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핌=글 장주연 기자·사진 김학선 기자] 눈매가 살짝 처진 사람에게서 악한 이미지를 받기란 쉽지 않다. 그런데 이 남자만큼은 예외다. 오히려 그는 이상할 정도로 악역이 잘 어울리는 배우 중 한 명이다.
물론 정작 본인은 순한 눈매 때문에 악해 보이지 않을까 걱정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건 혼자만의 착각인 듯하다. 되레 ‘나쁜’ 캐릭터가 더 잘 어울리는 걸 모르는 눈치다. 게다가 섹시한 매력도 배가 된다는 것을. ‘하녀’(2010)의 훈과 ‘관상’(2013)의 수양대군처럼, 혹은 신작 ‘암살’ 속 염석진(다소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야비하고 비겁할지라도)처럼 말이다.
배우 이정재(42)가 영화 ‘암살’을 통해 또 한 번 악역에 도전했다. 오는 22일 개봉을 앞둔 이 영화는 1933년 상하이와 경성을 배경으로 암살 작전을 위해 모인 독립군들과 임시정부대원, 그리고 청부살인업자의 이야기다. 조국도 이름도 용서도 없는 이들의 서로 다른 선택과 운명을 그린 '암살'에서 이정재는 임시정부 대원 염석진을 연기, 치밀하고 섬세한 감정을 표현해 극을 풍성하게 만든다.
“어려운 캐릭터인 만큼 욕심이 났어요. 물론 염석진이 실존인물은 아니지만 실제로 존재했을 법한 캐릭터라 부담도 됐죠. 뭔가 실존 인물을 공부해서 연기하고 재현해야 한다는 그런 생각이 들다 보니 자연스레 압박감도 들었던 거예요. 하지만 그걸 감내할 만큼 매력적이었어요. 더군다나 그동안 1930~1940년대를 배경으로 한 독립투사 이야기도 없었으니 더 끌렸죠.”
극중 이정재가 연기한 염석진은 15년간 뛰어난 활약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김구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는 경무국 대장이다. 그는 냉철한 판단력과 치밀한 전략으로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하지만 늘 다른 생각을 염두에 두고 있는 속을 알 수 없는 인물. 이정재는 염석진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각종 자료와 다큐멘터리를 찾아보는 것부터 시작했다.
“아무래도 다큐는 동영상, 사진, 내레이션이 잘돼있어서 이해가 빨랐죠. 시대적 배경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됐어요. 김구 선생님, 홍범도 장군, 안창호 선생님 등 독립운동가는 물론 친일 행적을 다룬 다큐도 봤죠. 물론 처음에는 친일 행적을 했던 사람을 이해하기 쉽지 않았어요. 근데 막상 그 시대를 접하면서 인간인지라 이럴 수도 있었겠구나 싶었죠.”
그 결과 이정재는 ‘암살’을 통해 연기 인생에 길이 남을 인상적인 신을 몇 개 남겼다. 하지만 다디단 열매를 맺는 데는 고통의 시간이 따르는 법. 명장면을 탄생시키기 위해 그는 남모를 고충도 겪어야 했다. 이를테면 법정신을 위해 15kg을 감량하거나 아편굴 신을 위해 38시간 무수면 상태를 유지하는 것과 같은. 게다가 이십 대부터 육십 대를 오가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십 대는 지금 하기에 무리수가 있다고 생각했어요(웃음). 그래도 부담보다는 흥미가 컸죠. 반면 육십 대는 가장 고민이 많이 됐어요. 아무래도 살아보지 못한 나이라 오로지 추측으로 해야 했죠. 그래서 살을 뺀 거고요. 배는 특수 분장을 해도 팔꿈치, 손목 같은 관절 부위는 특수 분장이 떨어지더라고요. 아무래도 운동을 오래 해서 이두, 삼두가 남아있는데 배만 나오면 어색하니까 살을 빼기 시작한 거죠. 진짜처럼 보이기 위한 노력 중 하나였어요.”
