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권사의 꽃' 애널리스트, '천덕꾸러기'로 추락
패시브 펀드, 액티브 펀드의 2배로 성장 '혁명'
자산배분전략에 맞춰 펀드 운용 자문 등 모색
[서울=뉴스핌] 문형민 기자 = # "서울에 있는 유명 대학 재학생이 애널리스트가 꿈이라면서 이것저것 질문을 해서 성심성의껏 답변을 해줬습니다. 이메일로 연락을 하다 직접 만나 얘기를 하기도 했죠. 한동안 연락이 끊겨 무슨 문제라도 생겼나 걱정도 되더라고요. 최근에 여의도에서 길 가다 이 친구를 만났습니다. 애널리스트 대신 한 증권사 기업금융(IB) 부서에 입사했다고 하더군요. 애널리스트의 인기가 떨어진 걸 재확인하는 계기였습니다." (윤여삼 메리츠종금증권 채권 애널리스트)
# "보조 애널리스트(RA) 키우기 힘들어요. 전체적인 애널리스트 숫자가 줄고 일은 더 많아지니 선배 애널리스트도 시간을 내서 가르치기가 어려워졌죠. 52시간 근무제가 시행된 데다 젊은 직원들의 성향이 퇴근시간 이후까지 남아 일하거나 배우려고 하지 않아요. 예전처럼 일대일 도제식으로 가르치는 경우가 확 줄었죠. 물론 배우려는 RA한테는 선배들도 성의를 보입니다만. 더 힘 빠지는 건 기껏 가르쳐놓으면 타사나 다른 직종으로 이직하는 거예요. 애널리스트 일이 힘들고 연봉을 몇천만원 더 받을 수 있으니 이해도 되지만 아쉽죠." (A증권 리서치센터장)
'증권사의 꽃'으로 불리는 리서치센터 애널리스트의 위상이 추락하고 있다. 애널리스트는 2010년까지만 해도 대학생들에게 선망의 직업이었다. 억대 연봉에 인센티브도 두둑했다. 하지만 최근 몇 년 새 상황이 달라졌다. 증권사 신입 직원들은 리서치센터보다 기업금융(IB)이나 세일즈 앤드 트레이딩(S&T), 자산관리(WM) 등 부서를 선호한다. 많은 애널리스트들이 벤처캐피탈(VC), 헤지펀드 등 자산운용사, 스타트업 등으로 떠났다.
◆ 애널리스트 1/3 떠나고, 연봉도 줄고
금융투자협회에 등록된 증권사 애널리스트는 지난 2010년 1575명에 달했으나 지난해 말 1057명으로 줄었다. 10년 새 3명 중 1명이 그만둔 셈이다. 애널리스트들 사이에선 1000명 선이 붕괴되는 건 시간문제라는 얘기도 나온다.
애널리스트에 대한 대우도 달라졌다. 몇 년 전 유명 반도체업종 담당 애널리스트가 연봉 10억원을 받고 다른 증권사로 스카우트돼 화제가 됐다. 이는 특별한 사례이지만 당시 '베스트'급 애널리스트 연봉은 3억~4억원에 달했다. 40세 전후의 나이에 최소한 경제적으로는 '성공'했다고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근래 이 정도 연봉을 받는 애널리스트는 손에 꼽힐 정도다. 한 증권사 리서치센터장은 "몇 년 전에 비해 연봉이 대략 1억원은 줄었고, RA 등 주니어 애널리스트에 대한 대우는 더 안 좋아졌다"고 전했다.
또 대형사, 중소형사에 따라 애널리스트의 위상은 크게 다르다. 미래에셋대우, NH투자증권, 삼성증권, 한국투자증권, KB증권, 신한금융투자, 메리츠종금증권, 하나금융투자, 키움증권, 대신증권 등 대형사 리서치센터는 인원이 크게 줄지 않았다. 숫자가 줄긴 했지만 리서치센터에서 IB나 트레이딩센터, WM 등 관련 부서로 이동해 기업 분석 및 평가 등 업무를 계속한다. 하지만 중소형 증권사의 리서치센터는 인력이 10명 미만인 곳이 많아졌다. 아예 리서치센터를 없앤 곳도 있다.
◆ 액티브에서 패시브로, 국내에서 해외 주식으로
애널리스트의 위상이 상전벽해한 건 시장의 변화와 관련이 있다. 무엇보다도 자산운용시장의 중심이 액티브(Active)에서 패시브(Passive)로 바뀐 게 가장 큰 이유다. 액티브 펀드란 펀드매니저의 재량으로 가치에 비해 저평가된 종목을 사고, 고평가된 주식을 팔아 시장을 웃도는 수익을 추구하는 방식이다. 반면 패시브 펀드란 펀드매니저의 재량이 개입되지 않고, 시장 지수를 따라가게 매매하는 펀드다. 인덱스펀드, 상장지수펀드(ETF) 등이 여기에 속한다. 액티브 펀드에선 애널리스트의 종목 분석 등 역할이 중요하지만 패시브 펀드에선 필요하지 않다.
