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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환의 예술가 이야기] 장인과의 소송 끝에 쟁취한 사랑, 로베르트 슈만 vs 클라라 슈만

기사입력 : 2017년11월10일 12:00

최종수정 : 2017년11월10일 12:00

예술에 살고 사랑에 살고(17)

슈만의 대표작중의 하나인 《시인의 사랑》은 모두 16개의 곡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각 곡은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내용적으로나 음악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제1곡부터 제6곡까지는 사랑의 기쁨을 노래하고 있으며, 제7곡부터 제14곡까지는 실연의 아픔을, 마지막 제15곡과 16곡에서는 지나간 청춘의 향수와 실패한 사랑에 대한 쓰라린 심정을 노래한다.

제1곡 〈아름다운 5월에 (Im wunderschonen Monat Mai)〉는 짤막하고 아름다운 서주로 시작되며 매우 사랑스럽고 서정적이다
“아름다운 오월에 꽃봉오리들이 모두 피어날 때
나의 마음속에도 사랑의 꽃이 피어났네
아름다운 오월에 새들이 모두 노래할 때
나도 그 사람에게 고백했네 초조한 마음과 소원을”

그리고 제7곡 〈나는 슬퍼하지 않으리(Ich grolle nicht)〉는 《시인의 사랑》의 중추적인 곡이다. 시인이 노랫말처럼 이제 자신의 사랑은 더 이상 희망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노래하고 있다. 
“나는 울지 않으리 이 가슴이 부풀어 터지더라도
영원히 잃어버린 사랑이여
나는 울지 않으리 그대가 다이아몬드의 빛으로 꾸밀지라도
그대 심중의 어둠을 비쳐줄 빛은 없으리”

낭만주의 음악가의 한사람으로 주옥같은 피아노곡들과 수많은 가곡을 남긴 로베르트 알렉산더 슈만(Robert Alexander Schumann, 1810~1856). 그는 1810년 6월 8일에 독일 작센지방의 츠비카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서적 출판을 하는 한편 문필에도 종사한 문화인이었고, 어머니는 야무진 성격의 사람이었다. 슈만은 7세 때 교회의 오르간 주자로부터 기초 교육을 받은 이후 스스로 작곡하는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 또 부친의 책방에서 음악 서적을 읽었고, 바이런과 리히터 등 문인들 작품과 칸트의 철학을 연구하면서 교양을 쌓았다.
슈만의 어머니는 음악의 길로 나아가는 아들을 불안하게 여겼다. 16세 때 아버지가 타계하자, 어머니의 권유로 라이프치히 대학에 들어간 슈만은 법률을 배우게 된다. 그러나 거기서도 역시 피아노를 치는 데 열중했다. 놀란 모친은 그를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하이델베르크 대학으로 전학시킴으로써 그의 음악에 대한 열정을 막아 보려 했다.
그런데도 슈만은 여전히 피아노를 배우며 한층 더 음악에 힘썼다. 결국 어머니는 아들이 음악의 길로 나아가는 것을 허락했다. 이후 슈만은 라이프치히로 돌아와 당대의 저명한 피아노 선생 프리드리히 비크의 문하로 들어가서, 밤낮없이 피아노 연주에 몰입했다. 그러나 지나치게 무리한 탓이었는지 손가락을 다치게 된다. 더 이상 연주자로서의 꿈을 이어갈 수 없게 된 그가 절망 속에서 찾아낸 길은 연주가가 되는 대신 작곡· 지휘· 평론가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오히려 그것이 슈만의 이름을 높이는 길이 되었다.

