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핌=글 장주연 기자·사진 이형석 기자] 스스로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김민희(34)는 유난히 말이 없는 배우다. 짧아도 너무 짧은 답변 탓에 공식석상에선 그를 제외한 모두가 진땀을 빼는 일이 부지기수다. 하지만 그런 그가 조곤조곤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는 때도 있다. 뜻밖에도 인터뷰 자리가 그렇다. 물론 대화의 주제는 반드시 ‘연기’에 한해야 한다. 자신이 선택한 작품에 대해, 그리고 자기가 구축해나간 캐릭터에 관해 이야기를 나눌 때면 그에겐 어떠한 막힘도, 망설임도 없다.
명실상부 충무로 거장들의 ‘일순위 배우’ 김민희가 이번에는 ‘박찬욱 월드’에 입성했다. 박찬욱 감독이 7년 만에 국내에 내놓은 ‘아가씨’를 통해서다. 1일 개봉한 이 영화는 1930년대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게 된 귀족 아가씨와 그의 재산을 노리는 백작, 그리고 검은 거래를 제안받은 하녀와 아가씨의 후견인까지, 돈과 마음을 뺏기 위해 서로 속고 속이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그렸다. 극중 김민희가 맡은 역할은 타이틀롤인 아가씨 히데코다.
“영화는 시나리오처럼 나온 듯해요. 그 전 작품에 비해서 (박찬욱)감독님 색깔이 짙고 조금 더 곱게 그려졌어요. 사실 우리 영화가 유머도 있고 긴장감, 스릴, 반전도 있고 그 안에 로맨스도 있고 정말 다양하잖아요. 너무 어둡지 않고 다양함과 보는 재미가 있으니까 좋았어요. 관객 여러분도 그런 재미를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싶고요.”
김민희가 열연한 히데코는 사연을 감춘 귀족이다. 후견인 이모부 밑에서 부모도, 친구도 없이 외롭게 자라온 그는 세상 물정에 무지하고 순진하다. 하지만 이건 1막까지만 해당한다. 영화의 2막이 오르면서 아이 같은 순수함 뒤에 감춰준 히데코의 사연이 드러나고 캐릭터는 급변한다. 그리고 김민희는 흐트러짐 없이 히데코의 양면성을 그려낸다.
“감정을 줄 때 딱 한 가지에 갇히지 않았어요. 여러 가지 감정을 입혀 봤죠. 어떤 상황에서든 다른 감정이 충분히 끼어들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러니 어렵거나 혼란스러운 부분은 없었죠. 전체적으로 1부, 2부에서 나뉘어서 다른 모습을 보여주지만, 캐릭터의 감정선을 딱 잘라 나누기보다 모두 품은 거예요. 하나의 감정을 가지고, 혹은 그 감정을 향해 연기한 게 아니에요. 다른 의외의 감정들도 다 섞어가면서 쌓았달까요. 그러다 보니 히데코도 전형적이지 않고 더 생동감 있게 만들어졌죠.”
김민희의 연기에 놀란 또 다른 이유는 그가 뱉는 대사가 모두 한국어는 아니라는 데 있다. 영화를 본지 한참이 지난 지금도 히데코가 처음 대사(일본어)를 뱉었을 때를 잊을 수 없다. 매혹적이었고 사랑스러웠다. 물론 이후로도 줄곧 그랬다. 김민희는 일본어 대사 하나하나에까지 감정을 넣었다. 이 작품으로 일본어를 처음 배웠다는 게, 할 줄 아는 일본어는 영화 속 대사가 전부라는 게 믿기지 않을 지경이다.
“그냥 작품 안에서 주어진 것들을 잘하려고 연습했죠. 일본인으로 나오니까 놓치고 싶지 않기도 했고요. 히데코의 표현이 동글동글 귀여워서 사랑스러워 보였을 수도 있겠네요. 근데 워낙 선생님(김민희는 촬영 기간 일본 배우 출신 타카기 리나와 이즈미 지하루에게 일본어를 배웠다)이 잘 가르쳐주셨죠. 배우 출신이라 그런지 감정적인 부분까지 이해해 주더라고요. 그래서 더 좋은 결과물이 나온듯해요. 또 늘 현장에 함께였기에 계속 물어보고 연습하면서 조금씩 톤을 잡아갔어요. 다른 언어로 연기한다는 거 자체가 재밌는 경험이었죠.”
