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학문의 기초 수학, 창의성이 핵심"
"새로운 대안으로 난관 돌파하라"
다양·포용성으로 과학기술 혁신 촉진제 역할
절박할수록 돌아갈 수 있는 있는 지름길이나 꼼수는 없다. 우리 사회 일터 고수들에게는 그들만의 성공 노하우가 있다. 어떤 철학을 가지고 일을 대하는지, 그 일터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기까지 지난했던 과정과 그늘들, 화려함 뒤에 가려진 노력과 자세를 곱씹어 보면서 성공의 실마리를 찾아볼 일이다. 고용노동부 관료를 거쳐 여성가족부 차관까지 일자리 문제를 전문적으로 고민하고 일터의 정점까지 올랐던 김경선 행복한직장생활연구소장이 각 전문 분야의 고수들을 만나 그들만의 경험과 비밀스러운 성공 레시피를 듣는다.
[서울=뉴스핌] 김경선 행복한직장생활연구소장 = 한국여성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는 80개 회원단체, 그 소속 회원이 8만여 명에 달하는 우리나라 최대 전문인 여성단체 연합체다. 올해 1월부터 총연합회를 이끌고 있는 권오남 회장은 아시아권 최초로 수학·과학 교육의 혁신을 이끈 학자에게 수여되는 스웨덴의 스벤드 페데르센 교육상을 수상하고 국제 수학 교육 분야 탑티어 저널 위원으로도 활약하는 세계적인 수학자이자 수학교육자다.
아울러 한국수학교육학회 회장을 역임하는 등 과학계에서 적극적인 리더십을 발휘해온 리더다. 총연합회 회장이라는 직함과 이름 석 자만 듣고 처음 만나본 권오남 회장은 카리스마 강한 스타일일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부드럽고 포용적인 인상이었다. 수학을 왜 좋아하게 되었냐는 질문에 중학교 2학년 때 서울로 전학 온 시골 안동 출신 여학생이 아무도 풀지 못하는 집합 문제를 당당하게 풀어서 처음으로 자신감을 얻었기 때문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수학은 그렇게 평생 그녀를 이끌어준 하나의 등대 같은 역할을 해온 것이다.
수학이라는 말만 들어도 머리 아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우리나라 사회에서 여성으로서 남들이 외면하는 길을 외롭게 걸어오면서 어려운 관문을 성공적으로 통과해온 그와의 인터뷰 내내 자신만의 업적을 쌓아온 사람 특유의 끈기와 열정, 치열함이 강하게 느껴졌다. 수많은 좌절을 겪었지만 그때마다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길을 모색해 왔다는 그의 말을 들으면서, 쉽지 않은 길이고 외로운 길이지만 꿋꿋하게 헤쳐온 선구자의 이미지가 연상됐다. 수학자이면서 수학교육자 그리고 여성과학계를 이끄는 리더인 그녀와의 인터뷰는 참 배울 점이 많은 인생 이야기로 가득 차 있었다.
[서울=뉴스핌] 정일구 기자 = 권오남 한국여성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회장. 2024.02.06 mironj19@newspim.com |
◆ "수학은 모든 학문의 기본"
- 수학을 전공하고 교수가 되셨지만 현재는 교수 임용이 매우 어려운 상황인데 학생들에게 수학 전공을 권하고 싶으신지.
▲ 오만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수학자들은 수학을 전공하면 모든 학문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수학은 모든 학문의 기본이니까요. 교수가 되지 않아도 수학을 전공한 분들은 다양한 분야로 진출합니다. 수학 모델을 활용해 스타트업으로 성공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주식투자에도 수학 모델이 활용되고요. 세계수학자대회에서 수여되는 상 가운데 랄라바티상은 수학의 대중화에 기여한 학자에게 주어지는 상입니다. 제가 2014년 서울에서 개최된 세계수학자대회에서 랄라바티상 선정위원회 위원을 맡은 바도 있는데요. 이 상은 연구 외에도 도서, 영화, 연극, TV, 전시 등 각종 매체를 통해 수학을 알린 활동을 평가해 주는 상입니다. 그만큼 수학이 실생활에서 많이 활용될 수 있는 것이죠.
