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릿고개 넘어온 우리의 어머니들은 위대하다
바람에 일렁이는 보리밭이 주는 감동 잊지 못해
보리가 타탁타닥 익기 시작하면 여름의 시작
[서울 = 뉴스핌] 오광수 문화전문기자 = '가도 가도 붉은 황토길/ 숨막히는 더위 뿐이더라// 낯선 친구 만나면/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개 없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가도 천리 먼 전라도 길' - 한하운 '전라도길' 일부
[서울 = 뉴스핌] 오광수 문화전문기자 = 청보리밭이 바람에 일렁이면 우리들의 가슴도 푸르게 물결친다. [사진 = 오광수] 2024.06.05 oks34@newspim.com |
'보리피리 불며/ 봄 언덕/ 고향 그리워/ 피-ㄹ 닐니리'로 시작하는 '보리피리'의 시인 한하운은 한센병 환자였다. 보리밭을 생각하면 여전히 보릿고개와 한하운 시인의 시가 떠오른다. 보리밭에 '문둥이'가 숨어 있다가 어린아이의 '생간'을 꺼내 먹는다는 황당한 이야기도 있었다. 젊은 세대들에게는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 이야기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보릿고개를 넘기지 못하고 굶어 죽던 시절이 분명 있었다. 시인 한하운은 한센병이라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서정적이면서도 생명력이 넘치는 시를 썼듯이 보릿고개를 견뎌낸 우리의 어머니들은 참으로 위대하다.
[서울 = 뉴스핌] 오광수 문화전문기자 = 이제 보리밭은 이 땅의 어디서나 만나보기 어렵다. 관광객들을 위한 풍경으로만 남아있기 때문이다. [사진 = 임영자 작가] 2024.06.05 oks34@newspim.com |
'아야 우지마라 배 꺼질라/ 가슴시린 보릿고개 길/ 주린 배 잡고 물 한바가지 배 채우시던/ 그 세월을 어찌 사셨소'
'인동역에서'의 가수 진성이 부르는 '보릿고개'가 여전히 울림이 큰 걸 보면 우리에게 보릿고개는 남의 일이 아니다. 지금도 여전히 보릿고개를 겪으면서 하루하루 분투(奮鬪)하는 서민들이 있다. 다만 수시로 보릿고개가 찾아온다는 점만 다를 뿐이다.
보릿고개와 달리 보리밭은 우리에게 봄과 여름 사이에 놓여있는 최고의 풍경화이자 식량의 보고(寶庫)이다. 그래서 봄날의 보리밭은 늘 넘치는 즐거움이다. 파란 보리싹이 자라서 바람에 일렁이는 청보리의 시절을 지나 노릇하게 익어갈 때까지 버릴 풍경이 하나 없다.
'보리밭 사잇길로 걸어가면/ 뉘 부르는 소리 있어/ 나를 멈춘다/ 옛 생각이 외로워 휘파람 불면/ 고운 노래 귓가에 들려온다/ 돌아보면 아무도 보이지 않고/ 저녁놀 빈 하늘만 눈에 차누나.'
[서울 = 뉴스핌] 오광수 문화전문기자 = 가수 문정선은 가곡 '보리밭'을 불러 대중적으로 히트시켰다. 2024.06.05 oks34@newspim.com |
박화목 작사, 윤용하 작곡의 '보리밭'은 오랜 사랑을 받아온 가곡이다. 따스한 서정이 돋보이는 이 노래는 한국전쟁이 한창일 때 만들어졌다. 피란지인 부산 자갈치 시장의 한 대폿집에서 황해도 은율이 고향인 선후배가 만났다. 시인이자 아동문학가인 박화목은 종군기자, 작곡가 윤용하는 해군 음악대원 신분이었다. 윤용하가 전쟁에 지친 국민들에게 위로가 될 수 있는 노래를 만들어보자고 제안했다. 박 시인이 '옛 생각'이라는 제목의 시를 건넸다. 며칠 뒤에 윤용하가 '보리밭'으로 제목을 바꿔 달아 노래를 완성했다. 두 사람이 함께 떠올린 건 일렁이는 고향의 보리밭 풍경이었다. 이후 '보리밭'이 유명해진 건 1971년 KBS 경음악단장인 김강섭이 편곡하여 문정선이 부르면서다.
'이 땅에 아직 보리밭이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내릴 수 없는 깃발이 있다는 뜻이다/ 이 땅에 아직 보리밭이 있다는 것은/ 땅투기꾼 독점재벌에게는 도저히/ 빼앗길 수 없는 한 뼘의 분노가 있다는 뜻이다/ 이 땅에 아직 보리밭이 있다는 것은/ 밟아도 밟아도 되살아나는 희망/ 우리가 청춘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 안도현 '보리밭' 일부
이제 바람이 부드럽게 보리밭을 일렁이게 만드는 풍경을 만나는 건 쉽지 않다. 남쪽 끝의 청산도나 전북 고창, 경주 분황사의 청보리밭처럼 관광객들을 위한 보리밭을 보는 게 전부다.
[서울 = 뉴스핌] 오광수 문화전문기자 = 초여름은 누렇게 익어서 빳빳하게 고개를 치켜세운 늠름한 보리밭은 보러가고 싶어지는 계절이다. [사진 = 임영자 작가] 2024.06.05 oks34@newspim.com |
봄에서 여름으로 달려가는 지금 어디선가 보리가 익어갈 것이다. 짚불에 그을린 뒤 비벼서 먹으면 고소한 맛이 그만인 '보리서리'는 더 이상 할 수 없지만 초여름 볕에 타닥타닥 익어가는 보리를 만나러 보리밭에 가고 싶다. 부드럽게 물결치던 청보리밭이 누렇게 익어서 고개를 빳빳하게 세우는 늠름한 모습을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