패 해소를 위한 정부의 역할에 관한 연구를 진행했다. 스톡홀름 싱크탱크인 스칸디나비아 정책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매년 알메랄렌 정치박람회에서 스톡홀름 포럼을 개최해 선진정치의 조건에 대해 함께 고민하고 그 결과를 널리 설파해 왔다. 한국외대 스웨덴어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정치학 석사 학위를 받은 후 스웨덴으로 건너가 예테보리대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고 런던정경대에서 박사후과정을 거쳤다. 이후 스웨덴 쇠데르턴대에서 18년간 정치학과 교수로 재직했으며 버클리대 사회조사연구소 객원연구원, 하와이 동서연구소 초빙연구원, 남아공 스텔렌보쉬대와 에스토니아 타르투대, 폴란드 아담미키에비취대에서 객원교수로 일했다. 현재 스웨덴 린네대학 정치학 교수로 강의와 연구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저서로 '우리가 만나야 할 미래' '좋은 국가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민주주의의가 왜 좋을까' '알메달렌, 축제의 정치를 만나다' '스웨덴 패러독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