음악가로서 슈만의 특징이 잘 나타나고 있는 것은 교향곡과 같은 대곡이 아닌 피아노곡과 가곡이다. 특히 슈베르트를 존경한 그는 슈베르트를 능가하는 가곡을 세상에 발표하였다. 슈만의 피아노곡과 가곡에서는 그의 음악세계가 추구하는 서정성과 환상성이 음악과 적절히 조화되고 있다. 이 작품들은 전기 낭만주의 시대는 물론이고 독일 정신을 매우 잘 표현한 최고의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슈만은 독일 낭만주의 시대를 꽃피운 걸출한 작곡가중 한 사람으로 손꼽히고 있다.
그는 문학적 소양 또한 깊어서1834년에는 《음악신보(Neue Zeitschrift für Müsik)》를 발행하여 많은 음악평론을 발표했다. 이를 통해 슈베르트 · 쇼팽 · 브람스 등의 대음악가들을 세상무대에 소개하였다.

슈만과 클라라 부부의 초상화 <사진=이철환>

슈만과 그의 부인 클라라의 사랑은 한 편의 드라마이다. 그들의 사랑은 갖은 우여곡절을 거친 뒤 마침내 결실을 거두게 된다. 1836년 슈만은 자신의 은사인 비크의 딸이자 유명한 여류 피아니스트인 클라라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당시 클라라의 나이는 18세, 슈만은 그보다 9살 위였다. 그런데 클라라의 아버지 비크는 이들의 결혼을 허락하지 않았다. 클라라 아버지 비크의 입장에서는 애지중지하는 자랑스러운 딸의 상대로 슈만이 성에 차지 않았던 것이다.
사실 당시 클라라의 명성은 대단했다. 그녀는 아홉 살이던 1828년 라이프치히의 게반트하우스에서 공식 연주회를 가졌고, 이후 국외 연주회만도 38회에 이르는 등 손꼽히는 피아니스트였다. 당대의 문호 괴테, 바이올린의 거장 파가니니, 작곡가 멘델스존, 피아노의 귀재 리스트 등 많은 예술가들이 클라라의 피아노 연주를 극찬했다. 또 여러 귀족들로부터 후원도 받고 있었다. 이런 딸이 피아니스트로서는 더 이상 가망이 없고 작곡가로는 무명이나 다름없는 슈만과 결혼하겠다고 하니 아버지 입장에서는 극렬한 반대를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래도 슈만과 클라라 두 사람은 자식으로서의 본분을 다하며 3년여에 걸쳐 그들의 결혼을 간청했지만 허사였다. 결국 슈만과 클라라는 법에 호소하기로 하고 장인인 비크를 상대로 라이프치히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1840년 9월, 슈만과 클라라는 마침내 법정으로부터 허가를 받아내게 된다. 그해 9월 12일 클라라가 21세가 되기 전날을 기해 두 사람은 교회에서 조촐한 식을 올린 뒤 결혼생활에 들어갔다.

분명 결혼 당시에는 클라라가 좀 더 재능이 뛰어나고 장래가 촉망되던 존재였다. 그러나 이 결혼은 당대의 두 재능이 결합됨으로써 후일 음악사에 대단한 업적을 남기게 된다. 슈만은 결혼을 하면서 심리적인 안정을 얻게 되었고 이로 인해 왕성한 창작활동을 해 나갈 수 있게 된다. 결혼 이후 거의 모든 부문에 걸친 작곡활동을 펼쳐 나갔다.
결혼생활이 한창 무르익어가던 1843년 슈만은 라이프치히 음악원에서 교편을 잡게 된다. 그렇지만 불행히도 이때부터 정신착란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점차 병세가 악화되자 드레스덴에 정주하여 개인교수와 창작활동에 전념하게 되었다.
이후 1850년, 슈만 부부는 드레스덴을 떠나 뒤셀도르프로 가게 되었고, 거기서 시립 오케스트라의 상임 지휘자가 되었다. 그로 인해 경제적 면에서 다소 여유가 생기게 된다. 널찍한 주택이 생겨 클라라는 자신만의 독방을 가지게 되었고, 결혼 후 처음으로 거리낌 없이 마음껏 피아노 연습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또 객실로 쓰던 큰 방에서는 이따금 음악가들을 초대하여 하우스 콘서트를 열었다.
그렇지만 행복도 잠깐, 얼마 후 불행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슈만은 드레스덴 시절부터 이미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뒤셀도르프에 온 뒤부터는 관현악단과의 사이가 좋지 않아 갈등을 겪으면서 증상이 악화되었다. 이런 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슈만은 정신이상현상을 보이게 된다.
1854년 2월 27일, 그는 가족들 모르게 집을 나와 라인강 다리 위에서 강에 몸을 던졌다. 요행히 뱃사람이 구해서 집으로 데려다 주었다. 그때 슈만은 자신이 한 짓에 대해 변명도 하지 않은 채 방에 들어가 작품 활동을 계속했다고 한다. 그 뒤 본 시가지 교외에 있는 한 정신병원에서 약 2년 반 동안 요양에 힘썼다. 그러나 병세는 호전되지 않았고 마침내 그는 자신의 병실에서 1856년 7월 29일, 4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 병동은 예정되었던 철거를 면하여 지금은 슈만 박물관이 되어 있다.