◆ "수학 교육에 혁신이 필요, 창의성 키워주는 게 핵심"
- 서울대에서 최초로 플립러닝을 도입하고 서울대 창의성 교육을 위한 교수 모임을 설립하는 등 교육 방식의 혁신을 위해 노력해 오셨는데 이러한 도전을 계속하시는 이유는.
▲ 플립러닝은 기존 전통적인 수업 방식과 반대로 수업에 앞서 미리 학습을 하고 강의실에서는 토론이나 과제 풀이를 중심으로 하게 됩니다. 학생들의 관심과 참여를 높일 수 있는 방법이죠. 과학기술 발전이 세상을 이끌어가는 현 시점에서 기초과학과 수학에 대한 인식을 강화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려면 학생들이 기초과학과 수학의 기본 원리를 효과적으로 학습하도록 하는 것이 필수적이죠. AI 등 급속도로 변화하는 과학기술 발전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결국 학생들의 창의적인 문제해결 능력을 키워주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학생들의 창의성과 다양성을 끌어내기 위해 교육 방식의 혁신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것이 교육자의 기본 임무라고 생각합니다.
[서울=뉴스핌] 정일구 기자 = 권오남 한국여성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회장. 2024.02.06 mironj19@newspim.com |
◆ "소수자로서 겪어온 난관, 새로운 대안으로 돌파"
- 공부 열심히 해서 박사학위 받고 교수로 승승장구해 오신 것으로 보이는데 실제로 좌절을 겪은 경험이 있으신지, 그리고 있다면 어떻게 극복해 오셨는지.
▲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밤을 새우면서 얘기해도 다 못 할 것 같습니다. 살아오면서 좌절을 겪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저 역시 많은 난관에 부딪쳤는데, 그때마다 주어진 난관을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서 헤쳐온 것 같습니다.
먼저, 박사학위를 받으면서 겪었던 난관인데, 저는 수학으로 명성이 꽤 있었던 인디애나대학에서 박사학위를 했습니다. 기본적인 성실성이 있으니까 코스 웍은 상당히 우수하게 마쳤습니다. 그런데 막상 논문을 쓰는 과정에서 제 스스로 창의성이 부족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비단 저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에서 대학 교육, 석사과정까지 마친 사람들이 대부분 창의성 면에서 그렇게 뛰어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박사과정을 할 때 지도교수와 컨퍼런스를 많이 참여했는데, 90년대 초 미국 프린스턴대학에서 개최된 컨퍼런스에 참가했을 때였습니다. 며칠 동안 진행되는 컨퍼런스에 여성 스피커는 단 한 사람뿐이라는 사실에 매우 실망했고, 그분 역시도 배우자의 후광으로 스피커가 되었다는 소문도 있어서 여성 수학자로서 한계가 많이 느껴졌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 나름대로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수학 박사학위를 받은 후 수학교육 석사과정을 인디애나대학에서 다시 밟았습니다. 그런데 박사를 했더라도 다른 학과의 석사과정을 들어가기 위해서 입학절차를 다시 거쳐야 했고 지도교수의 추천서가 필요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자존심 강한 지도교수님이 박사 제자가 수학교육 석사학위를 하는 것을 좋게 볼 리가 만무했고 추천서를 아예 써주지 않으려고 했죠. 그때 교수님이 썼던 표현이 너무 평범하다는 의미의 "먼데인(mundane)"한 공부를 왜 하려 하느냐였어요.(웃음) 그래서 당시 심리학 연구를 했던 지도교수 부인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마침 부인이 연구한 주제가 젠더와 국적이 다른 지도교수와 학생의 관계에 관한 것이라 제가 연구에 도움도 드리고 해서 부인이 지도교수를 설득해 추천서를 써 주셨죠 .(웃음)
[서울=뉴스핌] 정일구 기자 = 권오남 한국여성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회장. 2024.02.06 mironj19@newspim.com |
또 모교인 이화여대에 임용이 되었는데 수학교육과에 저와 같은 배경을 가진 국외박사가 거의 없던 시절이라 국내 학회에서 소외감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그때부터 국제학술대회 참석이나 해외저널 투고, 국제학회 임원 출마, 국외재단으로부터 연구비 수증 등 국제적인 활동을 적극적으로 했습니다. 그것이 나중에 서울대 교수 임용에 도움이 되었죠. 저는 사실 내부에서 문제 해결이 안 될 것 같으면 밖에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해온 것 같아요.