김민희가 ‘아가씨’로 도전한 게 비단 일본어 연기만은 아니다. 그는 데뷔 후 처음으로 베드신도 소화했다. 베일을 벗은 후 ‘가장 따뜻한 색 블루’(2013)와 비교가 됐으니 수위도 꽤 높다. 게다가 상대는 하녀 역의 김태리, 동성 간의 교감이다. 노출과 동성애 코드. 신인에게도 힘든 일이지만, 탄탄하게 커리어를 쌓아둔 베테랑 배우에게도 쉬운 선택은 아니다.
“동성애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다면 선택하지도 않았겠죠.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니 이들의 사랑이 이해됐어요. 또 저는 동성애가 아닌 그냥 사랑이란 감정으로 받아들였어요. 걸릴 게 없었죠. 베드신의 경우엔 정확한 콘티가 있었어요. 힘들기도 했지만, 어쨌든 제가 선택한 거고 영화에 필요한 요소라 잘해내고 싶은 마음이 컸죠. 촬영할 땐 배려(‘아가씨’ 베드신은 천막 속에서 원격조정 카메라로 촬영했다)도 많이 받았고요. 화면으로 봤을 때요? 그건 당연히 이상하죠(웃음). 지금은 그냥 제가 사랑이란 감정을 중하게 여긴 것처럼 관객도 그렇게 봐줬으면 하는 마음이고요.”
쉽지 않은 촬영이었고 매 순간 도전이었지만 결과는 값졌다. ‘아가씨’가 제69회 칸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에 공식 초청되면서 김민희는 생애 처음으로 칸 레드카펫을 밟았다. 게다가 칸 진출 소식이 알려지면서 영화를 향한 국내 대중의 관심도 더욱 높아졌다. 자연스레 관심은 예매율 상승으로 이어졌다.
“우선 작품이 경쟁 부문에 가게 된 거는 너무 기뻐요. 세계적으로 관심받은 것 또한 기분 좋고요. 더구나 칸이 처음이라 근사했죠. 하지만 특별히 칸에 가게 됐다고 해서 배우로서 제 필모그래피가 더 빛이 나지도, 달라졌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그저 그간 다른 작품이 그랬듯 ‘아가씨’ 역시 작품 자체로 소중하죠. 또 예매율이 좋으니까(웃음) 기분도 좋고 (흥행을)기대해봐도 되지 않을까 싶네요. 영화를 잘 봐주시면 하는 바람과 계속 이어서 좋은 성적 거둘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죠.”
김민희의 차기작은 아직 정해진 게 없다. 다만 최근 새로운 작품을 촬영하긴 했다. 칸국제영화제 일정을 마무리한 후 홀로 그곳에 남아 홍상수 감독의 신작에 합류한 것. 주인공은 프랑스 여배우 이자벨 위페르로 김민희는 특별출연 격이다.
“지금은 그냥 연기가 재밌어요. 일 자체가 즐겁죠. 다른 놀이가 필요 없어도 될 만큼. 물론 힘들 수도 있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즐거운 일이거든요. 요즘엔 정말 놀이 같다는 생각이 들고 그러다 보니 현장이 제일 즐겁고 그 과정이 좋죠. 딱히 배우로서 목표는 없어요. 그냥 제가 할 수 있는 한,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즐기고 스스로 만족하고 싶죠. 그게 제게 가장 큰 힘이 되고요. 설령 대중의 기대치를 충족시켜드리지 못할지라도 부담은 없어요. 충족시켜드리면 너무 좋겠지만, 거기에 얽매이고 싶진 않아요. 그저 전 최선을 다할 뿐이죠.”
[뉴스핌 Newspim] 글 장주연 기자 (jjy333jjy@newspim.com)·사진 이형석 기자(leehs@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