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 전설(戰說)] 가치중립성 뒤에 놓인 은밀한 속내
"딸을 잘못 둔 죄를 추가할 뿐"
[뉴스핌=이승제 선임기자] [편집자]'여의도 전설(戰說)'은 정치권에서 격렬하게 오가는 말과 논쟁 속에 숨겨진 또다른 욕망, 본심일 수도 있는 속내를 뽑아내려는 시도입니다. 한국 정치권의 지나친 엄숙주의를 벗어나 자유롭게 유희하려 합니다. 틀을 깨는 탈주를 꿈꿉니다.
28일 공개된 국정 역사교과서 현장검토본 <사진=이형석 사진기자> |
# 국정 역사교과서, '가치중립성'의 민낯
인문학과 철학을 공부 좀 했다는 사람은 선뜻 '가치 중립성'이란 말을 꺼내지 않는다.
1960년대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에 이어 해체주의(deconstruction)가 유럽을 비롯해 세계 지성계를 휩쓸었다. 독일 히틀러 정권의 광적 권위와 인종차별 사상에 대한 반성이 출발점이었다. 광적인 폭력을 일으킨 사상과 인간 본성의 근원을 파헤치려는 탐색이었다.
해체주의는 절대적 가치와 철학을 거부한다. 모든 것이 구성자의 취사선택과 강조에 따른 구성(construction)이라고 본다. 구성 과정을 추적·해체해 구성자의 가면 뒤에 놓인 민낯을 폭로하는 게 그들의 전략이다.
해체론자가 보기에, 권력의 '가치중립성'은 권력자가 자신의 민낯을 가리는 은폐장치다. 이쪽저쪽 치우치지 않은 중용(中庸) 뒤에 자신의 탐욕을 숨긴다.
정부는 지난 28일 검정에서 국정으로 바뀌는 중학교 역사,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의 현장 검토본을 공개했다. 정부의 설명을 한 마디로 줄이면 '가치중립성'이다. 이준식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은 "올바른 역사 교과서는 학생들이 특정 이념에 치우치지 않고 균형 있는 역사관과 올바른 국가관을 가질 수 있도록 심혈을 기해 개발했다"고 말했다.
교육부와 필진들은 현행 역사 교과서 중 상당수가 좌편향됐다며 '균형'을 맞추겠다고 강조해 왔다. 그렇다. '가치중립성'이다. 하지만 이날 공개된 내용에서 그들의 민낯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우편향', 그것도 박정희 정권 시절을 향하는 우편향, 극우다.
# 데자뷔, 3선 개헌과 부활하는 국정 역사교과서
jtbc 보도에 따르면, 국사편찬위원회 직원들이 초고를 다시 쓰다시피 수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jtbc는 집필진 역량 부족에 따른 것으로 분석했다. 애초 정부의 국정화 방침에 역량 있는, 수많은 역사학자들이 참여하지 않은 탓이다. 지난 5월 받아 본 초고는 교과서로 쓸 수 없을 정도였다는 증언도 나왔다.
'목적이 좋다면 수단은 아무래도 상관없다.' 데자뷔 아닌가.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72년 유신체제를 선포한 뒤 1974년 중·고교 정책교과(사회·국사·도덕)를 국정으로 바꿨다. 유신체제로 종신 대통령을 꿈꿨고 국정 교과서로 기초를 튼튼히 하려 했다. "대의가 좋다면, 그것이 인류를 위한 것이라면 다소간의 희생은 불가피하다." 히틀러의 말이다.
# 이미 판가름난 '효도 교과서'의 운명
올해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탄생 100주년이다. 그래서였을까. 정부는 온갖 파행과 어려움에도 기어이 국정 역사교과서를 내놨다.
국정교과서의 필진은 물론 내용도 보수 일색이라는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대한민국 수립'이란 표현에서부터 이승만·박정희 정권을 추켜세운 것까지…. 흐릿해진 부정적인 뉘앙스 위에 깨알 같은 칭송이 덧씌워졌다. 유신체제를 위해 비상사태 선포가 불가피했다는 표현도 담았다. 1963년 제작해 배포됐던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도표'가 다시 등장했고 5·16 쿠데타의 '혁명 공약'이 상세히 실렸다. 친일파에 대한 기술이 대폭 축소됐고, 박정희는 안으로 숨었다.
"잘못된 역사를 배우면 혼이 비정상이 될 수밖에 없다."(2015년 11월 박근혜 대통령 국무회의 발언) 이제 거꾸로 물을 때다. 최순실 게이트를 파헤칠수록 숱한 불법·탈법 행위와 놀랍도록 대담하고 엽기적인 행태가 나오고 있다.
한 야당 의원의 말은 깊은 울림을 갖고 있다. "박 대통령은 아버지에 효도하려고 저렇게 불철주야 노력하고 있지만, 아버지 박정희의 죄목에 새로운 항목을 추가할 뿐이다. '딸을 잘못 둔 죄', 이것이다."
[뉴스핌 Newspim]이승제 선임기자(openeye9@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