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7년 한방·양약기법 결합해 개발...때로는 ‘아류’에게서도 배워
[뉴스핌=박예슬 기자] 한국에서 가장 오래 된 양약(洋藥). 동화약품의 ‘활명수’다. 조선조 고종 임금이 대한제국 황제로 즉위하던 1897년 궁중 선전관을 지내던 노천 민병호 선생이 개발했다.
그는 궁중에서 전수되던 생약의 비방을 일반인에게 널리 보급하고자 서양 의학을 접목해 활명수를 개발, 최초의 ‘국산 의약품’을 만들었다. 위에 좋은 한약건재를 넣고 달인 원액에 중국에서 수입한 ‘아선약’과 ‘정향’, 그리고 ‘박하’ 등을 넣어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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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활명수 패키지. <사진=동화약품> |
‘생명을 살리는 물’이라는 의미의 ‘활명수(活命水)’는 당시 급체, 토사곽란 등으로 죽음에까지 이르는 사람이 많았던 시절 만병통치약으로 통할 정도였다.
민병호 선생은 아들인 민강 동화약품 초대 사장과 함께 1897년 활명수를 대중적으로 알리기 위해 서울 순화동 5번지에 현 동화약품의 전신인 ‘동화약방’을 설립했다. 1910년 통감부에 ‘부채표’와 ‘활명수’를 상표등록하고 일제 강점기에도 ‘민족자본’으로서 자리를 지켰다.
당시 활명수는 그리 저렴하지는 않았다. 1920년대 활명수의 가격은 50전으로 당시 물가 기준 설렁탕 두 그릇 값이었다. 하지만 수익금의 일부는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자금으로 흘러들어갔다.
‘부채표가 없는 것은 활명수가 아닙니다’라는 카피로 유명할 만큼 활명수는 ‘오리지널’로서의 정체성이 큰 역할을 해 왔다. 하지만 시장 변화 앞에서는 아류작의 장점이라도 모방하는 적극적 변화를 보였다.
예컨대, 1965년 삼성제약이 내놓은 ‘까스명수’는 탄산가스가 든 소화제라는 새로운 트렌드를 만들며 원조의 자리를 위협했다. 동화약품 내에서도 '원조의 자존심'과 관련한 논란이 일었지만, 이런 자존심을 굽히고 트렌드에 발맞췄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1966년 선보인 ‘까스활명수’다. 까스활명수는 출시된 지 2년 만에 까스명수를 압도하고 시장 1위로 올라섰다.
2000년대 들어서는 한국인의 식습관이 바뀌며 소화제 시장이 위축되기도 했으나 동화약품은 젊은층을 공략하는 마케팅으로 시장 점유율 굳히기에 나섰다.
1990년대까지 광고 모델로 중장년층인 고(故) 김무생, 배우 한진희, 김형일 등을 기용했으나, 2000년대 들어서는 가수 김동완, 배우 이윤지, 신세경 등 젊은 모델로 바꿨다. 작전은 통했다. 2000년대 이후 매출액이 매년 5~10%씩 오르기 시작한 것.
출시 120년을 앞두고 있는 활명수는 현재까지 누적 판매량이 약 84억병에 달한다. 일렬로 세우면 지구 25바퀴를 돌 수 있는 양이다. 인기는 현재진행형으로 연 매출은 430억원대를 기록하고 있으며 시장점유율은 70%에 달한다.
활명수 역시 여러 제품군을 갖추고 있다. 기본형인 ‘활명수’외 ‘까스활명수’, 매실성분을 넣은 여성 대상 ‘미인활명수’, 편의점용 의약외품 ‘까스활’ 등이 있다.
[뉴스핌 Newspim] 박예슬 기자 (ruthy@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