슈만은 오랫동안 우울증을 앓아왔고 나중에는 정신이상증세를 보였는데, 이러한 그의 정신병 증세는 집안내력과 무관치 않다. 출판업자였던 슈만의 아버지는 오래도록 신경쇠약을 앓다가 1826년 세상을 떠났다. 같은 해 슈만의 손위 누이인 에밀리에도 자살했다. 슈만이 열여섯 살 되던 때의 일이었다.
슈만 또한 스물세 살이던 1833년부터 정신병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 무렵 슈만은 손가락 부상으로 피아니스트의 꿈을 접어야 했으며, 또 좋아했던 큰형 율리우스와 형수의 죽음 등 불행이 겹쳤다. 그런 가운데서도 그는 음악평론가로서의 삶을 계획하면서 음악잡지 〈음악신보〉의 창간을 한창 준비하고 있었다.
음악평론가 슈만은 두 개의 필명(筆名)을 사용했다. 하나는 ‘오이제비우스’ (Eusebius)였고, 또 다른 하나는 ‘플로레스탄’(Florestan)이었다. 그런데 오이제비우스는 명상적이고 우울한 인물을 뜻하며, 플로레스탄은 열정이 넘치는 사람을 뜻한다. 이 두 개의 상반된 캐릭터를 자신의 필명으로 사용했던 것이다. 한 마디로 슈만은 극단적인 조울증 환자였다는 것이다. 이 상반된 캐릭터는 그가 작곡한 피아노곡 《사육제 Op.9》에도 등장한다. 이는 모두 21곡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제5곡이 ‘오이제비우스’, 제6곡이 ‘플로레스탄’이다.

거의 한평생을 정신질환에 시달렸던 슈만에게도 꿈처럼 달콤했던 시절이 있었다. 5년간의 열애 끝에 연인 클라라와 결혼했을 때였다. 이 해 한 해 동안에만 자그마치 133개의 가곡을 작곡해내었다. 사랑의 힘이었다고나 할까! 그래서 슈만의 생애에서 1840년을 이른바 ‘가곡의 해’라고 부른다.
이 많은 가곡들 중에서도 《시인의 사랑(Dichterliebe)》은 백미다. 이 작품은 슈만이 1840년 여름에 완성한 가곡집으로, 독일 낭만파 시인 하이네의 시집 〈서정적 간주곡〉에 수록되어 있는 66편의 시 가운데 16편을 골라 가곡집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많은 성악가들이 이 《시인의 사랑》을 불렀지만, 그중에서도 바리톤 피셔 디스카우의 노래가 특히 유명하다.
하이네는 백만장자 은행가의 딸인 사촌 여동생 아말리에를 깊이 사랑했다. 그러나 속물근성을 지닌 그녀로부터 냉담하게 거절당하는 비참하고 쓰라린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사랑을 향한 애절한 심정이 이 시에 잘 나타나 있다. 따라서 슈만이 하이네의 시에서 맛보는 사랑에 대한 공감은 아주 각별했을 것이다. 슈만은 우여곡절이 많았던 클라라와의 5년에 걸친 사랑의 열정과, 그 귀중한 사랑이 결혼이라는 선물로 연결된 것에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이 작품에 매달렸다. 그리하여 음악사에 길이 남는 명작을 남기게 된 것이다.