“다른 건 몰라도 새롭게 보이는 표현법을 많이 시도한다. 진짜같이, 사실처럼 보이는 게 효과적이라고 생각한다”는 연기 지론을 이번에도 적용한 셈이다. 물론 이정재는 데뷔 때부터 이 마음가짐을 잊은 적 없다. 그래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같은 생각에도 불구하고 왜 최근 몇 년간 그의 연기가 더 돋보였는지, 그리고 날이 잔뜩 선 연기에서 어째서 편안함이 묻어나는지.
“아무래도 어렸을 땐 경험치에서 오는 표현력이 약했을 거예요. 지금은 직간접적 경험이 많아지고 다양한 것들을 접하다 보니까 알게 된 게 많죠. 그러면서 표현이 짙어졌고요. 뭐든 경험하는 게 연기에 도움이 되는 건 사실이니까요. 연기가 더 편해지고 그런 건 없어요. 모든 직업이 그렇듯 연기도 할수록 힘들죠. 다만 영화인들과 함께 있으면 심적으로 편하긴 해요. 공통 관심사가 같으니 재미도 있고요(웃음).”
그저 영화인들과 함께하는 게 재밌다는 이정재는 당장 오는 17일부터 차기작 ‘역전의 날’ 촬영에 돌입했다. 한중합작영화인 ‘역전의 날’은 중국 리준 감독이 연출하는 작품으로 이정재와 중국의 톱스타 종한량의 만남으로 화제를 모았다. 반면 정우성과 16년 만의 재회로 영화 팬들을 설레게 한 ‘단둥’의 출연은 아직 아무것도 확정되지 않은 상황이다.
“‘단둥’의 경우 아직 논할 단계가 아니에요. 영화 준비 단계고 가야 할 작업이 많이 남았죠. 물론 우성 씨랑은 예전부터 꼭 다시 같이 연기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어쨌든 지금은 강렬한 캐릭터에 도전한 영화 개봉을 앞두니 참 좋네요. 배우라면 누구나 강하고 다채로운 성격의 캐릭터를 한 번 정도 해보고 싶은 욕구가 있잖아요. 아마 당장은 염석진보다 더 강력한 캐릭터는 어렵지 않을까 해요. 이제 멜로도 하고 싶고(웃음).”
이정재가 말하는 최동훈 감독, 그리고 전지현. ‘암살’이 개봉 전부터 주목을 받는 이유는 뭘까. 지난 2012년 개봉해 1298만 관객을 동원한 ‘도둑들’의 주역들이 한데 모였다는 데 의미가 있다. 메가폰을 잡은 최동훈 감독과 이정재, 그리고 ‘암살’의 홍일점 전지현이 그 주인공이다. 그럼 이정재가 두 작품에 걸쳐 바라본 두 사람은 어떤 감독이고 배우일지 궁금했다. “흔히들 ‘최동훈 표’ 영화라는 말씀을 하시잖아요. 근데 저는 그렇게 보지는 않아요. 그저 감독님은 굉장한 영화광이죠. 에로틱 스릴러부터 활극, ‘도둑들2’까지 만들고 싶어 하는 소재와 장르의 영화가 너무 많은 천부적인 이야기꾼이에요. 다만 시나리오를 직접 쓰는 감독이라 작가라는 포지션이 더 짙어요. 영감을 정확히 받아야 쓸 수 있는 스타일이고요. 그 과정에서 편차가 있는 거지 ‘최동훈 표’ 영화의 색깔이 바뀌었다는 건 아니라는 거죠. 전지현 씨의 경우 아주 가볍게 연기하는 스타일이에요. 보통 욕심을 많이 부리면 연기가 과한데 지현 씨는 그런 게 없죠. 감정은 깊지만, 연기 자체는 가볍게 하는 모습을 보고 ‘저 친구 진짜 대단한 배우다. 어떻게 저렇게 힘을 빼고 욕심을 드러내지 않고 표현을 잘할 수 있을까?’ 싶었죠. 동료 연기자로서 부러웠어요.” |
[뉴스핌 Newspim] 글 장주연 기자 (jjy333jjy@newspim.com)·사진 김학선 기자 (yooksa@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