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핌] 이영란 편집위원= 지난 11월29일 타계한 산정 서세옥 화백은 일평생 한국화의 현대화 작업을 주도한 선구자였다. 중국이나 일본의 전통회화와는 전혀 궤를 달리 하는 '가장 우리 다운 그림'을 그리기 위해 일평생 먹과 한지 앞에서 올곧게 수련을 이어왔던 작가였다.
동시에 산정은 인간을 통찰하며 독자적인 조형 영역을 구축한 뛰어난 아티스트이기도 했다. 그의 수묵 추상작업은 국내에서도 오랜 기간 큰 반향을 일으켰지만 말년에는 세계적인 미술관과 화랑들이 그의 작업에 주목하며 작품전시회를 앞다퉈 열고, 작품을 수장하며 조형세계를 분석한 바 있다. 아울러 그는 한옥 사랑에도 남달라 성북동 자택 내에 창덕궁 연경당을 본뜬 한옥을 짓고 살았던 한옥애호가이기도 했다.
[서울=뉴스핌] 이현경 기자 = 서세옥 선생 [사진=갤러리현대] 2020.12.03 89hklee@newspim.com |
대구 출신인 산정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서 동양화를 전공했다. 1949년 해방 후 처음 생긴 미술공모전인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국무총리상을 수상하며 서세옥이란 이름을 세상에 알리기 시작했다. 이후 그는 1955년부터 1995년까지 40년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로 재직하며 오늘날 우리 미술계를 이끌고 있는 수많은 작가들을 길러냈다.
대학 강단에 선 산정은 한국화의 고루한 규범을 깨뜨리는 작업을 주도했다. 좌고우면하지 않고 새로운 실험과 시도가 필요하다며 혁신의 최일선에 섰다. 그리고 시대와 호흡하며 회화의 본질에 다가가는 그림을 그릴 것을 후학들에게 강조했다. 실제로 서세옥 자신도 무심한 듯 툭툭 찍은 몇 개의 점과 선만으로 담백하나 꽉 찬 밀도를 보여주는 회화들을 남겼다. 구질구질한 설명과 부수적인 요소들을 일체 걷어내고, 오로지 중요한 뼈대만으로 우리 그림의 가장 높은 경지를 구가한 것이다.
초창기 전통적인 동양화 기법에 충실한 서화작업을 하며 역량을 인정받던 서세옥은 1960년대초 묵림회를 결성해 수묵의 현대화 운동을 시작했다. 당시 묵림회의 청년작가들은 전통의 답습에 빠져있던 한국화단에 새 바람을 일으키며 전위의 선봉에 섰다. 이후 서세옥은 1970년대에 접어들며 단순한 묵선과 여백을 통해 인간 형상을 그리며 더욱 탄탄한 조형세계를 구축해갔다. 모든 것을 가차없이 걷어낸 절제된 그의 수묵추상은 너무나 단순한 듯 하지만 기운 생동하는 살아있는 그림이었다.
서세옥 '두사람', 39.8 x 45cm, 닥종이에 수묵, 2004. [사진=국립현대미술관] |
'사람', '두 사람', '춤추는 사람들', '거꾸로 보는 사람' 등 일련의 사람 시리즈는 마치 물처럼 슴슴하게 다가오지만 그 무심한 속에 사람의 역동성, 인간간 유대가 느껴진다. 때로는 인간이 처한 불안, 어두움, 절규, 묵직함도 느껴진다.
산정은 이같은 '인간' 시리즈로 한국화 부문에서 독보적인 작가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했다. 사람을 그리면서 간결한 먹선과 번짐만으로 인간 존재의 본질을 압축적으로 드러낸 그의 '사람들' 시리즈는 현대의 한국화의 정수로 평가된다. 그의 '사람들' 작업은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휘장막에 새겨져 많은 음악팬들과 무시로 조우하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산정의 휘장막 작품은 2007년의 오페라극장 화재로 소실된바 있다.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휘장막을 장식했던 산정 서세옥의 '사람들'. [사진=예술의전당] |
산정 서세옥은 자신의 시대별 대표작 등 전시기의 핵심작을 추려 100점의 작품을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했다. 미술시장에서 그의 작품은 각계의 미술애호가들로부터 끊임없는 사랑을 받는 블루칩이다. 하지만 그는 국립미술관에 기증함으로써 보다 많은 대중들이 그의 작품을 언제든 감상할 수 있는 길을 터놓았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지난 2015년 기증작품 특별전이 열렸을 당시 미술관측은 다음과 같은 산정의 말을 소개했다.
"나는 가시적인 대상의 노예 노릇을 하지 않는다. 절대의 큰 바다에는 형태가 없다. 나는 때때로 대상을 초월하여 무극의 저 공간에서 찾고 있다. 거기에는 절대해방과 절대사유가 있다. (중략) 일상과 허상이 조화를 이루면 모두가 정토가 아니던가. 여기에 나의 붓끝이 닿으면 춤과 노래가 흥겹게 어우러질 것이다."
오늘날 일체의 번잡한 장례식도 없이 조용히 영면에 든 것을 예고하기라도 한 것일까? 서 화백은 당시 미술관측과 가진 인터뷰에서 "모든 것을 둥근 원으로 생각하라"면서 "내가 죽게 돼서 슬픈 게 아니라 또 새로운 게 생기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서세옥은 한국미술협회 이사장, 서울대 미대 학장 등을 거쳤고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을 역임했다. 2012년에는 은관문화훈장을 수훈했다. 또 미국의 명문 미술학교인 로드아일랜드디자인스쿨이 그에게 명예 미술학 박사학위를 헌정하기도 했다. 2018년에는 뉴욕의 유명 화랑인 리만 머핀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개최했고 올 6월에는 홍콩 리만 머핀 갤러리에서 생애 마지막 전시회를 갖기도 했다. 전세계를 누비며 설치미술가로 활동 중인 서도호 작가와 건축가인 서을호 씨가 산정의 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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