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연방 대법원 '낙태권 폐기' 판결에 전역서 항의 시위
"시대역행" "가장 어두운 날" 우방국들도 비판
다음은 동성혼·피임권?...올해 선거 이슈로 부상
[서울=뉴스핌] 최원진 기자= 미국 여성의 '낳지 않을 권리'가 지난 24일(현지시간)부로 사라졌다. 미 연방대법원이 '로 대 웨이드'(Roe v. Wade) 판례를 폐기하면서 각 주(州)별 낙태 금지가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미 경제매체 CNBC 등 주요 외신은 이번 판결로 미 50개주 중 절반 정도인 26개주에서 낙태가 금지되거나 제한될 수 있다고 전망한다.
'로 대 웨이드'는 지난 1969년 '제인 로'란 가명의 텍사스주 여성이 성범죄로 원치 않는 임신을 했지만 텍사스주법상 임신중절은 불법이기에 위헌 소송을 제기했다.
미국 대법원 앞에서 낙태관련 판결에 항위하는 시위대. [사진=로이터 뉴스핌] |
당시 연방 대법원은 수정헌법 제14조 '사생활의 헌법적 권리'를 근거로 위헌이라고 판결, '로 대 웨이드'는 이후 반세기 동안 미국 여성의 임신 6개월 전 낙태권을 보장해왔다.
역사적 관행을 뒤집는 이번 판결에 미국 주요 도시들에서는 항의 시위가 열렸다. 국내 뿐만 아니라 미국의 우방국들조차 "후퇴하는 행보"라고 지적했다.
도널드 트럼프 전 행정부의 대법관 임명으로 현재 정원 9명 중 6명이 보수 성향 대법관이기 때문에 판결 뒤집기가 가능했다는 평이 나오는 가운데 민주당은 오는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낙태권 폐기를 정치 이슈화 하고 있다.
◆ 美 우방국들조차 "후퇴 행위" 비판...미 전역서 시위 촉발
미국의 우방국들조차 이번 판결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나섰다.
영국 일간 가디언에 따르면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는 지난 24일 르완다에서 열린 영연방 정상회의 기자회견에서 "큰 후퇴"라며 "나는 언제나 여성 인권을 믿어왔고 그러한 시각을 견지해왔다"고 비판했다.
스코틀랜드 자치정부 수반인 니콜라 스터전도 "내 일생에서 여성 인권과 관련해 가장 어두운 날"이라며 "이는 미국 뿐만 아니라 기타 국가들의 반(反) 낙태, 반 여성 세력을 강하게 만들 것"이라고 트윗했다.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는 트위터에 "어떤 정부나 정치인, 남성도 여성의 신체에 대해 왈가왈부할 수 없다"며 "미국 여성들이 느낄 공포와 분노는 가늠할 수 없다"고 썼다.
프랑스 외교부는 여성의 낙태권이 "보건과 생존의 문제"라며 지금이라도 연방 당국이 여성의 안전한 낙태를 계속 지원해야 한다는 입장을 전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별도의 트윗에서 "낙태권은 여성의 근본적인 권리"라고 주장했다.
저신다 아던 뉴질랜드 총리. [사진=로이터 뉴스핌] |
여성인 저신다 아던 뉴질랜드 총리는 "뉴질랜드는 최근 낙태를 비범죄화했다. 낙태는 범죄가 아닌 보건 사안"이라며 "이는 여성이 자신의 몸에 대한 결정을 내릴 기본권에 대한 것"이라고 목소리를 냈다.
세계보건기구(WHO)의 테워드로스 아드하놈 거브러여스 사무총장도 거들었다. 그는 이번 판결이 "여성의 권리와 의료 접근을 모두 축소한다"며 "우려되고 실망스럽다"고 트윗했다.
그동안 낙태권을 여성의 기본권으로 생각해온 수많은 미국인들은 길거리 시위에 나섰다. 연방 대법원과 백악관이 있는 수도 워싱턴DC를 비롯해 뉴욕시, 시카고, 로스앤젤레스, 시애틀, 애틀랜타, 오스틴 등 미 주요 도시들에서 크고 작은 행진 시위가 이어졌다.
뉴욕시의 경우 수천만명이 6월 '성소수자의 달'(Pride Month)을 맞이해 열린 행사가 낙태권 판례 폐기에 반기를 드는 시위로 변했다고 가디언이 26일 전했다. 시위대는 "당신의 자궁이 아니다. 당신의 선택권이 아니다"라고 외치며 행진을 이어갔다.
미 동부 로드아일랜드 프로비던스의 한 시위 현장에서는 폭력 사태로 번졌다. 비번인 경찰이 시위 여성을 주먹으로 가격한 일이 발생했다.
미국 CBS방송이 이날 공개한 유거브와 공동 설문 조사 결과 미국인 59%가 이번 판결에 반대한 것으로 나타났다.
◆ 낙태권 다음은 동성혼·피임권...민주당은 본격 정치 이슈화
연방 대법원이 낙태권을 보장하는 판례를 뒤집자 다음은 동성혼과 피임권이 될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CBS방송 설문조사에서 연방 대법원이 동성혼 권리 판례도 손볼 것 같다고 한 답변은 57%, 피임권도 판례를 뒤집을 것이란 관측은 55%로 집계됐다.
'로 대 웨이드' 판례를 파기한 결정에 항의하는 시위대가 미 연방 대법원 앞을 행진하고 있다. 2022.06.26 [사진=로이터 뉴스핌] |
실제로 보수 성향의 클래런스 토머스 대법관은 '로 대 웨이드' 판례 파기에 대한 보충 의견서에서 "그리스월드, 로런스, 오버게펠을 포함한 다른 판례들도 모두 재검토해야 한다"며 "이들 판례는 명백히 잘못된 판결이었다"고 썼다.
이들 판례는 피임, 동성애, 동성혼을 인정한 대법원 판례다. 피임권의 경우 대법원이 판례를 파기한다면 임신중절 약 처방이 금지되거나 제한받을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보수 성향이 과반인 대법원이 낙태권에 그치지 않고 다른 시민권 판례도 재검토할 것으로 전망되는 가운데 민주당은 이를 오는 11월 중간선거에서 지지층 결집을 위한 한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 24일 긴급 대국민 연설에서 낙태권 폐기 판결에 "대법원은 미국을 150년 전으로 돌려놨다. 슬픈 날이지만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고 발언했다.
이어 그는 "올 가을 우리는 반드시 여성의 권리를 법으로 제정할 상원의원과 하원의원들을 더 많이 뽑아야 한다"며 "올해 가을 선거는 로 대 웨이드가 달려 있다. 개인 자유가 달려 있다"고 선언했다.
미국 대통령에게는 연방 대법원의 판결을 뒤집을 힘이 없다. 이에 일각에서는 바이든 대통령이 이번 사안을 전면에 내세워 지지층을 결집하고, 낮은 지지율 반등을 꾀함과 동시에 이번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에 힘을 실어주려는 의도로 해석한다.
민주당 하원 선거위원회 위원장직을 맡고 있는 션 패트릭 말로니 의원은 "공화당은 모든 50개주에서 낙태를 범죄화 하고 싶어 한다. 대법원 판결로 이번 선거에서 이들이 양원을 장악한다면 현실화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미국 대법원의 낙태권 폐기는 사회적 파장을 넘어 오는 11월 중간선거에서 주요 이슈가 될 전망이다.
wonjc6@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