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 외압따른 '보여주기식 행사'지적도..채무자 '도덕적 해이'우려도
[뉴스핌=이지현 기자] 저축은행과 대부업계가 소멸시효 완성채권 소각에 나섰다. 저축은행과 대부업계는 소멸시효 완성채권 소각을 통해 '고금리 대출'이라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개선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지만, 일각에서는 국회와 정부가 소멸채권 소각에 지나치게 개입하고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소멸시효 완성채권이란 대출자가 원리금을 연체한 날로부터 5년이 지난 것으로, 채무자가 더 이상 돈을 갚지 않아도 되는 채권이다. 하지만 채무자가 이를 모르고 소액이라도 갚을 경우 시효가 부활돼 불법추심 등에 악용되어왔다.
23일 SBI저축은행은 9445억원 규모의 개인 소멸시효 완성채권을 무상 소각하는 행사를 진행했다. 이로써 불법 추심에 노출됐던 약 12만명의 채권자들이 부채를 완전히 탕감받게 됐다.
SBI저축은행은 내년 상반기 소멸시효 완성채권 중 법인 채권 1조 1000억원마저 무상 소각한다는 계획이다. 다만 가지고 있던 소멸채권을 모두 소각한다고 하더라도 미리 대손상각 처리를 해 회계상 변동은 없을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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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 SBI저축은행은 9445억원 규모의 개인 소멸시효 완성채권을 무상 소각하는 행사를 진행했다. 이로써 불법 추심에 노출됐던 약 12만명의 채권자들이 부채를 완전히 탕감받게 됐다.<사진=SBI저축은행> |
그동안 일부 금융회사들은 영업상 이익을 위해 대부업체 등에 부실채권이나 소멸시효가 완성된 채권을 매각해 수익을 챙겨왔다. 법원의 지급명령을 받고 2주 안에 이의신청을 하지 않거나, 채무자가 빚을 조금이라도 상환하면 소멸시효가 되살아나는 점을 악용해 불법추심을 하는 사람들에게 소멸채권을 팔아온 것.
하지만 이같은 불법추심이 사회적 문제가 되면서 금융당국은 지난해 채권추심업무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소멸시효가 완성된 채권의 부활과 매각 행위를 일체 금지한다는 방침을 밝혔다. 더불어 국회에서도 저축은행과 대부업체의 소멸채권 매각을 엄격히 금지함과 동시에 보유한 소멸채권을 모두 소각하라는 요구를 해왔다.
지난 10월 국정감사에서 제윤경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임진구 SBI저축은행 대표와 최윤 아프로서비스그룹 대표들에게 소멸시효 완성채권 소각을 약속받았다. 소멸채권을 소각하면 채권이 부활할 여지 없이 채무에 대한 권리가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이에 따라 지난 11월에는 대부업체 러시앤캐시의 모회사인 아프로서비스그룹이 소멸채권 약 3174억원을 주빌리은행에 무상 양도한 뒤 소각한 바 있다. 당시 채권 소각으로 약 2만명의 채무자가 부채를 탕감받았다.
업계에서는 1위 업체인 SBI저축은행, 러시앤캐시 등이 자체 소멸채권 소각에 나서면서 저축은행과 대부업계에 전반적으로 퍼져있던 불법추심 등의 부정적 이미지가 개선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임진구 SBI저축은행 대표이사는 "저축은행 업계 1위로서 서민들의 부채를 탕감하는데 모범을 보이려 결단을 내리게 됐다"며 "저축은행은 서민의 금융 안정화에 앞장서야 하는 제도권 금융기관인 만큼, 앞으로도 서민들의 부채와 고금리 부담을 경감시켜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소멸채권이라 할지라도 이를 소각하거나 보유하는 등의 문제는 회사의 재산권과 관련된 문제이고, 최근에는 이를 매각하는 금융사도 많지 않은 상황에서 정부와 국회가 지나치게 개입한다는 것.
저축은행 업계 관계자는 "과거에는 일부 금융사들이 소멸채권을 팔아 수익을 내기도 했지만, 요즘에는 도의적 문제가 있어 매각하는 곳은 많지 않다"며 "소멸채권은 엄밀히 말하면 회사의 재산권인데 이를 소각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무리가 있어 보인다"고 말했다.
또 다른 저축은행 관계자는 "요즘에는 소멸시효가 완성된 채권은 전산에서 자동적으로 삭제가 되게끔 되어 있는데, 이를 소각한다고 달라질 것은 없다. 보여주기식 퍼포먼스에 지나지 않는다"며 "오히려 이런 퍼포먼스가 알려질수록 일부러 돈을 갚지 않는 악성 채무자가 늘어날 우려도 있다"고 말했다.
[뉴스핌 Newspim] 이지현 기자 (jhlee@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