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에 있을 법한 차량 행사에 쓰여
원산 에어쇼에선 노후 전투기 총출동
김정은 결단 없인 경제난 출구 못찾아
[서울=뉴스핌] 이영종 통일전문기자 = 노동당 비서를 지낸 김기남은 김일성 통치 시기부터 북한 정권의 거짓 선전·선동을 관장해온 인물입니다.
나치 독일의 선전상으로 교묘한 선동을 일삼아 악명을 떨친 파울 요제프 괴벨스에 빗대 '평양의 괴벨스'로 불리기도 했죠.
[서울=뉴스핌] 김기남 전 노동당 비서의 장례 행렬이 지난 9일 평양 시내를 지나고 있다. 초상화가 실린 차량이 1963년 생산을 시작해 1981년 단종된 메르세데스-벤츠 600의 4도어형 런들렛(landaulet, 사열차) 모델. [사진=조선중앙통신] 2024.05.14 |
지난 9일 평양에서는 94세 나이로 숨진 김기남의 장례 행사가 열렸습니다.
김정은으로서는 할아버지 때부터 3대에 걸쳐 자기 집안을 위해 일해 온 인물이니 각별히 성대하게 장례식을 치러주었죠.
장지인 평양 신미리 애국열사릉까지 달려가 직접 관 위에 흙을 뿌리며 "빛나는 삶의 본보기"라고 찬양했습니다.
그런데 이날 장례식에서 사람들의 눈길을 끈 건 따로 있었습니다.
빈소인 서장회관(옛 서장구락부)을 출발해 평양 시내를 관통해 장지까지 이어진 행렬에서 김기남의 초상화를 싣고 달린 무개차입니다.
확인 결과 지난 1963년 첫 생산을 시작해 시대를 풍미했던 메르세데스-벤츠 600 모델의 1세대 차량이었는데요.
1981년 단종됐다고 하니 생산이 멈춘 지 무려 43년이 지났는데도 운행을 하고 있는 겁니다.
이젠 자취를 찾기 쉽지 않은 '클래식 카'인 셈이니, 대북전문가들은 물론 자동차 매니아들 사이에서도 화제가 될 수밖에 없죠.
[서울=뉴스핌] 1963년 생산을 시작해 1981년 단종된 메르세데스 벤츠 600의 4가지 모델. [사진=나무위키] |
당시 벤츠600은 모두 4개의 모델로 출시됐는데, 이번에 등장한 건 4도어형 풀만 런들렛(landaulet)으로 국가 원수급 의전이나 군 병력 사열차량으로 생산된 것이라고 합니다.
출시 당시 권위적인 모델로 시선을 끌었고, 롤스로이스가 구매자의 이력까지 꼼꼼하게 따지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벤츠600은 전 세계의 독재 통치자들로부터 러브콜을 받았다고 합니다.
무게가 3톤에 이를 정도로 육중한 몸집이지만 시속 100km에 도달하는 이른바 제로백이 9.7초로 당시로서는 높은 성능을 자랑했다죠.
사실 북한은 벤츠 뿐 아니라 미국 포드사의 고급 세단 등 이미 오래전 단종된 차량을 상당 수 운행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지난 1994년 사망한 김일성 주석의 장례식에서는 운구차량으로 링컨 컨티넨탈이 쓰여 화제가 됐죠.
주민에게는 그토록 반미와 반제국주의를 강요하던 김일성이 왜 마지막 길은 미국을 상징하는 차를 타고 갔을까 하는 점에서죠.
이런 의문이 풀리지 않는 상황에서 아들인 김정일도 2011년 사망했을 때 같은 차를 영구차로 이용했죠.
[서울=뉴스핌] 이영종 통일전문기자 = 김정은(왼쪽 앞줄)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 2011년 12월 아버지인 김정일 국방위원장 장례식에서 운구행렬의 선두에 자리하고 있다. 관이 실린 차량은 미제 링컨컨티넨탈 리무진. [사진=조선중앙통신] 2024.05.14 |
방북 취재 때 벤츠 차량을 이용해볼 기회가 있었는데, 바닥에 차량용 매트가 아닌 장판이 깔려있어 궁핍한 북한 경제의 속살을 들여다보는 듯한 느낌을 받기도 했습니다.
운전기사는 단종 등으로 부품공급이 제대로 되지 않아 폐차된 다른 차량의 것을 떼어 쓰거나 아예 깎거나 다듬어 적당히 맞춰 정비를 한다고 귀띔했습니다.
이런 모습은 차량만이 아닙니다.
지난 2016년 9월 북한은 '원산국제친선항공축전'을 개최했는데 전 세계의 항공 마니아들 사이에서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습니다.
강원도 원산 갈마비행장에서 열린 일종의 에어쇼였는데, 최신 기종의 항공기나 관련 기술 등이 선보인 게 아닌데도 이런 인기를 모은 비결은 따로 있었죠.
퇴역하거나 단종돼 이제는 찾아보기 힘든 전투기와 항공기가 여전히 남아 있고, 하늘을 나는 모습까지 선보였으니 관중들의 환호를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6.25 전쟁 때 사용했던 미그-15와 1947년 농약살포용으로 생산된 AN-2 등 주로 구소련 시기 생산된 항공기였습니다.
[서울=뉴스핌]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 4월 5일 평양에 건설 중인 화성지구 살림집 2단계 공사현장을 돌아본 뒤 떠나고 있다. 김정은이 탄 메르세데스 마이바흐 S600 차량을 경호원들이 호위하고 있다. 뒷편으로 경호 의전용으로 쓰이는 미국 포드사의 트랜짓 승합차가 보인다. [사진=조선중앙TV 캡처] |
아무튼 김기남 장례에 등장한 낡은 벤츠600 런들렛은 사회주의 경제의 비효율과 세습독재, 대북제재라는 3박자가 맞아 떨어진 유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김정은 집권 이후 핵과 미사일 개발에 집착하면서 이에 대응하려는 유엔 등 국제사회의 대북제재는 북한 경제를 옥죄고 있는 상황입니다.
물론 김정은은 최신형 메르세데스 마이바흐 세단을 수시로 바꿔치우며 달러를 탕진하고 있고, 경호・의전차량으로는 일본 렉서스와 토요타 SUV(스포츠유틸리티차량), 미국 포드사의 트랜짓 승합차를 애용하고 있죠.
김정은이 비핵화와 개혁・개방으로 제대로 된 살 길을 찾지 못하는 한 박물관에나 있을 법한 낡은 세단이 평양을 달리고 단종된 비행기가 힘겹게 하늘을 나는 상황은 계속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yjlee@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