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정상회담 합의 5주년 행사
"尹 남북관계 파탄냈다" 비난
'더 안 밀린다'며 반격 나선 듯
[서울=뉴스핌] 이영종 통일전문기자 = 문재인 전 대통령이 19일 윤석열 정부를 겨냥해 "남북관계를 파탄냈다"는 주장을 펼치고 나서 파문이 일고 있다.
전직 대통령으로서 이례적으로 직설적인 화법으로 현 정부의 대북정책을 비판하는데서 한 발 더 나아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의 정상회담 등을 자신의 업적과 성과로 부각시키고 나섰다는 점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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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핌] 사진공동취재단 = 문재인 전 대통령이 19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63빌딩에서 열린 9·19 평양공동선언 5주년 기념식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2023.09.19 photo@newspim.com |
문 전 대통령의 현 정부 비판 언급은 이날 오후 서울 여의도에서 열린 9.19 평양공동선언 5주년 기념식 행사에서 나왔다.
자신의 재임기간 중인 2018년 2월 평창 동계올림픽 북한 선수단 참가와 같은 해 4월과 5월의 판문점 정상회담을 거쳐 9월 평양 정상회담에서 합의된 공동선언의 의미를 되새기는 자리에서 윤석열 정부를 향해 직격탄을 날린 것이다.
문 전 대통령은 작심한 듯 "언제 그런 날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파탄 난 지금의 남북관계를 생각하면 안타깝고 착잡하기 짝이 없다"며 한반도 상황을 현 정부의 대북정책 잘못으로 몰아부쳤다.
또 일각에서 남북 군사합의 파기 주장이 제기되는 것과 관련해 "남북군사합의는 지금까지 남북 군사적 충돌을 방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며 "문재인 정부 동안 남북 간 한 건도 군사적 충돌이 발생하지 않았다. 역대 정부 중 한 건도 군사적 충돌이 없었던 정부는 노무현 정부와 문재인 정부뿐"이라고 강변했다.
문 전 대통령의 이런 발언은 북한 김정은의 잇단 핵·미사일 도발과 지난 11~18일 간 이뤄진 러시아 방문 과정에서 드러난 북한의 호전적이고 대남 적대적인 움직임에 따라 우리 국민의 안보불안이 고조되고 있는 시점에서 나왔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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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르 로이터=뉴스핌] 최원진 기자=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좌)이 지난 13일 오후 극동 아무르주 보스토치니 우주기지를 방문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시설 투어를 하고 있는 모습. 2023.09.13 wonjc6@newspim.com |
북한 김정은의 전례 없는 도발적 외교 및 군사결탁 행보에 윤석열 정부는 유엔총회를 계기로 한 새로운 대북제재 어젠다의 확산과 함께 한미일 공조를 통해 북러 밀착, 북중러 연대 강화에 맞선다는 방침을 세워놓고 있다.
그런데 이 와중에 문 전 대통령은 자신의 재임 중 안보 분야 '치적'을 일방적으로 주장하며 마치 현재의 남북관계 대치 국면과 한반도 정세 불안이 윤석열 정부의 대북정책 때문이라고 몰아붙이고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문 전 대통령이 자신의 재임 중 이뤄진 남북 정상회담 등 성과가 더 이상 훼손당하는 걸 방치해서는 안된다는 판단을 내리고 반격에 나선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자칫 문 전 대통령뿐 아니라 더불어민주당 등 야권의 안보관과 유화적 대북정책 추진에 대한 국민 비판여론 확산으로 이어져 지지세력 이반과 몰락은 물론 내년 4월 총선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진단을 했을 공산이 크다.
최진욱 전 통일연구원장은 뉴스핌과의 통화에서 "문 전 대통령이 진영논리로 자신의 대북정책 실패를 합리화 하려는 발언"이라며 "실패했다는 걸 세상이 다 알지만 강성 지지층을 향해서는 바람을 불어넣으며 생명력을 유지하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문 전 대통령도 일부 자신의 대북정책에 대한 자성하는 듯한 분위기를 내비치고 있다.
