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핌=글 장주연 기자·사진 이형석 기자] 캐릭터 소화력이 좋은 베테랑 배우에게도 유독 잘 어울리거나 잘 맞는 역할은 있기 마련이다. 예를 들자면 배우 설경구(47)와 군인 같은.
그간 설경구는 유독 군인과 좋은 연이 많았다. 대중에게 설경구라는 존재를 각인시킨 ‘박하사탕’(2000)에서 “신발에 물이 차서 걸을 수가 없어요”라고 외쳤을 때도 한국 최초 1000만 영화 ‘실미도’(2003)에서 안성기에게 총을 겨누며 “비겁한 변명입니다”라고 부르짖었을 때도 그는 언제나 군복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정확히 12년 후 설경구가 다시 군복을 입고 나타났다. 추석을 맞아 신작 ‘서부전선’을 선보인 것. 지난 24일 개봉한 이 영화는 1953년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농사짓다 끌려온 남한군과 탱크는 책으로만 배운 북한군이 전쟁의 운명이 달린 비밀문서를 두고 위험천만한 대결을 벌이는 내용을 그렸다.
“2009년도에 처음 이 시나리오를 봤어요. 6.25 한국전쟁 발발 60년째 되던 해라 드라마고 영화고 그런 작품이 많이 나왔죠. 하지만 안하겠다고 한 차례 거절했어요. 이후로도 생각은 계속 났는데 한 3~4년 전에 이은주 씨 기일에 제작사 대표랑 PD를 만났어요. 그때 저한테 책 한 번 볼 수 있겠느냐고 묻더라고요. 영화는 진행되다가 배우가 빠지고 엎어지고 하는 과정을 겪은 뒤였죠. 그래서 줘 보라고 한 게 여기까지 온 거예요(웃음).”
극중 설경구가 연기한 인물은 마흔이 넘는 나이에 날아온 입대 영장에 하루아침에 농사꾼에서 졸병이 된 남한군 남복이다.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고자 전쟁의 운명을 거머쥔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애쓰는 인물이다.
“저는 남복이 군인이라고 생각하고 촬영하지 않았어요. 이게 정통 전쟁 영화는 아니잖아요. 군복을 입고 있지만, 군인은 아니죠. 그래서 제작진이 ‘교육을 좀 받으실래요?’라고 묻기에 ‘나 총 잘 쏴야 해? 잘 뛰어야 해? 아니지? 그럼 왜 받아’라고 했어요. 필요가 없어서 아무것도 안하고 촬영에 임한 거죠. 정말 민간인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렇다면 코미디 연기는 어땠을까. 정통 코미디 장르는 아니지만, 영화의 관전 포인트는 설경구와 여진구의 만담과 어처구니없는 상황, 즉 유쾌한 코미디다. 실제 영화 속 두 사람은 소를 타고 탱크를 쫓는가 하면, 벌에 쏘여 말을 하지 못하기도 한다.
“과하죠(웃음). 그런 건 정말 웃기려고 작정한 신이고 판타지에요. 작가의 상상력이고 영화니까 가능한 거죠. 억지스럽다는 평을 변호하자면 오히려 그런 모습이 우리 영화와 맞는다는 거예요. 어딘가 거칠면서 어설픈 느낌. 근데 또 이게 곱씹어 보면 마냥 가볍지도 않아요. 오히려 굉장히 슬프죠. 웃기려고 작정한 신도 있지만, 결국 비극이에요. 희비극 혹은 웃픈 영화죠.”
이날 대화의 주제는 ‘서부전선’이었지만, 실제 인터뷰 내내 시선을 사로잡은 건 따로 있었다. 바로 눈에 띄게 야윈 설경구의 몸. 평소 80kg 정도를 유지하는 그의 현재 체중은 68kg까지 빠져있었다. 김영하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원신연 감독의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을 위해서 체중 감량에 돌입한 거다.
“그래도 살찔 때보다 기분이 괜찮아요. 사실 찌려는 목적을 갖고 먹는 게 스트레스거든요. 또 찌고 나면 ‘언제 빼’ 이러고 스트레스 받고. 그래도 요즘엔 저도 노하우가 생겨서 옛날에는 다이어트 하면 날카롭고 예민해졌는데 다년간 쪘다 뺐다 하니까 건강해진다고 생각하면서 빼고 있어요. 그래도 내일모레 오십인데 아직 체력은 괜찮아요. 아, 진구는 3개월 뒷면 이십인데 난 오십이야(웃음).”
그가 다이어트까지 강행하며 연기할 캐릭터는 치매에 걸린 연쇄살인마다. 언제나처럼 설경구는 이번에도 새로운 카드를 뽑아들었다. 또 도전이다.
“배우는 소모하는 직업이죠. 근데 써나가는 일인데 똑같은 걸 쓰기엔 또 부끄러워요. 관객도 피로감을 느끼고요. 그러면서 고민이 생기는 거죠. 보통 한 일을 30년 이상 하면 장인이 되잖아요. 근데 배우는 장인이 없어. 꺼낼 카드가 없으면 초라해지는데 카드를 찾기가 힘들죠. 평생 아등바등 캐릭터 만들면서 사는 거예요. 치매 걸린 연쇄 살인범이나 찾아다니고(웃음). 물론 새로운 모습 보여드릴 때면 저도 굉장히 두려워요. 나이 먹으면 편해지나 했는데 똑같더라고요. 근데 또 이상하게 그 두려움이 좋네요.”
“잘 자란 여진구, 이젠 잘 갈 겁니다” ‘구구 커플’ 여진구와의 호흡 이야기도 빠질 수 없었다. 더욱이 설경구의 출연 조건이 여진구 캐스팅이었던 건 이미 잘 알려진 사실. 설경구는 자신을 흉내 내는 여진구를 따라 하며 “지 욕이나 연습하지, 흉내 낼 거라고 내 욕을 집에서 연습해와”라고 장난스레 고개를 내저었지만, 그 눈빛과 말투에서는 후배를 향한 애정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자식뻘이라고 해서 자식 대하듯 하진 않고 적 대하듯 했죠. 쟨 나의 적이다(웃음). 그냥 딱 남복과 영광 같았어요. 촬영 중간이 중간고사, 기말고사 기간이었는데 ‘시험 잘 봤어?’ 물으면 잘 봤대. 그럼 제가 ‘성적이 더 내려갈 때도 없다면서 뭘 잘 봐? 공부도 안해놓고’ 그러죠. 한 번은 촬영 중에 진구가 던진 감자에 제가 제대로 맞은 거예요. 그래서 아파했더니 익은 감자라 덜 아프지 않느냐고 하더라고요. 하하, 나 참(웃음). 걔가 낯을 가리는데 친해지면 스태프들하고 수다도 잘 떨어요. 게다가 인성이 진짜 훌륭하죠. 어머니가 그렇게 키우더라고. 촬영 끝나면 보통 큰 소리로 ‘수고하셨습니다’ 이러고 말잖아요. 근데 걘 한 명 한 명 인사해요. 한 번 어머니께 혼났다고 하더라고요. 정말 어렸을 때부터 교육이 딱 돼 있어서 그런가 봐요. 보통 그 나이면 친구들이랑 몰래 술도 먹기도 하는데 그러지도 않고요. 지금까지 잘 컸으니까 이젠 잘 갈 거로 생각해요.” |
[뉴스핌 Newspim] 글 장주연 기자 (jjy333jjy@newspim.com)·사진 이형석 기자 (leehs@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