그리고 모교인 이화여대를 떠나 서울대로 옮겨갈 때도 어려움은 있었습니다. 서울대 교수 임용 조건이 수학도 가르치고 수학교육도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었는데 제가 그 요건을 모두 갖추고 있었던 거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교를 떠나는 데 대한 비난도 있었고, 서울대에 와보니 수학교육과 교수 중 제가 최초 여성 교수이고 서울대 교수 중에 비서울대 학부 출신이 거의 없는 시절인 데다 그 당시 40대의 비교적 젊은 나이까지 겹쳐서 조직 내에서 상당히 이질적인 존재였습니다. 당연히 소외감도 많이 느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 운동을 열심히 했습니다. 2000년대 중반 서울대에서는 운동 교수 동호회가 결성되는 시기였고 저도 적극 참여했습니다. 그를 통해서 접촉점도 늘리고 적응해 나가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물론 체력을 기르는 데도 도움이 되었죠. 연구를 잘하려면 건강이 뒷받침돼야 하니까요.
현재는 제가 마라톤에 빠져 있는데 정말 즐겁습니다. 마라톤은 시작한 지 2년째인데요. 하프는 완주했고요. 작년에 춘천마라톤 풀코스에 도전했는데요. 34km에서 도전을 멈추긴 했습니다. 서울대 건달회(건강달리기회)에서 제 별명이 '나이 든 마라톤 영재'랍니다(웃음) 그 전에는 배트민턴, 탁구, 테니스 등 운동을 집중적으로 몇 년씩 바꿔가면서 했습니다. 이렇게 운동을 하는 것이 스트레스 해소, 집중력 향상에도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결론적으로 저는 후배들에게 "난관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돌아가더라도 길을 찾으세요"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본인 제공] |
◆ "여학생이 수학 못한다는 건 일종의 허구적 믿음"
- 일반적으로 여학생이 남학생보다 수학을 못한다고 하는데 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실제로 그런 면이 있는지, 수학교육 방식이 문제인지.
▲ 저는 여학생이 수학을 못한다는 것은 근거 없는 믿음, 일종의 신화(myth)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못한다는 평가는 시험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인데 그 시험 자체가 공정한 것인지에 대해 제대로 짚어보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시험은 무조건 성 중립적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결국 수학에서 잘한다, 못한다의 기준을 다시 정립해야 한다고 봅니다. 실제로 사지선다형 문제는 남성에게 유리한 측면이 있고, 주관식은 과정을 설명하는 역량이 있는 여성에게 유리한 측면이 있습니다. 수학자는 사지선다형 문제를 푸는 사람이 아닙니다. 장시간에 걸쳐 문제를 풀어내는 과제 집중성을 요하는 것이기 때문에 여학생들이 더 잘할 수도 있습니다. 여학생들의 공간지각력이 약하다는 것도 사회화 과정에서 문제가 없는지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남학생의 놀이공간과 여학생의 놀이공간의 차이도 있을 수 있습니다. 어쨌든 저는 잘한다 못한다는 그 평가기준에 대한 분석부터 다시 해야 한다고 봅니다.
◆ "국내외 유관 기관과의 협력을 강화해 나갈 계획"
- 제12대 여성과총 회장으로서 앞으로 어떤 과제에 주력할 계획이신지.