슈만의 음악과 인생에 부인 클라라와 함께 커다란 영향을 끼친 인물은 다름 아닌 요하네스 브람스이다. 브람스가 슈만 부부를 처음 만난 것은 1853년 9월 30일, 그의 나이 스무 살 때였다. 그는 당시 거의 무명에 가까운 신인 피아니스트로서, 친구 요하임의 간곡한 권유에 따라 뒤셀도르프에 있던 슈만의 집을 방문했다.
브람스가 슈만을 방문하기 이전의 일로, 한번은 브람스가 함부르크에서 연주회를 가지고 나서 슈만에게 그의 작품을 보낸 적이 있었다. 그러나 슈만은 그의 작품을 개봉도 않은 채 반송했다. 브람스는 그로 인해 깊은 상처를 받아 더 이상 슈만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후 브람스는 슈만의 작품을 면밀히 연구해 본 결과 완전히 매료되어 버린다. 그래서 그는 다시 용기를 내어 슈만을 방문하게 되었던 것이다.
브람스의 피아노 연주와 그의 작품을 들어본 슈만 부부는 브람스의 음악성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브람스의 천재성을 단번에 알아본 슈만은 〈새로운 길〉이라는 에세이에서 ‘시대의 정신에 최고의 표현을 부여한 사람’이라고 그를 격찬했다. 브람스 역시 이들 부부에 대한 깊은 존경과 친밀감이 더해 갔음은 물론이다. 이후 그들 간의 관계는 갈수록 친밀해져 갔다.

이처럼 브람스에게 있어 슈만은 음악적 스승이자 인생의 중요한 길잡이였다. 그러나 클라라라는 존재는 브람스에게 있어 연모하는 ‘여인’이었다. 브람스는 클라라에 대한 연모의 감정을 지닌 채로 다른 여인들과는 이렇다 할 로맨스 없이 한평생을 독신으로 지냈다. 사실 브람스는 슈만이 살아있을 동안 내내 자신이 연모하는 여인 클라라와, 은인이요 스승인 슈만의 부인인 클라라 사이에서 끝없는 고민과 갈등을 겪고 있었다.
그러나 브람스는 심지가 굳고 경건한 사람이었다. 결국 사랑의 감정을 억제하며 우정과 존경의 마음으로 대체함으로써 세 사람의 관계를 원만히 이루어나가기로 했다. 브람스는 그렇게 자신의 감정을 억누른 채 창작에 열정을 쏟아 나갔다. 그러던 중 브람스는 1853년 슈만이 라인강에 투신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브람스는 즉시 클라라에게로 달려갔다. 브람스는 깊은 상처를 받고 힘들어하는 클라라를 최선을 다해 위로하고 도왔다.
이후 브람스는 클라라가 여생을 평안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곁에서 혼신의 힘을 기울이게 된다. 이처럼 클라라의 슬픔을 달래고 공감을 나누는 동안 그녀에 대한 사랑의 감정은 한층 더 깊어갔다. 마침내 브람스는 그녀를 향한 마음을 감추고는 더 이상 도저히 살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클라라가 자신보다 14살 연상이라는 사실도 브람스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브람스는 종종 편지로 그의 끓어오르는 사랑의 감정을 직설적으로 고백하기도 했다. 그러나 클라라의 답장에는 항상 매정하게도 자신은 슈만의 아내라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내용만이 담겨져 있었다. 즉 남편 슈만이 사망한 이후 클라라 자신이 살아가는 의미란 오직 남겨진 7명의 아이들 양육과 슈만의 작품을 세상에 알리는 것이라고 답했다.

