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수 업적 연극으로 꾸미고 연도·날짜 암기시험 '구슬땀'
[뉴스핌=추연숙 기자] # 올 상반기 국내 한 대기업 대졸 공채에 최종 합격한 공학도 A씨(28)는 지난주부터 경기도 외곽 지역에서 합숙 연수를 받고 있다. 자정 넘어까지 진행된 빡빡한 교육 일정을 마치고 숙소에 들어온 A씨는 잠들지 못하고 책을 편다. 이날 치른 그룹사 이해 시험에 통과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창업주의 업적과 관련된 연도, 날짜, 경영 이념을 달달 외우고 있자니, 잠시 '이걸 왜 다 외워야 하나'하는 회의감도 든다.
상반기에 바늘 구멍같은 대기업 공개채용을 뚫은 신입사원들이 더위도 잊은 채 입사의 마지막 관문인 '합숙 연수' 과정을 수행하고 있다. 국내 대기업들은 7월 초부터 8월 중순 사이 일정에 따라 신입사원 그룹 공통 연수 프로그램을 가동중으로, 프로그램에는 창업자부터 현재의 그룹 총수까지 오너 일가의 업적을 다양한 방식으로 학습하는 과정이 빠지지 않고 들어간다.
5일 재계에 따르면 삼성그룹 신입사원들은 현재 경기 용인 등지에 위치한 연수원에서 합숙하며 삼성그룹입문연수(SVP)라고 불리는 빡빡한 연수프로그램을 소화하고 있다.
약 3주간 일정으로 진행되는 SVP에서 신입사원들은 '드라마 삼성'이란 프로그램에 특히 노력을 기울인다. 호암 이병철 선대 회장, 이건희 회장의 업적 등을 신입사원들이 직접 연극으로 꾸며 발표하는 프로그램이다. 대본 작성에서부터 소품 준비, 무대 연출까지 모두 신입사원들의 힘으로 며칠씩 밤을 지새우며 꾸민다.
또 그룹 총수의 경영 철학, 창업과정의 주요 사건 등을 미리 외운 후 퀴즈대회를 통해 확인하는 시간도 갖고 있다.
초유의 경영권 분쟁사태로 시끄러운 롯데그룹 신입사원들도 공통 입문연수 과정에서 신격호 총괄회장으로부터 시작되는 그룹의 역사에 대해 꼼꼼히 학습하고 있다. 특히 롯데그룹의 '오해와 진실' 등을 주제로 창업사를 배우며 '롯데=한국기업'이란 점을 인식하는 과정도 연수에 포함된다.
연수에서는 신격호 총괄회장이 열아홉 나이에 일본에서 가난을 딛고 화장품, 껌 사업을 시작한 점으로 인해 오해가 생기지만, 창업주 이하 롯데그룹 일원은 우리나라의 경제 성장과 함께 해왔다는 점을 강조한다. 한국 롯데그룹 일가가 국내 자본을 해외로 유출해 일본 롯데 사업에 사용한 일이 없다는 점도 설명한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은 지난 4일 직접 상반기 신입사원 연수가 진행 중인 경기 오산 롯데인재개발원에 방문, 최근의 경영권 분쟁에 대해 "국내에서 성장한 롯데가 글로벌 기업이 되기 위해 겪는 성장통"이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인재경영'을 중시하는 LG의 교육 프로그램에서도 총수 일가 및 그룹 경영에 있어서의 주요 역사를 담은 부교재가 배포된다. ' LG인화원'에서 약 2주 간의 그룹 공통 합숙교육을 받는 동안, LG 신입사원들은 구인회 선대 회장으로부터 시작되는 그룹의 주요 업적을 연도, 날짜까지 꼼꼼히 암기해야 한다. 서술형으로 된 LG그룹의 주요 경영 이념은 토씨 하나까지 그대로 암기하고 테스트를 거친다.
SK그룹도 회사 이념과 철학을 교육하는 시간을 마련하고 있다. 그룹 연수원인 'SK아카데미'에서 신입사원들은 고 최종현 전 회장의 주요 업적, 그룹의 인수합병(M&A) 과정 등을 학습한다. 이 내용으로 역사 신문을 만들거나 작은 공연을 준비해 발표하기도 한다.
한화그룹 신입사원 연수에서도 기업의 역사를 담은 학습자료를 암기해 시험을 보는 과정이 며칠에 걸쳐 진행된다. 시험 점수가 과락인 경우 '나머지 공부'를 통해 암기를 보충하기도 한다.
현대차 등 국내 다른 대기업의 신입사원 연수에도 대체로 이와 비슷한 학습과정이 포함돼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이에 대해 최근 모 대기업 연수에 참여한 한 신입사원은 "나눠준 내용을 배우다보면 총수 일가의 업적이 미화되는 경향이 있다고 느꼈다. 막대한 암기량도 부담스러웠다"면서도 "애사심을 키우고 전반적인 기업 역사에 대해 한번 훑고 지나간다는 점에선 도움되는 부분도 있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신입사원 연수에서 주입식 암기 교육이 이뤄지는 점, 총수 일가의 업적을 강조하는 점 등에 대해 재계에서는 조직의 일원으로 양성하기 위해 필요한 절차 중 하나로 본다. 기업의 기본 이념과 가치를 이해함으로써 해당 기업만의 문화에 적응할 수 있는 과정이란 설명이다.
재계 관계자는 "짧은 기간의 신입사원 연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업무능력같은 것보다도 오히려 그 기업의 문화를 습득하고 그에 적응하는 것"이라며 "경영 역사와 전반적인 가치를 배우는 과정이 나중에 구성원으로서 그 기업만의 문화를 공유하는 데에 생각보다 영향을 많이 미친다"고 말했다.
하지만 일각에선 글로벌 트렌드에 걸맞는 창의적인 인재를 양성하기 어렵고, 합리적인 소통보단 무조건적 충성를 강요하는 문화를 재생산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재계 관계자는 "신입사원 연수 프로그램들은 최근 창의성, 리더십, 협동력 등을 동시에 기를 수 있는 전문적인 교육과정으로 많이 시도가 되고 있다"며 "그룹의 역사를 배우는 과정도 신입사원 세대와 소통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점점 더 바뀌지 않겠나 생각한다"고 말했다.
또 다른 재계 관계자는 "최근 롯데의 경영권 다툼 과정에서 주주총회와 이사회 등 정상적인 의사결정을 무시한 황제경영이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며 "신입사원 연수가 황제경영을 위한 도구의 하나로 전락한 것은 아닌지 되짚어 볼 일이다"고 지적했다.
[뉴스핌 Newspim] 추연숙 기자 (specialkey@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