잇따른 반기업법에...경영계, 빈약한 근거로 대응
'줄 건 주고 받을 건 받는 게 영리한 대응'
[서울=뉴스핌] 임성봉 기자 = 최근 개봉한 영화 킹메이커에 등장하는 선거 전략가 서창대는 '졌지만 잘 싸웠다'는 말을 가장 싫어한다. 표현 그 자체가 갖는 위로와 따뜻함과는 별개로 현실에서 '졌지만 잘 싸웠다'는 비겁한 자기 위안인 경우가 많기 때문일 테다. 이기지 못했다면 잘 싸우지 못한 것이고 잘 싸웠다면 이겼을 것이다. 이마저도 그럴 것인데, 졌는데 잘 싸우지도 못했다면 어떤 말을 건네야 할까.
연초부터 경영계와 정부가 크게 한 판 붙었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중대재해법), 노동이사제, 국민연금 대표소송을 두고 일명 '반기업법'이라며 경영계가 반발했다. 그럼 뭐하나. 중대재해법은 이미 시행됐고 노동이사제는 올해 하반기부터 본격적으로 도입된다. 국민연금 대표소송 건은 이달 중으로 매듭지어질 전망이지만, 정부 의지대로 처리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결과적으로 경영계는 자신들의 숨통을 조여오는 반기업 쓰나미를 막지 못했다. 문제는, 졌는데 잘 싸우지도 못했다는 점이다. 칼날은 무뎠고 방책은 허술했다. 근거와 논리는 빈약한데 주장만 가득해 설득력은 물론 공감도 잃었다. 명분은 부족하고 전략은 낡아 실리도 챙기지 못했다.
임성봉 산업1부 기자 |
중대재해법은 경제계도 막을 수 없는 거대한 흐름이었다. 지난해 한국에서 산업재해로 인정된 사망 노동자만 헤아려봐도 2000여명에 달한다. 당장 광주 아파트와 양주 채석장 붕괴 사고만 봐도 중대재해법의 명분은 충분하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기업의 부담이 늘어나는 만큼 정부의 부담도 함께 늘리는 방향으로 전략을 짰으면 어땠을까. '기업과 정부가 부담은 나누고 안전망은 두텁게 하자'고 경영계가 치고 나갔더라면. 법 조항이 모호하다는 외침보다는 조금 더 명분과 실리를 챙길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노동이사제는 공공기관에만 도입되는 제도지만 큰 부작용이 없다면 향후 민간기업에도 적용될 공산이 크다. 이 역시 대한상공회의소 등 경제 5단체가 나서 국회에 노동이사제 도입을 중단해달라고 줄기차게 요구했으나 먹히지 않았다. 비교적 반기업 정서가 강한 한국에서 "노동이사제 도입은 기울어진 운동장을 만든다"고 주장하니 통할 리가 없다.
노동이사 1명이 공공기관의 혁신을 방해하고 더 나아가 노동조합의 이익만을 추구할 것이란 주장도 다소 설득력이 떨어진다. 거창한 주장에 비해 제시한 근거가 궁색하기 때문이다. 노동이사제를 시행 중인 다른 국가의 사례를 다채롭게 끌어오고, 부작용을 실증할 수 있는 숫자적 데이터를 제시하며 설득에 나섰어야 했다. 설득의 힘은 거창한 주장이 아니라 구체적 근거에서 나온다.
국민연금 대표소송 건은 그나마 다퉈볼 만하다. 정부의 명분은 부족한 반면 허점이 많기 때문이다. 국민연금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수탁위)가 기금운용위원회(기금위)의 소송 권한을 가져가야 할 이유를 정부 스스로도 명쾌히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정부(기금위)가 기업을 상대로 소송하자니 정치적 부담이 만만치 않다. 만약 외부 자문기관인 수탁위에 소송 권한을 부여하면 정부는 스튜어드십 코드는 시행하되 책임이나 부담은 피할 수 있다.
속내가 뻔히 보인다. 그래서 이 문제는 선택과 집중으로 명분을 쌓고 약점을 치면 막을 길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국민연금의 존재 이유는 국민의 노후 보장이다. 수탁위의 대표소송이 국민연금의 수익률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근거, 기업의 주가를 휘청이게 한다는 근거를 탄탄히 마련해 제시한다면 정부의 명분을 쉽게 흔들 수 있다. 아니, 정부로서는 별다른 명분이 없었으니 흔드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쌓지 못하게 만들 수 있는 셈이다.
지금 경영계에 필요한 건 영리한 대응이다. 곡소리만 내서는 어떤 것도 얻을 수 없다. 몸은 ESG(환경·사회·지배구조) 시대를 살면서 정신은 2000년대 이전에 머물러 있다면 곤란하다. 반기업법을 막지 못하겠다면, 차라리 기업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열매를 받아 손해를 최소화 하는 것도 생각해 볼 전략이다. 받을 건 받고 줄 건 주는 게 영리한 대응이다. 뺏기기만 하고 아무것도 챙기지 못하면 '졌는데, 잘 싸우지도 못했다' 소리 듣기에 딱 좋다.
imbong@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