[자료=유안타증권, 금융투자협회] 2020.03.04 hyung13@newspim.com |
금융투자협회와 유안타증권에 따르면 지난 2006년 국내 주식형에서 액티브 펀드 순자산은 33조130억원으로 패시브펀드 3조2009억원보다 10배 많았다. 액티브 펀드는 적립식 펀드 붐을 타고 2007년 63조6709억원으로 최대치를 기록했고,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인해 43조9388억원으로 줄었다가 2009년 증시 반등과 함께 61조5108억원으로 늘었다. 그후 슬금슬금 줄어 2011년 40조원대, 2014년 30조원대, 2016년 20조원대로 내려앉았다. 코스피는 2011년 2231을 찍은 후 2017년 중반까지 약 6년간 1800~2100 사이 박스권에 갇혔다. 이른바 '박스피' 시대. 펀드 수익률도 형편없는 수준으로 떨어지자 액티브 펀드에서 투자자금이 빠져나갔다.
반면 패시브 펀드는 이 기간 성장을 거듭했다. 2010년 10조원을 돌파하고, 2년 만에 20조원대에 진입했다. 2017년 31조868억원으로 늘어나며 액티브를 역전했다. 그리고 지난해 45조6106억원으로 액티브(21조7373억원)의 두 배 규모를 기록했다. 10여 년 만에 이뤄낸 드라마틱한 변화였다.
액티브를 역전한 '패시브 혁명'은 우리나라에서만 일어난 일은 아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패시브 펀드는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 시장에서도 대세가 됐다. 다양한 ETF 등 패시브 투자 장치가 쏟아져나오고, 양적 완화(QE)와 저금리 정책 때문에 불어난 돈이 패시브 펀드로 몰려들었다. 여기에 '로보(Robo)'라고 불리는 알고리즘 투자 기법이 도입됐다. 인간의 판단 능력을 웃도는 인공지능(AI)이 주식과 채권을 사고팔고, 포트폴리오를 구성하는 거다. 패시브 펀드는 저비용, 저위험이라는 장점이 있다. 애널리스트, 펀드매니저가 '좋은' 종목을 고르기 위해선 많은 비용을 지불해야 하지만 패시브는 그럴 필요가 없다.
두 번째 이유는 해외주식 투자가 많아진 거다. 한국예탁결제원에 따르면 외화증권 결제금액은 지난 2015년 376억9000만달러에서 지난해 1712억2000만달러로 4년 새 약 5배로 늘었다. 지난해 한 해에만 600억달러 이상 급증했다. 한 증권사 리서치센터장은 "국내 기업의 성장성이 둔화되고 '성장 산업'이라 부를 만한 곳도 여의치 않으니 애널리스트가 분석하고 내세울 기업도 줄었다"면서 "약사 출신 바이오 애널리스트한테 어쭙잖은 국내 바이오기업 분석하느니 글로벌 대형 제약사를 분석해보라고 권할 정도"라고 전했다.
[자료=한국예탁결제원] 2020.03.04 hyung13@newspim.com |
◆ '돈 쓰는' 리서치의 예고된 운명
액티브에서 패시브로 투자 문화가 바뀐 것과 증권사 애널리스트의 위상 하락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애널리스트가 속해 있는 리서치센터는 법인영업부와 밀착해 있다. 애널리스트가 기업을 분석하고 보고서를 작성하면 법인영업부 직원은 담당하는 투자기관, 즉 국민연금 등 연기금, 보험사, 은행, 자산운용사 등과 세미나 약속을 잡는다. 애널리스트는 그곳에 가서 펀드매니저(운용역)들을 상대로 프레젠테이션을 한다. 기관투자자들은 이에 대한 대가로 매수든 매도든 주문을 해당 증권사에 준다. 이렇게 받은 주문 수수료가 증권사의 수익이고, 이 수익이 애널리스트에게 연봉으로 돌아온다.
액티브 펀드가 쪼그라들면서 주문도 줄어들고 증권사의 법인영업 수익도 감소했다. 여기에 수수료율도 증권사 간 경쟁으로 하락했다. 대형 증권사가 법인영업으로 연간 창출하는 이익 수준이 한때 200억원을 웃돌았으나 최근 100억원 정도로 급감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리서치센터는 증권사에서 '돈 먹는 하마'로 인식되게 됐다.
국내 증권사에 리서치센터 체계가 갖춰지고 애널리스트 업무가 분화된 건 1996~1997년이다. 외국인에게 국내 자본시장이 개방된 후 분석기법, 투자기법이 유입됐고 증권사들은 앞다퉈 투자분석실 또는 투자전략실 등을 만들어 리서치 업무를 시작했다. 외환위기를 겪은 후 증권시장에 '바이 코리아(Buy Korea) 펀드' 열풍이 불자 리서치센터도 급격히 커졌다. 당시 현대증권(현 KB증권), 삼성증권 등 대형사 리서치센터의 인원은 100명을 훌쩍 넘었다. 산업, 기업을 담당하는 기업분석팀과 거시경제지표와 시장 전체 흐름을 살피는 투자전략팀 등 영역을 분화한 것도 이때다. 2000년대 초중반 코스피가 2000까지 뛰어오르는 랠리를 이어갈 때 애널리스트들은 황금기를 구가했다. 코스피가 2600선을 넘어섰지만 애널리스트의 전성기는 되돌아오지 않았다.
