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핌] 이영란 편집위원= 이 젊은 작가는 잠자리 날개처럼 얇고 하늘하늘한 란제리(lingerie)로 작업한다. 여성용 속옷인 란제리의 레이스 부분을 미세하게 잘라 나무와 산을 표현하고, 망사 부분으로는 강과 호수를 표현한다. 실크 천(견직물)을 입힌 평면 위에 란제리의 선과 면들을 끝없이 중첩시키다 보면 어느 순간 동양의 산수화가 나타난다. 한마디로 ‘란제리 콜라주’요. ‘레이스 산수화’다. 조금 멀리 떨어져 보면 영락없이 붓으로 그린 수묵산수다. 그런데 가까이 다가가면 비로소 패브릭 콜라주인 것을 알 수 있다. 감상자의 입에서 “붓질 하나 없이 100% 란제리만으로 이렇게 풍경화를 만들다니 참 신기하다”는 탄성이 터져나온다.
이같은 이색실험을 펼치는 작가는 성균관대 미술학과와 대학원에서 동양화를 전공한 김용원(1990~)이다. 김용원은 동양화의 오랜 전통인 붓과 먹 대신, 섬유 소재인 레이스로 그림을 그린(?)다. 대학 4학년 때부터 란제리와 레이스를 콜라주해 자연풍경을 표현했으니 올해로 7년 째다. 섬유예술 전공생이 아닌 동양화 전공자의 독특한 도전이란 점에서 이채롭다.
김용원의 연필스케치, ‘Drawing5 皇居’. pencil on paper, 2018. [사진=갤러리 도스] |
전공이 말해주듯 그의 작업은 어디까지나 동양화에 뿌리를 대고 있다. 중국 은나라, 고구려 백제시대부터 비롯돼 이천 년에 가까운 동양의 전통산수에 대한 이해와 학습이 뼈대인 셈이다. 먹과 물감이 있어야 할 자리에 각양각색의 란제리 조각들이 어우러진 것만 다를 뿐, 자연의 아름다움을 산수화(山水畵)로 그려낸다는 근본은 마찬가지다. 레이스 조각을 던져주면 누구나 할 수 있을 듯하지만 산수화에 대한 기본이 없다면 구현하기 어려운 작업이다.
물론 김용원에게도 얇은 레이스와 망사로 화폭에 산수를 표현하는 것은 더없이 까다롭고, 지난한 일이다. 일필휘지로 산과 들을, 강과 나무를 쓰윽쓰윽 그려나가면 훨씬 수월할 텐데 그는 일부러 복잡하고 힘든 길을 택했다. 레이스 산수화 대작(大作)을 완성하려면 수개월은 족히 걸린다. 눈이 빠질 정도로 집중, 또 집중해야 하는 예민한 작업이다.
김용원은 “사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붓과 먹은 매우 친근한 대상이었다. 할머니께서 서예를 하셨기 때문에 늘 붓을 갖고 놀았다. 대학도 동양화 전공을 택했다. 그런데 졸업반이 되니 재료에 대해 고민하게 됐다. 과거의 관념적 회화가 아닌, ‘오늘 이 시대의 회화’를 하려면 뭔가 새로운 매체가 필요했다. 학교(명륜동)에서 집을 오가며 동대문, 청계천, 을지로를 헤매듯 누볐는데 어느날 ‘레이스를 커팅해 내가 원하는 형상을 드러내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김용원의 입체작품 ‘The recording of inner-side 皇居東御苑-竹林’, lingerie collage on silk, LED light_box. 2018. [사진=갤러리 도스] |
그렇게 빠져든 작업이 레이스 산수였다. 수많은 시행착오와 인내의 시간을 거쳐 김용원은 이제 란제리로 산과 나무, 수면에 비친 그림자까지 자유자재로 표현할 수 있게 됐다. 먹에 농담이 있듯 그의 레이스 산수에도 농담이 부드럽게 살아나고, 자연의 정취와 계절의 변화 또한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근래에는 여러 겹의 레이어를 만들어 대자연의 오묘한 세계를 더 깊이있고 입체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회화에 LED 라이트박스에 투영시켜 환상적인 분위기를 더하거나, 병풍처럼 작품 여러 점을 연결해 실내에서 자연을 만끽할 수 있도록 했다.
김용원이 창안한 ‘레이스 산수’는 국내 보다는 해외에서 더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아직 서른도 되지않은 젊은 작가이지만 대만, 스페인, 일본의 문화기관이 운영하는 아트 레지던시에 네 차례나 선발돼 연달아 참여했다. 상하이, 도쿄, 타이페이 등지에서 개인전과 기획전도 가졌다. 뿐만 아니라 국내외 미술관과 갤러리, 아트페어로부터도 러브콜이 이어지고 있다. 대만, 홍콩, 중국에는 그의 작품을 수집하는 컬렉터층도 생겨났다. 이는 지극히 서양적인 재료인 레이스로, 동양 전통회화의 핵심인 산수(山水)를 독특하게 표현하기 때문이다. 실뜨개질을 바탕으로 입체작품을 만드는 포르투갈 작가 조안나 바스콘셀로스, 청바지로 부산풍경을 표현하는 최소영 작가 등이 있지만 레이스로 동양의 전통산수를 표현한 예는 유례가 없어 관심을 모으는 것.