▲ 여성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는 창립 20주년을 맞이한 이래로 과학기술계에서 여성의 활약을 넓히고 여성 과학기술인의 역량을 강화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성공적으로 운영해 왔습니다.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앞으로 2년 동안은 국내외 유관 기관과의 협력을 강화해, 특히 주한 유럽연합(EU) 국가 대사와의 관계를 발판으로 유럽 여성 과학기술단체와의 국제 협력을 한층 증진해 나가고자 합니다. 이미 캐나다 여성단체, 미국 및 호주의 과학기술협회 여성위원회와의 협력을 강화하는 작업을 진행 중이며, 국내 주재 여성 대사들과의 정기적인 라운드테이블을 통해 국제적 네트워크의 기반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국내에서는 여성기자협회, 여성변호사협회, 여성회계사협회, 여성경제인협회 등과 같은 전문 단체들과의 협력을 강화해 나갈 예정이며, 연구와 교육 분야에서 성별 다양성이 법적으로 보장될 수 있도록 정책을 추진할 것입니다. 이러한 다양성과 포용성이 과학기술 혁신을 촉진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확신합니다.
한국여성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회장인 권오남 교수는 대한민국의 수학교육계에 최고 권위자로 꼽힌다. 권 교수는 2003년부터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수학교육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미국 인디애나 대학에서 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이화여자대학교에서도 10년간 교수로 근무했다. 아시아 최초로 스벤드 페데르센 교육상을 수상한 그는 국제 수학교육 분야에서도 뛰어난 활약을 하며 세계적인 수학교육 연구자로 인정받고 있다. 특히 대한민국 수학교육의 개선을 위해 노력해 온 수학교육 리더로서 역할도 크다. 국내에서는 1990년대 말부터 탐구 중심의 수학 교수법을 주장하며 수학교육에 변화를 몰고 왔다. 그는 2025년에 서울에서 개최될 제9차 동아시아수학교육대회의 조직위원장도 맡고 있다.
[서울=뉴스핌] 정일구 기자 = 권오남 한국여성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회장. 2024.02.06 mironj19@newspim.com |
<에필로그>
"저는 원래 I형인데 노력하는 E형이 되고 있어요"라며 활짝 웃는 권오남 회장의 말에서 본인이 이루고자 하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혼자서 정말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본인이 선택한 진로에서 목표를 이루기 위해 경우에 따라서는 제3의 대안을 찾기도 하고, 필요한 자원을 끌어들이기도 하면서 결코 포기하지 않고 견뎌온 단단함이 느껴지는 말이었다.수많은 제자들을 키워오면서 지속적으로 교육 방법을 혁신하고자 노력하는 혁신가로서의 역할도 인상 깊었다. 아울러 오랜 기간 여성과학기술총연합회를 통해 봉사해 오면서 회장으로서 여성과학기술인의 길을 넓혀주기 위해 헌신적으로 일하는 모습이 감명 깊었다. 눈빛을 반짝이며 여성과총 회장으로서의 각오를 밝히는 그를 보면서 권오남호가 이끄는 여성과총이 우리 사회를 어떻게 변화시켜 나갈지 큰 기대가 되었다. 인터뷰를 마치고 오면서 대학을 졸업하고도 수학 학력고사를 다시 보아야 하는 꿈까지 꾸며 수학에 대한 스트레스를 극복하기 힘들었던 필자도 그의 혁신적인 수학교육울 받았으면 달랐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해보았다.(웃음)
*김경선 행복한직장생활연구소장은 1991년 행정고시를 합격하고 공직에 입문했다. 30년 넘는 공직생활 대부분을 고용노동부에서 보냈고, 마지막으로 여성가족부 차관을 역임했다. 은퇴 후 공직생활에서의 경험과 역량을 MZ세대 직장인들과 공유하고자 행복한직장생활연구소를 만들어 온라인으로 소통하고 있다.
kyoungseon0428@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