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의 장소를 잇는 정연수의 스토리텔링 여행>
강원의 장소에는 그곳만의 이야기가 깃들어 있다. 지역의 정체성을 반영한 장소의 이야기를 발굴하고 덜 알려진 이야기를 찾아 새로운 가치로 가꾸어야 한다.
또한 재해석이 필요한 옛이야기를 현대적인 시각에서 풀어내어,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연결할 필요가 있다.
지역의 장소에 얽힌 이야기를 발견하는 것은 곧 지역의 정체성을 찾는 길이며 동시에 지역의 문화적 자산을 지키는 일이다.
스토리텔링을 통해 장소에 담긴 기억과 가치를 되살려 강원의 문화적 자원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가고자 강원도내 마을에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을 연재한다.
◆운탄고도 5길의 명소-화절령의 도롱이연못
강원 정선군 화절령은 사북지역에서 최초로 탄광이 개광된 곳이다. 지하에 많은 갱도가 생기고, 땅속의 경석과 석탄이 지상으로 나왔다. 무수한 갱도가 만든 지하의 빈 공간이 위태롭다 싶었는데, 1970년대 들어 지반 침하가 일어나고 말았다.
그 움푹 꺼진 자리에 연못이 생겨났고 해발 1100m의 산꼭대기에 자리잡은 이 연못을 화절령 사람들은 천지라고 여겼다. 그 모양이 백두산 천지를 닮았기 때문이다. 둘레가 200m에 못 미치는 아담한 규모였지만, 하늘과 맞닿아 있어 '하늘 연못(天池)'이라 불릴 수 있었다.
이 연못으로 1급수 청정지역에만 산다는 도롱뇽이 찾아왔고 화절령 사람들은 이를 광부를 지켜주는 용과 같은 존재로 여겼다. 이로 인해 도롱이연못이라는 이름이 유래한 것이다.
화절령에는 875갱, 1030갱, 1070갱에서 탄을 캐는 광부 가족들이 사택을 이루어 살고 있었다. 갱의 명칭은 각각 해발 875m, 1030m, 1070m에 위치한 곳에서 유래하였다. 사북읍 시내가 해발 500m인 점을 고려하면 화절령 사택은 얼마나 높은 곳에 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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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객들이 백운산 운탄고도의 단풍 절경을 감상하며 트래킹을 즐기고 있다.[뉴스핌 DB] |
구름과 함께 벗하는 높이에 마을을 이룬 화절령의 사택은 1개 동에 5가구가 붙어있는 연립형태로 사택이라기보다는 판자촌에 가까웠다. 너무 가까워서 옆방뿐만 아니라 그 옆의 옆 방에서 나는 코고는 소리도 들을 정도였다.
화절령 사택마을의 주부들은 아무도 성씨를 몰랐다. 항상 남편의 성씨 옆에 '아줌마'만 붙이면 되었다. 미국에서 여자가 결혼하면 남편의 성씨를 따르듯이 화절령 사택마을 사람들도 그렇게 살았다. 양 씨 아내는 '양 씨 아줌마'로 불렸다. 동네 아이들도 덩달아 '양 씨 아줌마'라고 불렀다.
화절령 광부의 아내들은 남편 도시락을 쌀 때 반드시 청색이나 홍색 도시락 보자기를 사용했다. 굴속에서 사고가 발생했다고 들으면 홍색 보자기로 도시락을 싸면서 남편과 굴속에 따라붙은 악귀를 쫓았다. 평소에는 청색 보자기로 도시락을 싸며 남편의 무탈을 빌었다.
그렇게 경건하게 도시락을 싸면서도 가끔 남편의 뒷모습이 불안하게 느껴지는 날이 있었다. 꿈자리가 뒤숭숭한 날이었다. 그래도 남편 앞에선 말이 씨가 될까 봐 차마 그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양 씨 아줌마는 남편의 신발을 잡고 두 손으로 공손하게 방안을 향해 돌렸다. 이는 남편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바라면서 비는 탄광촌의 속신이었다. 양 씨 아줌만 뿐만 아니라 모든 광부 아내들이 하는 신발코 돌리기였다. 불안한 마음을 달래려고 빨래와 빨래방망이를 들고 공동우물로 나갔다. 사고 소식이 퍼지고 있었다.
우물방송을 통해 사택 골목으로 소문까지 덧붙여 퍼지고 있었다. 몇몇은 1966년 사북광업소 직영 1066갱에서 4명(임희봉, 채면수, 박용진, 권태수)이 갇혔던 사건과 1968년 1030갱에서 6명이 16시간 동안 매몰됐던 사건을 떠올렸다. 5명은 구출되고 선산부 김정억 씨가 사망하면서 화절령을 울음바다로 만든 사건이었다.
