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에는 더 큰 핵으로"...북한에 대한 추가 제재도 언급
[서울=뉴스핌] 이석중 에디터 = 순탄할 것 같았던 역사적인 첫 북미 정상회담이 좌초위기를 맞았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의 정상회담을 불과 19일 앞둔 지난 24일 “지금 회담을 하기는 적절치 않다”는 내용의 공개서한을 통해 취소한 것이다.
이날은 북한이 세계 각국 언론을 초청한 가운데 풍계리 핵실험장을 폐기한 날이면서, 미국이 중국의 남중국해에서 지속적인 군사기지화를 이유로 다음달 열리는 환태평양훈련(림팩)의 중국에 대한 참가 초청을 취소한 날이다. 문재인 대통령과의 한미 정상회담을 가진 바로 다음날이기도 하다.
상징적인 여러 날들과 얽혀있다는 점에서 즉흥적인 결정은 아닌 듯 하다.
김계관 북한 외무성 제1 부상이 25일 "우리는 아무 때나, 어떤 방식으로든 마주앉아 문제를 풀어나갈 용의가 있음을 미국 측에 다시금 밝힌다"며 트럼프의 회담 취소의사의 번복을 촉구했으나 당초 일정대로 열릴 것 같지는 않다.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위원장의 생각이 바뀌면 연락하라고 함으로써 판을 완전히 깨지는 않겠지만, 판을 바꾸겠다는 의도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 트럼프의 노림수는 무엇일가?
트럼프의 돌발적인(?) 북미 정상회담 취소에 대해 각국 언론들은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한 막판 힘겨루기’ 또는 ‘최선희와 김계관 외무성 부상 등 북측 인사들의 트럼프 참모진들에 대한 공격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트럼프 대통령이 공개서한에서 ‘극도의 분노와 공개적 적대감’을 회담 취소의 이유로 들었기 때문이다.
최선희 부상은 24일 담화를 통해 펜스 부통령에 대해 '아둔한 얼뜨기'라고 비난하는 한편, "우리도 미국이 지금까지 체험해 보지 못했고 상상도 하지 못한 끔찍한 비극을 맛보게 할 수 있다"고 위협했다.
김계관 부상도 "일방적인 핵 포기만을 강요하려 든다면 다가오는 조미(북미) 수뇌회담에 응하겠는 가를 재고려할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미국을 압박했다.
백악관 관계자는 지난주로 예정됐던 싱가폴 실무회담에 북측 인사가 나타나지 않음으로써 신뢰의 문제가 생겼다고도 했다.
‘세계 경찰’, ‘1등 국가’로 자부하는 미국과 트럼프가 전세계가 주목하는 싱가폴 정상회담을 단지 이런 이유로 판을 깼다는 비난을 받으면서 까지 취소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새로운 판을 짜고 싶은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 입장에서는 오랜 시간 북한에 대한 지속적이고 단계적인 경제 제재를 통해 대화의 장으로 끌고 나왔는데, 최근 중국과 한국이 개입하면서 판 자체가 변하고 있다고 느꼈을 법 하다.
북한이 ‘핵 대 핵’을 말하자 트럼프는 ‘더 큰핵’을 언급하면서 북한의 기를 꺾었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은 상원 외교위원회 청문회에서 "‘압박 캠페인’이라고 부르는 대북제재를 우리는 멈추지 않았다고 느낀다“면서 "추가 제재가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강조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겠다는 의미다.
◆ 트럼프는 ‘내가 만든 판, 내가 룰메이커’라고 생각하는 것인가
트럼프는 혹시라도 1945년 9월 2일 도쿄만 요코하마 앞바다에 정박한 미 전함 미주리 함상에서 벌어졌던 일본과의 항복문서 서명장면을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이에 앞서 8월 15일 히로히토 일본 천황의 사실상 항복선언도 떠올렸을 법도 하다.
그런데 핵의 완전 포기를 내세워 회담을 갖자고 제안했던 북한이 새로운 요구사항을 내놓으니 회담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북미 정상회담의 출발점이 압박을 견디지 못한 북한이 대화의 장으로 나섰다는 점을 세계가 간과함으로써 판세를 잘못 읽었을 수도 있다. 싱가폴 회담이 미국과 북한이 대등한 입장에서 갖는 정상회담이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쉽게 이해된다.
그런데도 김 위원장이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시진핑 중국 주석을 만났고, 이후 북한의 태도가 강경해 졌다. 트럼프 대통령이 중국의 북한 배후설을 잇따라 언급한 것도 북한의 비핵화가 실천되기도 전에 제재가 풀릴 경우 북한의 비핵화는 물 건너 간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남한의 태도도 마땅치 않았을 수 있다. 북미 회담도 하기 전에 종전협정과 평화협정을 언급하고 온갖 경제협력방안들이 나오는 것도 북한의 태도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봤을 것이다.
트럼프는 이번 협상의 당사자는 미국과 북한이고, 남한과 중국은 조언자가 아니라 관전자로만 남기를 바라는 것은 아닐까?
그래야 기대했던 CVID(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를 달성할 수 있다고 믿었을 것이다.
더욱이 전문가들 없이 언론을 초청한 가운데 열린 풍계리 핵실험장 폐기도 믿을 수 없다는 지적이 여러 차례 나왔던 터다. 핵실험의 흔적을 없앰으로써 자신의 핵무기 개발에 대한 수준을 드러내지 않겠다는 의도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김정은과 북한의 선택지는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다. 갈수록 강화될 경제 제재를 참아내거나, 완전한 비핵화 이후 체제보장을 약속받는 양자택일이 있다.
혹시라도 중국과 러시아에 기대어 버티는 방법을 찾아보거나, 남한을 이용해 반전의 기회를 잡을 수도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너무 위험하다. 미국의 힘이 너무 강하다.
julyn11@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