결국 브람스와 클라라 두 사람은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서로를 위로하고 도우면서 각자 예술가로서의 창작에 몰두했다. 오히려 브람스는 그 이후 한층 더 심오한 대작들을 쏟아내게 된다. 불타는 정열을 예술적 영감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클라라를 처음 만난 20살부터 64살로 타계하기까지 늘 브람스의 마음속에 있었던 존재는 클라라였다. 브람스는 클라라를 향한 연모의 열정을 모두 음악 창작에 쏟았던 것이다.
1896년 5월 20일 클라라가 77세의 나이로 타계했을 때 브람스는 “나의 삶의 가장 아름다운 체험이요 가장 위대한 자산이며 가장 고귀한 의미를 상실했다.”고 그녀의 죽음을 애도했다. 이듬해 1897년 4월 3일 대작곡가 브람스는 64세를 일기로 클라라의 뒤를 따라갔다.

이철환 객원 편집위원 mofelee@hanmail.net (전 재정경제부 금융정보분석원장, 전 한국거래소 시장감시위원장. 문화와 경제의 행복한 만남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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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싣는 순서] 트럼프 100일의 승부1. 규제 대못 뺀다…AI·자율주행·은행업 '더 쉽고 빠르게'2. 압도적 격차를 향한 전격전...MAGA 휘날리며3. 우크라 전쟁 100일 만에 끝내고 북미 대화 실마리4. 에너지 패권을 향해 '드릴, 베이비 드릴'5. 만능 치트키 관세...역대급 중국 압박6. 뉴욕증시 지진계 '경고음 요란'...2018년의 기억7. 증시 불확실성 MAGA 수혜주로 돌파..끝판왕은8. 관세와 달러, 복잡한 함수 관계9. 높아지는 미국의 만리장성...反이민 장애물도 산적 현재 뉴욕증시 여건과 시장이 직면한 위험은 당시와 닮았다. 시장에서 2018년을 반추하며 올해 뉴욕증시도 유사한 길을 걷지 않을까 하는 우려섞인 관측이 대두하는 이유다.특히 2018년 급락장에 앞서 출현한 충격파의 전조가 이번에도 포착되고 있다. 그 지진계의 수치가 이례적인 수준으로 치솟아 불안감은 더 크다. 바로 '블랙스완지수'로 불리는 시카고옵션거래소(Cboe)의 스큐지수다. 1. 3주 전 신호 스큐지수는 S&P500의 극단적인 하락 가능성에 대한 옵션시장의 우려를 보여주는 지표다. 개략적으로 말하면 주가 폭락에 대비한 풋옵션 수요가 높을수록 그 값은 올라간다. 주가가 크게 하락하는 시나리오에서만 가치가 있는, 그래서 당장은 가치가 없어 싼값에 거래되는, 즉 '외가격 풋옵션'이 높은 가격에 사들여진 결과다. 외가격 중에서도 가치의 무의미함이 큰 풋옵션 수요가 클수록 상승한다. 평소에는 헐값에 팔렸던 우산이 폭풍우가 예상되자 비싸져도 수요가 생기는 현상과 비슷한 셈이다. *스큐지수는 단순히 OTM 풋옵션뿐 아니라 OTM 콜옵션도 산출 대상에 포함된다. 구체적으로는 양자의 프리미엄 시세를 역산해 산출한 내재변동성이라는 개념을 통해서다. 다만 실제 산출 과정에서는 OTM 풋옵션의 내재변동성의 비중이 더 크다. 급격한 시세 변동을 염두에 둔 헤지 상품의 수요는 가파른 가격 상승을 기대한 콜옵션보다 가파른 하락에 대비하려는 풋옵션에 집중되기 떄문이다. 따라서 산출 과정에서 자연스레 OTM 풋옵션의 내재변동성이 더 큰 영향을 미친다.   통상 스큐지수는 100~135 사이에서 변동한다. 135를 넘어서게 되면 옵션시장 참가자들이 급격한 하락 가능성에 대해 종전보다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는 얘기가 되고 150이 넘어가면 극단적인 하락 가능성을 매우 심각하게 보고 있다는 뜻이다. 현재 스큐지수는 154다. 지금부터 3주 전인 지난달 24일에는 180으로 솟구쳤다. 