그가 "평양공동선언에서 더 진도를 내지 못했던 것, 실천적인 성과로 불가역적인 단계까지 가지 못한 것, 실천적인 성과로 불가역적인 단계까지 가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고 말한 대목은 이를 뒷받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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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 2018년 4월 27일 저녁 판문점 '평화의집'에서 열린 남북 정상회담 환영만찬에서 파안대소하고 있다. [사진=로이터 뉴스핌] |
하지만 문 전 대통령의 자화자찬식 주장이나 윤석열 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한 비판은 엄중한 안보상황에 대한 현실 인식이 떨어지고 선을 훌쩍 넘은 모습을 보인다는 게 중론이다.
무엇보다 현 남북관계의 악화는 본질적으로 문 전 대통령과 당시 정부의 책임이 절대적이다.
3차례의 남북 정상회담 개최나 문 정부가 중재했다고 주장하는 북미 정상회담, 판문점 남북미 정상회동 등 일부 성과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문재인 정부에 대해 대립각을 세우며 거친 모습을 보였다.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이 결렬된 두 달 후인 2019년 4월 김정은은 최고인민회의 공개석상에서 문재인 당시 대통령을 향해 "삶은 소대가리" 운운하며 비아냥댔지만 대꾸 한 마디 하지 못했다.
심지어 북한 김정은의 '입' 역할을 하는 여동생 김여정이 "지은 죄를 알지 못한다"는 식으로 몰아세웠지만 문 전 대통령과 정부 고위 당국자들은 함구했다.
통일부 고위 인사는 "문 전 대통령과 당시 정부가 북한에 꼬투리가 잡히는 등 남북 간에 뭔가 내밀한 문제가 생긴 게 틀림없고 이에 대해 북한이 거친 반응을 보였지만 문재인 정부는 이에 대해 아직까지 국민에게 고백하거나 속죄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김여정이 "남조선 것들" 운운하며 위협을 가하다 우리 국민 세금으로 지은 한국 측 재산인 개성공단 내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백주에 폭파했지만 문재인 당시 대통령과 청와대 안보실장과 국정원장, 통일부 장관 등 핵심 당국자들은 침묵했다.
이에 대해 비판을 가하며 손해배상 청구 등 합당한 조치를 뒤늦게나마 취하고 있는 건 윤석열 정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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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관영매체는 2023년 3월 28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7일 핵무기 병기화 사업을 지도했다"면서 관련 사진을 공개했다. 김 위원장 뒤 벽면에 '화산-31' 전술핵탄두 도면이 보인다. [사진=조선중앙통신] |
익명을 요구한 국책 연구기관 박사는 "무슨 곡절이 있었는지 적어도 후임 정부에는 인수인계 해줘야 대북정책의 연속성이 이뤄질 수 있다"며 "꽁꽁 숨기면서 알아서 하라는 식으로 나서더니 이제 와서 윤석열 정부 탓을 하는 건 이해할 수 없다"고 꼬집었다.
문 전 대통령은 5주년 기념식 발언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8년 10.4 공동선언 1주년 기념행사 때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10.4 공동선언이라는 소중한 나무를 한 그루 심었는데, 사람들이 물을 주지 않아 나무가 시들고 있다'고 했던 말을 거론했다.
하지만 이는 스스로의 잘못을 후임 정부에 전가하는 잘못된 행태에 불과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제대로 된 합의가 아니라 북한의 요구에 끌려가는 대통령과 정부를 김정은은 농락했고, 결국 북한이 전술핵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고도화 하는 시간을 벌 수 있게 했다는 얘기다.
상황이 이런데도 문 전 대통령은 "남북관계가 다시 파탄을 맞는 지금도 남북군사합의는 남북 간 군사충돌을 막는 최후의 안전핀 역할을 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남한을 겨냥한 노골적인 전술핵 폭파 실험과 해일로 무차별 살상을 가하는 핵 어뢰 등 가공할 무기로 위협을 가하며 합의를 종잇장으로 만든 김정은의 행태와는 동떨어진 인식이다.
최진욱 전 원장은 "북한에는 여전히 비판 한마디 하지 못하면서 후임 정부를 비난하는 데만 골몰하는 전직 대통령의 모습은 볼썽사납다"고 말했다.
yjlee@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