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핌=글 양진영 기자·사진 이형석 기자] '압구정 백야'로 임성한 작가의 시험대에 올랐던 강은탁(33·본명 신슬기)이 비로소 웃었다. 무려 9년차 경력의 배우지만 이제야 전 연령의 시청자에게 제대로 눈도장을 찍었다.
임성한의 마지막 남자, 강은탁을 만났다. '압구정 백야'에서 해피엔딩을 맞으며 비운의 장PD에서 극적으로 가장 운이 좋은 남자로 거듭난 그의 표정이 밝았다. 클래식하고 남자다운 외모에 중저음 목소리에서 나오는 여유. 풋풋한 20대와 또 다른 매력이 5월 햇살처럼 푸근하다.
"149회나 찍었더니 끝난 게 실감이 잘 안나지만 '굿바이 장화엄'이라는 말을 보니 '보내줄 때다' 싶어요.(웃음) 어제 운동하러 갔더니 트레이너가 '드라마랑 똑같이 말씀하시네요' 그래요. 조용조용한 말투가 똑같대요. 아직 캐릭터가 다 안빠졌나봐요. 흔히 말하듯 시원섭섭하지만 백수가 된 것 같아 좀 어색해요."
강은탁을 만나기 전 가장 궁금했던 건 '압구정 백야'의 주인공으로 발탁된 계기였다.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약간은 올드한 이미지와 묵직한 느낌이 전작의 남자 주인공들과 비슷했다. 강은탁도 그런 면은 인정했지만 "처음엔 불만만 말씀하셨다"고 말해 웃음을 줬다.
"작가 선생님 처음 만났을 땐 불만만 말씀하셨어요. '순금의 땅' 촬영하다 갔는데 옛날 정장에 2대8 헤어를 하고 갔더니 '너무 올드하다'셔서 막 물 묻혀서 머리도 내려 보고 그랬죠. 처음 캐스팅 되곤 어안이 벙벙하다는 말이 딱 맞았어요. 처음으로 모든 포털 사이트에서 검색어 1위를 찍어 봤거든요. 주변에선 '살아남아라'며 우려도 했지만 충분히 도전할 만한 작품이었어요. 끝내고 나니 더 옳은 결정이었고요. 이런 저런 논란이나 욕먹는 건 각오하고 했어요. 그 자체도 사실 관심이라고 생각해요."
어엿한 남자 주인공이지만 장화엄은 극 초반 그다지 비중이 크지 않았다. 급기야 여주인공 백야(박하나)가 복수를 위해 조나단(김민수)과 결혼까지 감행하자 강은탁은 내심 '이러다 죽는 거 아냐' 불안했다. 이내 그는 나름대로 화엄을 이해하고 해석하고 표현한 과정을 설명하며 결과적으로 임 작가에게 충분한 애정을 받았음을 인정했다.
"처음에 너무 방치해서 '왜 그러시지?' 했어요. 굉장히 힘들기도 했죠. 마치 주변인처럼 하루에 한 신만 나오고 그랬으니까요. 주변에서도 그러다 죽는다고 걱정하시고요.(웃음) 잠깐 나오는 신에서도 욕심도 부리고 그랬는데 불편하셨을 수도 있겠더라고요. 그때부터는 숨 고르기를 하게 됐어요. 다시 '장화엄에게 백야는 뭘까' 생각하면서 캐릭터를 찾아갔어요. 백야는 화엄에게 전부예요. 장PD는 현실에 없을 법한 모든 걸 다 가진 남자인데 이 여자를 선택하려면 모든 걸 다 내려놔야 했죠."
강은탁의 말처럼 화엄은 백야 외엔 여자도 모르고, 주변인들에게 차갑고 도도하기 그지 없다. 그러면서도 가족을 살뜰히 챙기는 가정적인 스타일, 세상에 없는 '완벽한 남자'다. 그런 그가 백야로 인해 애교가 점점 늘어나고 투덜거리고 떼까지 쓰게 된다. 화엄을 '연애 고수'로 만든 장본인, 백야의 매력이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블로거가 '천재소녀 백야'라더군요. 백야의 매력은 손에 잡히지 않는, 늘 한 구석에서 언제든 사라질 수 있다는 느낌? 마치 나무꾼이 날개옷 숨겨야 하는 선녀 같은 존재죠. 화엄이에겐 백야가 계속 자길 버리고 떠난 여자였으니까요. 또 동시에 굉장히 챙겨줘야 하고 보듬어주고 싶은 아픔이 묻어나는 여자예요. 오빠로 다가갈 때 화엄은 충분히 어른스럽지만 남자로 다가갈 땐 한없이 아이같아요. 남자를 그렇게 만드는 게 백야의 매력이겠죠."