두 달 전부터 수위를 높이더니 급기야 180이라는 새로운 기록을 썼다. 지금은 이때보다 낮아졌지만 추세의 층위는 과거보다 훨씬 높은 곳에서 형성돼 있다. 옵션시장 참가자들이 들어 올린 '가드'의 높이가 한층 더 올라갔다는 얘기다. 스큐지수의 수치에 내재된 '극단적인 폭락' 가능성은 대략 30일 내 실현을 상정한다. 스큐지수를 산출하는 데 사용되는 옵션의 잔존만기 대부분이 30일 안팎이기 때문이다. 예로 잔존만기가 20일인 근월물과 48일인 차근월물이 있다면 관련 만기의 옵션에 내재된 변동성(옵션의 프리미엄 시세를 역산해 산출)을 소위 보간하는 방법을 통해 30일치를 구한다. 그렇다면 현재 옵션시장에서는 2월 중순 안에 폭락장이 올 것으로 보고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정말 그렇게 될까. 2. 2018년의 잔상 2018년 여름이 앞을 내다볼 수 있는 거울이 될지도 모른다. 2018년을 문두에 꺼낸 것은 당시와 현재 상황이 유사해서다. 2018년은 올해와 마찬가지로 전년도 주가 상승률이 19%가 넘어 주식시장이 활황을 보였던 해의 이듬해다. 트럼프의 법인세 감면이나 규제 완화책, 인프라 투자 확대책을 반영한 결과다. 트럼프의 고율관세 공약은 '엄포' 정도로만 생각했다. 이듬해 경제도 좋았다. 연방준비제도(연준)의 정책금리 인상과 시장금리 상승 우려가 부담됐지만 강한 경제가 버텨주리라는 믿음이 더 컸다. 전형적으로 '우선 먹고 배아픈 건 나중에 생각하자'는 식의 장세였다. 2018년 스큐지수는 꾸역꾸역 고도롤 높여갔다. 당해 3월 트럼프 행정부가 국가 안보상의 이유로 철강·알루미늄 수입품에 관세를 부과한 것을 시작으로 중국산 수입품에 대한 관세 수위를 끌어올리며 중국과 무역전쟁을 벌였다. 2018년 3월 하순 120이 채 안 됐던 스큐지수는 7월 150을 넘어서더니 8월 160에 육박하는 수준으로 올라섰다. 한 달 뒤 급격한 시세 하락을 예상한 스큐지수의 경고는 적중했다. 9월 2900선을 기록했던 S&P500은 11월 2600대까지 하락해 10% 떨어졌고, 그 뒤 하락세를 재개해 12월 2300선까지 추가 하락했다. 석 달 만에 20%가 무너졌다. *S&P500은 2018년 1~2월 당시 10% 떨어져 조정 국면에 진입한 적이 있다. 주가 하락의 발단은 고용통계 호조에 따른 장기금리 상승과 연준의 정책금리 인상 우려였다. 다만 그 떄 주가 하락은 빠른 시차를 두고 격렬하게 전개됐는데 그 배경에는 당시 시장에서 인기를 끌었던 변동성 하락 베팅 관련 상품(크레디트스위스의 VIX 선물 가격 역추종 상품<XIV>)가격이 붕괴해 시세 변동성을 증폭시킨 일이 있었다. 소위 '볼마게돈'으로 불리는 일이다. 공교롭게도 당시에도 스큐지수는 한 달 전 135를 넘어 시세 하락을 예고했었다. 3. 진짜 '오싹'할 떄는 스큐지수의 경보음이 격렬해지는 순간은 그 수치가 오히려 지금처럼 하락할 때다. 주가 하락이 시작하면 스큐지수 산출 대상에 있던 외가격 풋옵션 비중이 자연스레 작아져 스큐지수의 값은 하락한다. 흔히 '공포지수'로 알려진 VIX는 주가가 떨어져야 그제서야 반응한다. VIX는 주로 ATM(등가격) 부근 옵션의 프리미엄 시세를 바탕으로 산출되기 떄문에 이미 멀찍이 있던 외가격에서 경보음을 낸 스큐지수보다 한발 늦다. ATM 옵션은 현재 주가와 행사가격이 '거의 같은' 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당장 옵션시장의 주가 상승과 하락에 대한 '양방향 베팅' 상황을 보여준다. 스큐지수가 건물의 '화재감지기'라면 VIX는 화재가 난 뒤에 내부 온도를 보여주는 '온도계'와 같은 셈이다. '스큐지수의 하락→S&P500의 급락+VIX 급등'의 순서는 2018년 8월의 급락장에서도 동일하게 실현됐다. 