김용원은 “쉽지 않은 길을 택해 밤낮없이 레이스로 산수실험을 한 결과 해외로부터 전시및 레지던시 참여제의를 계속 받고 있다”며 “란제리는 오랫동안 여성을 억압했던 상징이자, 여성 스스로 여성성을 강조하는 장식도구이기도 하다. 여성작가로서 란제리가 지닌 이같은 중의적 요소를 바탕으로, 이를 자유롭게 해체 조합해 지금까지 없던 회화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게 내 작업의 요체다. 하지만 페미니즘 예술로 국한되는 건 원치 않는다. 새로운 예술실험으로 봐달라”고 했다.
김용원의 레이스산수 ‘The recording of inner-side 皇居東御苑 竹林’. lingerie collage on silk. [사진=갤러리 도스] |
김용원은 지난 2014년 서울 강남의 갤러리엘르에서 첫 개인전을 연 이래 매년 개인전을 열어왔다. 2016년에는 중국 상하이에서, 2017년에는 대만에서 개인전을 개최했다. 그리고 지난 13일 다섯번째 개인전을 종로구 삼청로의 갤러리도스(본관)에서 개막했다. ‘기심산수(記心山水)’라는 제목으로 열리는 이번 개인전에는 지난해 10월부터 12월까지 일본 도쿄의 아트치요다 레지던시에 체류하며 작업한 레이스회화와 드로잉 연작 등 신작들이 출품됐다. 일종의 귀국보고전이기도 한 셈이다.
전시에는 비단 위에 레이스로 자연 풍경을 표현한 작가 특유의 콜라주 산수 10여점이 출품됐다. 김용원의 레이스 산수화는 색다른 시각적 차별점을 드러낸다. 천년 넘게 이어져온 동양의 수묵산수에서 탈피해, 지극히 현대적이자 ‘뜻밖의 재료’인 서양의 패브릭으로 구현한 산수는 섬세하면서도 매우 독특하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자연친화적인 동양사상을 여전히 작업의 근간으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대자연 속에서 은인자중하며 이상향을 그리던 선대의 염원을 작가는 오늘의 조형언어로 그려내고 있는 것. 이번에 김용원은 산수를 재해석하던 그간의 작업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자신의 내면에 기억된 풍경을 풀어냈다. 이에 산의 절경과 연못에 비친 산수는 더욱 차분하고, 고즈넉해졌다. 어떠한 외부적 요소도 개입되지 않은채 스스로의 시선에 집중했기 때문이다.
전시에는 도쿄의 우에노궁을 비롯해 여러 전통정원에서 현장사생한 드로잉도 출품됐다. 도쿄에 체류하는 내내 김용원은 일본의 전통정원과 공원 25곳을 매일 한 곳씩 찾아 현장에서 스케치작업을 펼쳤다. 작가는 “이제는 문화재로 지정된 옛 정원과 공원이 도쿄 시민들에게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지 느꼈다”며 “과거 ‘산수’라는 개념이 선비들의 이상향이었다면 21세기에는 대중들이 정서적으로 행복감을 느끼는 일종의 유포리아(euphoria)로 전환됐다”고 했다. 이에 드로잉 연작들은 탄탄한 데생역량과 표현력을 기반으로 힐링의 장소들이 아름답게 그려졌다. 먹, 콩테, 수채, 연필 등을 활용한 스케치는 저마다의 특징이 드러나 비교 감상해보는 묘미도 각별하다.
특기할 점은 ‘The Memory of Inner-mind’라는 타이틀로 공간 설치작업을 시도했다는 점이다. 전시장 한 켠에 한지로 바른 창호들을 설치한 뒤, 세 벽면에 자신의 산수화를 촬영한 흑백영상을 투사하고 있다. 마치 누군가의 한옥의 열린 창문으로 바깥의 자연풍경이 유유히 흐르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찰랑거리는 수면 위로 도쿄에서 채집한 바람소리 새소리가 곁들여져 관람객들은 도심 화랑에서 자연을 즐기는 색다른 예술체험을 하게 된다. 설치작업 옆에는 흑백영상 속 레이스산수 원본이 함께 전시돼 차경(借耕)과 오리지날 작품이 한자리에서 교차하고 있다. 그 결과 현실과 비현실, 과거와 현재, 서울과 도쿄라는 경계를 뛰어넘는 이색적인 미디어아트가 됐다. 김용원의 ‘기심산수’전은 오는 19일까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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