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핌=장주연 기자] 까만 낯에 구부정한 허리, 손녀를 위해서라면 세상 두려울 것도 아까울 것도 없는 할망. 어울릴 법한데 어색하다. 한 번쯤 봤을 법한데 낯설다. 별수 없다. 그는 줄곧 그런 배우였으니까. 프레임 속에서는 언제나 도회적이고, 프레임 밖에서는 스웨트셔츠에 에코백이 가장 잘 어울리던 배우.
배우 윤여정(69)이 가장 낯선 모습으로 스크린 한가운데 섰다. 오는 19일 개봉하는 신작 ‘계춘할망’을 통해서다. 창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이 영화는 12년의 과거를 숨긴 채 집으로 돌아온 수상한 손녀 혜지와 손녀바보 계춘할망의 이야기를 그렸다. 극중 윤여정이 맡은 역할은 해녀 할망 계춘. 물속에서는 5분 동안 숨을 참을 수 있는 베테랑이지만, 손녀 없이는 단 1초도 숨쉬기 힘든 할망이다.
“방송에서 늙은 역할을 하긴 했는데 죽을 때까지를 그리진 않았어요. 이건 처음이지. 근데 배우는 하던 거만 하면 지루해요. 그리고 새로운 걸 하려는 건 좋은 일이죠. 물론 힘이 들지, 하지만 언제든지 난 다른 걸 하려고 애를 써요. 이것도 아마 그런 데서 ‘yes’를 했을 거예요. 어떤 특별한 의미라기보다는 모든 배우가 그렇듯 똑같은 역할 하는 게 싫었고 다른 걸 해보고 싶었던 거죠.”
도전. 윤여정은 이번 역할이 도전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게 ‘계춘할망’ 출연 이유의 전부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출연 결정에는 더 큰 이유가 있었다. 생각만 해도 뭉클한 그의 증조모다.
“할머니는 6·25 피난길에 돌아가셨고 증조할머니는 살아계셨거든요. 내리사랑이라고 손자가 낳은 딸이니까 제가 얼마나 예뻤겠어요. 벌써 50년 전 이야기죠. 근데 난 또 뭐 입에 넣어주고 하는 것도 비위생적이라고 질색하고 그랬어요. 그러다가 나이 오십이 넘어서 알았어요. 그게 얼마나 대단한 사랑인지, 그에게 내가 얼마나 끔찍한 존재인지도. 그래서 아직도 밤마다 죄송하다고, 잘못했다고, 할머니의 사랑을 몰랐다고 그렇게 혼자 말해요. 그런 할머니께 이 영화를 바치고 싶었죠.”
하지만 애틋함도 잠시, 촬영 시작과 함께 고생길이 열였다. 언제나 베테랑 감독, 스태프와 일하던 윤여정에게 이번 촬영장은 다소 낯설었다. 결국 촬영 두 달 전에는 완전히 제주도로 내려와 현장을 진두지휘했다. 어디 그뿐이랴. 촬영 중 귓바퀴가 찢어지는가 하면 뱀장어가 사타구니를 무는 사고도 발생했다. 딱 지난해 이맘때 일이다. 열악한 환경 속 제주도의 바닷바람을 맞고 다쳐가며 그렇게 촬영을 이어갔다.
“뱀장어한테 물린 건 아직도 까매요. 후배가 연고를 받아와서 바르긴 했는데 아직도 흉은 있더라고. 그 뒤에는 뱀장어 입을 막아서 이빨로 못 물게 해놓고 촬영했죠. 분장했던 건 또 이제 와서 고생이죠. 얼굴이 빨개졌거든요. 화장이 독하니까 자극받아서 피부가 어떻게 됐나봐. 머리털도 아주 옥수수수염이 됐고. 내가 갱년기가 훨씬 넘었는데 봐봐, 얼굴이 빨갛잖아(웃음). 정말 어떻게 흘러갈지 아무도 몰라, 인생은.”
윤여정의 이런 고난(?)과 빡빡한 일정이 제주도에서 그쳤으면 좋았겠지만, 요즘에도 그는 하루하루 정신없이 움직이고 있다. 현재 영화 홍보 활동과 함께 tvN ‘디어 마이 프렌즈’ 촬영에 한창인 것. 게다가 대사 많기로 유명한 노희경 작가의 신작이다. 하지만 어쩐지 이번엔 그의 얼굴이 밝다. 모처럼 동료 배우들과 연기 호흡을 맞추게 된 덕이다. 황혼 청춘들의 인생 찬가를 그린 ‘디어 마이 프렌즈’는 윤여정을 비롯해 김혜자, 고두심, 나문희, 박원숙, 고현정 등이 출연한다.
“극중 이름이 있는데 촬영하다 보면 그냥 이름이 나와요(웃음). 몇십 년을 안 사이니까. ‘혜자 언니’ ‘원숙아’ 이렇게 부르는 거죠. 아무튼 이렇게 한자리에 모여서 드라마를 찍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 너무 좋아요. (김)혜자 언니가 포스터 촬영하는데 손 꼭 잡고 그러더라고. ‘여정아, 우리가 죽기 전에 만나게 하려고 썼나봐’라고. 울컥하고 뭉클했죠. 옛날에는 다 같이 활동하면서 같은 작품에서도 만났는데 이제 각자 누군가의 엄마가 돼서 만날 일이 없잖아요. 근데 이렇게 만나게 된 거지. 뭐, 이게 다 노희경의 힘 아니겠어요?”
이후로도 윤여정은 노희경 작가의 칭찬을 몇 마디 덧붙였다. 자신과 마음이 맞는 좋은 감독, 좋은 작가, 그리고 좋은 배우와 함께 하는 것. 윤여정은 그것이 22년차 배우를 가장 행복하게 만드는 일이라고 말했다.
“요즘 전 아주 평화롭고 좋아요. 사실 배우는 주인공 자리에서 밀리면서부터 아주 끔찍해지거든요. 게다가 이 직업은 이유 없이 치켜세워졌다가 이유 없이 떨어져요. 어쨌든 나는 그런 시기가 지났죠. 물론 배우로 겪은 게 아니라 내 인생으로 끔찍한 시기를 겪었지만요. 그 후로 나한테는 배우는 일이었어요. 살기 위해 하는 일. 그래서 매 순간 감사하면서 일했고 육십이 넘어서는 내가 좋아하는 감독, 작가와 여유롭게 일하는 거, 그게 지금 나의 가장 큰 사치죠.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하면 즐겁거든요. 그래서 창녀 역할(영화 ‘죽여주는 여자’)도 했잖아(웃음).”
[뉴스핌 Newspim] 장주연 기자 (jjy333jjy@newspim.com) <사진=콘텐츠 난다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