◆ '돈 버는' 리서치...펀드 운용 자문에서 유료화까지
그렇다면 패시브 중심으로 바뀐 환경에서 애널리스트는 어떻게 위상을 되찾을 수 있을까. 업계 전문가들은 '돈 쓰는' 리서치센터에서 '돈 버는' 리서치센터로 바뀌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이런 흐름은 이미 시작됐다.
우선 리서치센터가 펀드 운용을 자문해 자문수수료를 버는 거다. 대표적인 사례가 하나금융투자 리서치센터다. 하나금융투자는 조용준 센터장이 취임한 후 랩 운용실과 협업을 통해 랩어카운트 상품을 출시했고, 이후 자문 영역을 자산운용으로 확대했다. 2017년 5월 KTB자산운용과 'KTB글로벌4차산업1등주증권투자신탁', 12월에 하나UBS자산운용과 '하나UBS글로벌4차산업1등주플러스증권자투자신탁'을 각각 내놓았다. 자산운용사가 펀드 운용을 책임지지만 하나금융투자 리서치센터가 투자자문 역할을 맡은 것. 이들 펀드는 지난해 30%가량의 수익률을 기록했고, 하나금융투자 리서치센터는 자문료로 30억원 가까이 벌었다. 하나금융투자는 관련 상품을 더 늘릴 예정이다.
KB투자증권도 올해 글로벌 자산배분전략에 맞춘 모델 포트폴리오를 기반으로 랩어카운트 상품을 출시할 계획이다. 신동준 리서치센터장은 "리서치센터 인원 87명 중 투자전략, 자산배분에 관여하는 35명가량이 매월 말 'The KB's Core View' 보고서를 발행한다"며 "이 보고서는 증권사는 물론 KB금융그룹에 속해 있는 은행, 보험사, 자산운용 등에서도 투자와 영업에 활용한다"고 설명했다. 이 보고서는 글로벌 경제를 개괄하고, 외환시장에 영향을 미치는 여러 이슈를 점검한 후 △선진국 주식 △한국/중국 주식 △신흥국 주식 △국채 △크레딧 △해외 부동산 △원자재 등 분야별 자산의 비중을 어떻게 조정할 것인지를 제시한다. 개별 종목보다는 ETF에 투자하는 방식이다. 종목 분석보다는 거시경제와 시장분석을 통한 자산배분으로 승부수를 띄운 거다.
또 다른 '돈 버는' 방식은 리서치 자료 유료화다. 최석원 SK증권 리서치센터장은 "유독 한국에서는 리서치 보고서가 공짜로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공공재처럼 소비된다"며 "외국계 증권사가 고객에게만 제공하듯이 국내도 바뀔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최 센터장뿐만 아니라 다른 애널리스트들도 '저작권 보호'를 위해서라도 대가를 받아야 한다는 데 공감한다.
국내 증권업계에서 리서치 자료 유료화 논의가 시작된 것은 1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미 2009년 증권사들은 리서치 자료 유료 판매를 관련 부수업무로 등록했다. 지난해에도 메리츠종금증권, KB증권, 삼성증권 등이 부수업무 등록을 마쳤다. 언제든 유료화를 시행할 수 있다. 문제는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것인가다. 지난해 몇몇 증권사가 해당 회사 계좌를 갖고 있는 고객이 자사 홈페이지에 들어와서 리서치 자료를 볼 수 있도록 바꿨다. 외부 언론사 등에는 제목, 요약본만 제공하는 방식이다.
유럽연합(EU)이 지난해 1월 시행한 '미피드(MiFID)II'를 국내 금융투자업계가 참고할 수 있다. 미피드II란 금융시장의 안정성, 투명성 강화 및 소비자 보호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금융규제안이다. 이 안에 리서치 서비스 관련 규정이 들어 있다. 이전에는 거래 수수료에 리서치 서비스 요금이 관행처럼 포함돼 있었지만 미피드II는 리서치 서비스 이용료를 분리해 직접 지불하도록 규정했다. 이 규정은 유럽계 증권사들에 적용된다. 국내 증권사의 유럽 법인이나 지점이 현지에서 영업하면 적용받을 수 있다.
한 증권사 리서치센터장은 "주문을 줄 수 없는 기관투자자가 리서치 자료와 세미나를 요구하더라도 애널리스트는 따를 수밖에 없는 게 현재 상황"이라며 "양질의 투자 아이디어와 분석자료를 원하면 정당한 대가가 보장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일각에서는 독립 리서치 법인이 활성화돼야 한다는 의견도 내놓는다. 증권사나 기관투자자의 눈치를 보지 않고 매도 의견을 자신 있게 낼 수 있으려면 '유료' 서비스라는 존립 기반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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