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중한 노동 시간…일·돌봄·여가 선순환 무너져
늘 시간에 쫓기는 직장인, 승진 누락하면 지옥행
[뉴스핌=황유미 기자] 시간 빈곤층 ‘타임푸어(Time Poor)’, 일하는 것 말고 어떤 것도 해볼 여유가 없는 사람들. 시간이 없어 가난한 사람들, 한국의 샐러리맨.
대기업 영업부에 근무하는 김혁진(가명·남·31)씨에게 '저녁 있는 삶'이라는 단어는 남의 나라 이야기다. 1주일에 2~3번 새벽 2시까지 근무하기 일쑤다. 집에 돌아오면 씻고 잠자리에 들기 바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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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을 하거나, 취미생활을 즐기는 직장인들도 있지만 김씨는 주변에서 그런 회사원들을 찾을 수 없다. 김씨의 경우, 큰 프로젝트라도 맡게 되면 퇴근마저 없다. 이럴 때는 근처 사우나에서 1시간 자고 다시 출근한다.
김씨는 "남들은 대기업 다닌다고 부러워하는데 저는 제가 일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아요"라며 "독서, 운동 등 자기계발은커녕 주말에는 잠자기 바쁘다"고 토로했다. 이어 "늘 시간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생활을 하는 것 같아요"라고 했다.
타임푸어, 시간 빈곤. 전 세계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하루 24시간은 똑같다. 우리는 일하고 자신을 돌보고 즐기며 소비한다. 노동과 돌봄, 여가, 이 세가지 시간의 균형이 맞을 때 삶의 만족도는 올라간다.
그러나 노동시간이 생활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돌봄·여가시간의 적정량이 채워지지 못해 시간의 균형이 깨졌을 때 우리는 '시간이 부족하다'라고 느낀다. 노동이 중심인 사회, 대한민국의 직장인들이 '타임푸어'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한국은 OECD 국가 중 가장 오랜 시간 노동하는 나라 중 하나다. 지난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발표에 따르면 2015년 한국의 평균노동 시간은 2113시간으로 세계 2위다. 회원국 평균 1176시간보다 347시간 길다.
연간 평균 실질임금은 회원국 평균 4만1253달러(원화 5957만원)인데 반해 한국은 3만1110달러(4490만원)에 그친다. 하루 근무 시간을 8시간으로 봤을 때 1달 13일을 더 일하고도 1만 달러 이상 덜 받는 것이다.
공식 통계 외 직장인 대상의 설문조사에서는 이보다 더 길게 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취업포털 잡코리아가 직장인 1323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 근로시간이 1주일 평균 53시간에 달했다. 1년으로 환산했을 때 2763시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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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무시간이 길어지는 것은 필연적으로 일 외 일상 생활을 챙길 시간이 부족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소기업에서 엔지니어로 일하는 강모(남·31)씨도 "정시 퇴근보다 저녁 10시, 11시까지 일할 때가 많다"며 "어제도 새벽 4시에 퇴근했는데 청소 등 집안일은 물론 친구들 만나는 것도 힘들다"고 답했다.
대형마트에서 근무하는 판매원 이모(여·41)씨는 "한 달에 8번 가량 쉬지만 서서 일하다보니 쉬어도 늘 피곤한 상태"라며 "일하는 시간이 줄어, 가족과 시간을 보내고 취미활동을 좀 할 수 있는 시간이 생겼으면 좋겠다"고 토로했다.
실제 통계청 '2014년 생활시간 조사'에 따르면 취업자 73.1%가 "시간이 부족하다"고 답했고, 89.5%가 "피곤하다"고 응답했다.
문제는 장시간 근로가 생산성 향상에도 좋은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2015년 근로자 1인당 1시간의 노동생산성을 보면 대한민국은 31.8달러로, OECD 회원국 평균 46.6달러에 한참 못 미쳤다. 일을 세계 최고 수준으로 '오래' 하지만, 결과물은 미흡한 상황이다.
김종진 한국노동사회연구원 연구위원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하는 시간을 조정하지 않고는 삶과 휴식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김 연구위원은 "이틀 철야 근무를 해보면 알테지만 몸이 찌뿌둥하고 머리가 멍한데 일이 잘 될리 있겠냐"고 반문하며 "일정시간이 지나면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의 능률이 더 높아지지 않는다"고 했다.
[뉴스핌 Newspim] 황유미 기자 (hume@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