최근 스큐지수가 최고치를 찍고 하락한 것은 주식시장이 이 패턴을 따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떠올리게 한다. VIX는 스큐지수가 최고치를 찍었던 지난달 24일 14를 기록했다가 현재 19.5로 올라선 상태다. 아직은 주식시장의 높은 변동성을 예고한다는 '20'을 넘어선 단계는 아니지만 방향성 자체가 위를 향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S&P500도 지난달 6일 사상 최고가에서 4% 떨어지는 등 상기의 연쇄 흐름에 동참한 모습이 역력하다. 물론 스큐지수가 과거의 폭락장이나 거친 시세 흐름을 항상 예견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연준의 정책금리 인하 지연 우려와 시장금리의 급등, 위안화 약세, 주식시장의 높은 밸류에이션, 조만간 출범하게 될 트럼프 2기 행정부에서의 관세 염려 등 주가 하락을 시사하는 퍼즐들이 짜맞춰지고 있다는 점에서 급격한 시세 변동 위험이 현실화될 개연성을 높인다. 특히 위안화 약세의 파급력은 2015년 갑작스러운 평가절하나 2018년 중반 급격한 약세, 2019년 '7위안 돌파' 등의 사례를 통해서 목도한 바 있다. 옵션시장의 우려가 단순한 기우가 아닐 수 있음을 뒷받침하는 재료들이다. 4. 실질금리의 중력장 1월 중순에 진입한 현재는 불안감이 들불처럼 번지기 쉬운 시기라는 점에서 스큐지수 경고에 담긴 의미를 배가시킨다. 과거 통계상 계절적으로 주식시장의 변동성이 확대되는 구간의 초입이다. 페퍼스톤에 따르면 2000년부터 2023년까지 VIX 추이를 월별로 평균해 연중 추이로 그려본 결과 1월 중순부터 3월 중순까지 상승세가 두드러진다. 연초에는 기관투자자가 새로운 투자 전략을 실행하거나 기존 포지션을 조정하고, 또 관련 기간에는 기업의 결산 보고가 맞물려 있어 시세가 각종 재료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경우가 많다. 모든 위험자산군의 시세를 주무르다시피하는 '실질금리'가 뜀박질을 재개한 점은 계절성의 현실화 가능성에 무게를 더한다. 미국 물가연동국채 10년물 금리로 본 실질금리는 지난달 초순 1.89%에서 중순 2.25%로 급히 올라섰다가 이달 초 숨고르기를 거친 뒤 최근 7일여만에 2.32%로 '레벨업'했다. 지난달 초순부터보자면 한 달 만에 43bp가 오른 셈이다. 통상 장기국채의 명목 금리가 오른다고 해도 대게 인플레 전망을 반영해 상승한 결과여서 실질금리 상승폭은 상쇄되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실질금리 변동성이 작은 편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한 달 만에 43bp라는 상승폭은 상당하다고 할 수 있다. 뱅크오브아메리카의 마이클 하트넷 전략가의 표현을 빌려쓰자면 최근의 금융시장 상황은 '터너(전환점)' 임박을 시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앞서 하트넷 전략가는 실질금리 2.5%를 주시해야 할 지점으로 꼽은 적이 있는데 2.5%에 도달하면 금융시장의 위험자산 회피 성향이 더 강해질 것으로 봤다. 2.5%는 2023년 10월 하순에 기록한 최근 10년 기준 전 고점에 해당한다. 당시 실질금리는 같은 해 7월 1.48%에서 2.5%까지 가파르게 상승하면서 같은 기간 S&P500의 시세를 10% 떨어뜨린 배경이 됐다. 하트넷 전략가에 따르면 현재 실질금리는 이미 지난달 중순부터 2%대로 올라섰음에도 불구하고 종전까지 주식시장의 시세가 어느 정도 방어가 됐던 것은 '강한 경제 펀더멘털이 실질금리 상승의 부정적 영향을 상쇄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종전의 고점을 넘어서는 새로운 영역으로 진입하면 내성 역할을 해왔던 투자자들의 믿음에 균열이 가해질 수 있다고 봤다. 