양 씨 아줌마는 하던 빨래를 멈추고 도롱이연못으로 올라갔다. 탑돌이하듯 연못을 돌며 두손을 비비며 기도했다. 연못을 바라보며 허리를 숙여 두 손을 비비고 하늘을 쳐다보며 두 손을 비볐다. 아침마다 뒤뜰에 정화수를 떠놓고 딸자식의 복을 빌던 우리 조상님의 마음처럼, 오늘은 도롱이연못이 양 씨 아줌마의 정화수가 돼 줬다.
그러나 오늘 도롱뇽이 보이지 않았다. 붕락된 갱도에서 나오지 못하는 남편을 기다리듯 도롱뇽이 나타나길 애타게 기다렸다. 구조 시간이 길어지고 남편을 구하러 들어간 구조대는 빈손으로 돌아왔다. 다른 구조대가 들어갔지만 소식은 없다. 해가 저물어도 도롱이연못을 떠날 수 없었던 양 씨 아줌마는 사택에 남은 어린아이들 생각에 겨우 발걸음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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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절령 도롱이 연못.[사진=정선군청] 2025.02.10 onemoregive@newspim.com |
다음날 탄광 근처에 갔지만 경비들이 완강히 막아섰다. 남편의 생사를 모르고 애간장이 타던 아내들은 누구랄 것도 없이 도롱이연못으로 몰려갔다. 가까이 내려앉은 하늘 한 번 쳐다보고 하늘을 품은 연못 한 번 쳐다보면서 무사히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그때, 사택 부녀회장을 맡고 있던 강 씨 아줌마가 소리쳤다.
"여기 도롱뇽이다!"
모두 달려가 보니, 어제는 하루종일 보이지 않던 도롱뇽이 재빠르게 연못을 헤치고 다녔다. 강 씨 아줌마와 평소 사이가 좋지 않았던 한 씨 아줌마가 강 씨 아줌마를 껴안으며 말했다.
"부녀회장님요, 우리 남편들이 분명히 살아있어요. 저 도롱뇽 보소, 살아 있잖아요!"
한 씨 아줌마가 강 씨 아줌마를 부녀회장님이라고 부른 것도 화절령 생기고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래 맞다. 우리 남편, 자네 남편, 저이들 남편, 모두 다 살아있을 거다."
부녀회장은 모두와 손잡기를 주고받더니 "광업소로 다시 가 보자" 하며 등을 밀었다.
광업소 철조망에 붙어 갱구 쪽을 들여다보니 들것에 누운 한 광부가 앰뷸런스로 옮겨지고 있었다. 갱구 입구에서는 구조된 광부들이 탄차 위로 끌어올려지고 있었다. 몸 위에 모포는 덮었지만 팔다리는 신호라도 보내듯 살아있다는 움직을 드러내고 있었다. 구조대원들의 표정도 목소리도 밝았다. 아침에는 아내들을 막으며 냉정했던 경비도 이제는 철조망 가까이 다가와서 소식을 전했다.
"이제 한시름 놨네요. 모두 구조되었거든요. 한 분이 중태지만 나머지 분들은 무사하시답니다"
철조망을 붙잡고 서 있던 양씨 아줌마는 그 말을 듣고 주저앉아 통곡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 눈물이 어찌나 많이 흐르는지 부녀회장이 나중에 아롱이연못 같더라고 놀린 적이 있다. 도롱이연못 가까운 곳에 샘처럼 솟는 아롱이연못이 있었던 것이다.
석탄합리화로 폐광이 되면서 화절령 사택마을은 사라졌지만 도롱이연못에는 여전히 도롱뇽이 나타났다 숨었다 한다. 마치 도롱뇽이 위태로운 우리 가족들의 안부를 걱정하듯, 그들의 기도를 대신해주고 있는 것처럼.
석탄을 실어 나르던 운탄도로를 '운탄고도'라고 이름 붙였는데 화절령에서 만항재로 이어지는 길 바로 '운탄고도 5길'이다. 그 길 사이에서도 도롱이연못은 풍광이 아름다워 핫플레이스로 사랑받고 있다.
이곳에는 지금도 가족의 안위를 비는 사람들이나 자신의 지친 마음을 치유하려는 사람들이 많이 찾아온다고 한다. 하늘을 품은 연못을 들여다보며 도롱뇽과 눈빛을 나누는 동안 치유를 얻고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화절령의 양 씨 아줌마, 강 씨 아줌마, 한 씨 아줌마는 마을을 떠났지만, 도롱뇽은 그들이 걱정돼 차마 못 떠나고 사북을 지키고 있다고 한다.
<정연수 문학박사·탄전문화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