스큐지수의 급등과 급락이라는 전조가 보여준 경고는 실질금리 2.5% 돌파와 함께 현실화될지도 모를 일이다. bernard0202@newspim.com 2025-01-13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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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샤오훙수 열풍에 고무된 중국매체 [베이징=뉴스핌] 조용성 특파원 = 이른바 미국의 '틱톡(TikTok) 난민'들이 대거 샤오훙수(小紅書)에 가입하는 현상이 지속되자 중국 매체들이 고무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미국의 제재로 인해 틱톡이 오는 19일부터 미국 내 서비스를 종료할 것이라는 보도가 나오면서, 미국 내 틱톡 유저들이 중국의 또 다른 SNS인 샤오훙수의 글로벌 버전 '레드노트(RedNote)' 앱을 다운로드해 신규회원으로 가입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데이터 조사기관인 센서타워의 조사에 따르면 1월 8일부터 14일까지 미국 내 사오훙수 앱 다운로드 건수는 전주에 비해 20배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중국 메이르징지신원(每日經濟新聞)이 17일 전했다. 전년 대비로는 30배 증가했다. 이달 들어 샤오훙수의 다운로드량 중 22%가 미국에서 이뤄졌다. 이 수치는 전년 동기에는 2%에 불과했다. 미국 내 틱톡 난민들이 샤오훙수로 대거 이동하면서 샤오훙수의 다운로드 수가 급격히 증가하고 있는 셈이다. 또한 중국은행보험보는 이날 샤오훙수 앱은 현재 미국, 캐나다, 호주, 영국, 이탈리아 등 87개 국가에서 다운로드 수 1위를 차지하고 있다고 전했다. 39개 국가에서도 10위 이내의 수위권에 분포하고 있다. 특히 14일과 15일 이틀 동안 신규 가입자가 70만 명을 넘어섰다. 이같은 소식에 중국 증시에서는 샤오훙수 관련주가 연일 급등하고 있다. 현재 샤오훙수는 글로벌 유저들을 위해 원클릭 번역 기능을 개선하고 있다. 샤오훙수 열풍이 이어지자 중국 매체들은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있다. 매체들은 미국이 2018년 이후 반중 정책 수위를 지속 높이고 있지만, 민간에서는 활발한 소통과 교류가 이뤄지고 있다며 높은 평가를 내리고 있다. 17일 환구시보는 논평기사에서 "미국의 많은 유저가 자신들을 틱톡 난민이라고 자칭하며 샤오훙수로 몰려들고 있고, 이는 뜻하지 않게 미중 양국 국민의 새로운 소통의 장으로 부상했다"고 평가했다. 이어 매체는 "미국 유저의 후기를 보면, 이들은 낯선 중국어 플랫폼에 접속하는 것에 대해 불안해했지만, 중국인의 친절한 응대에 놀라워했고, 중국인의 개방적인 태도에 경계를 풀게 됐다"며 "양국 네티즌의 교류 열기가 폭발적으로 높아졌고, 대화 주제는 다양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매체는 "미국의 정치인들은 지속적으로 중국을 비방해 오고 갖가지 부정적인 표현을 쏟아내고 있지만, 양국 국민 간에는 교류 협력을 심화하려는 의지가 강해지고 있다"고도 평가했다. 이어 "샤오훙수 현상이 미국의 대중국 정책을 수립할 때 좋은 참고가 되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중국의 SNS인 샤오훙수 자료사진 [사진=바이두 캡처] ys1744@newspim.com 2025-01-17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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