그러면서도 강은탁은 '실제로 백야 같은 여자는?'이란 질문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지질할 정도로 지고지순한 순정파 장PD에 대해서도 "이해는 하지만 답답해 죽을 뻔 했다"고 실제 성격과 괴리가 있음을 고백했다.
"현실에서 백야같은 여자는 힘들어요. '나 때문에 오빠가 불행해진다'는 건 이해할 수 없어요. '시끄럽고 앉아' 할 것 같아요.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이고 불행해질 지 모르는 거잖아요. 감정이 없는 거면 모를까 같이 극복해야죠. 안그래도 화엄이 정말 답답해 죽을 뻔 했어요. 실제 성격은 사실 마초같은 면이 있어요. 장화엄은 일할 땐 마초인데 백야 앞에선 순한 양이에요. 얼마나 좋으면 그럴까 싶어요. 물론 저도 좋아하는 여자한테 마초처럼 굴진 않겠죠. 막상 한 없이 들어줄 것 같긴 해요."
강은탁은 고민이 많았던 만큼 화엄을 연기하며 계속 다른 시도를 했다. 이렇게도 틀어보고 저렇게도 해석해 봤지만 임 작가는 칭찬에 박했다. 그는 "칭찬은 절대 안하세요. 지적은 많이 해주셨죠"라면서 "제게 이런 저런 시험을 해보신 듯 해요"라고 돌아봤다. 그러던 중 화엄의 '흑역사'라 할 만한 신혼 첫날밤 퍼포먼스를 생각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청혼가' 장면은 너무했어요. 선생님한테 나흘 전에 문자를 받았어요. 박진영 씨의 청혼가와 안무를 완벽하게 준비하라셨죠. 게다가 실내에서 무반주란 말에 머릿 속이 하얘졌다니까요. 또 하나의 흑역사예요. 평생 따라다니면 어떡하죠.(웃음) 노래를 잘했으면 가수 했겠죠. 춤도 한 10년 만에 췄어요. 가사랑 춤에 진심을 담자 해서 1990년대 댄스나 율동처럼 테크닉보다 가사에 맞는 동작을 생각했죠. 땀 뻘뻘 흘리고 열심히 보여주는 게 포인트라고 생각했고, 다행히 백야(박하나)가 괜찮았대요. 너무 열심히 해서 민망하단 생각도 못했다면서요. '내 눈엔 예뻤어요'라고 해줘서 고마웠죠."
34세. 이제 막 대중에게 제대로 눈도장을 찍은 배우 치고 적지 않은 나이다. 강은탁은 "이제와서 조급함을 부리지 않는다"면서 그런 마음으로 될 일이 아니란 걸 이미 안다고 했다. 차곡차곡 경험과 내공을 쌓아 가는 그의 입장에서 가장 듣기 좋은 소린 역시 연기 칭찬이었다.
"화엄이의 진심이 느껴졌다고 할 때가 가장 기분이 좋았어요. 진심이 와닿아서 같이 울었단 시청자들 얘기가 최고의 찬사였죠. 굳이 감정 신이 아니어도 백야와 연애를 하든 사랑해서 쳐다볼 때든 진심이 느껴진다 말해주실 때 가장 감사하더라고요. 진짜 그렇게 연기했으니까요. 최소한 그 진심을 느껴주신 분들 덕에 앞으로 더 연기할 용기가 났어요."
2006년 '주몽'으로 데뷔해 우여곡절을 겪으며 9년째 배우로 살아가는 강은탁. 롤 모델로 배우 이순재와 김래원을 꼽으며 오래오래 연기하는 게 꿈이다. 그들을 존경하는 만큼 시간이 흐른 뒤엔 누군가 자신을 그렇게 바라봐주길 바라는 마음도 숨기지 않았다.
"롤 모델은 너무 많아요. 이순재 선생님처럼 평생 가고 싶고, 모든 배우들이 그럴 걸요. 또 김래원 선배님 연기를 정말 오래 지켜봤고 계속 발전하는 걸 봐왔어요. '천년의 약속'에서 한번 더, 펀치로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 됐어요. 후배로서 정말 멋있다고 생각하고 그 연기톤을 좋아해요. 조재현 선배님 등 다 꼽기가 어렵죠.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을 때 누군가 나를 그렇게 생각해주는 거예요. 언제가 됐든 '저 선배같은 연기하는 배우가 되고 싶다'는 말을 듣는 게 목표예요. 아마 70세쯤 돼야할 수도 있고 빠른 시일 내에 올 수도 있죠. 결국 제게 달렸어요.(웃음)"
강은탁이 배우로 뜬(?) 지는 얼마 안되지만, 30대 중반에 들어선 남자로서 연애나 결혼에 진지한 고민이 없는지를 물었다. 그는 "지난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맘이 편해졌다"고 속내를 털어놨다. "일을 안하면 부대껴요.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결혼 생각이 좀 멀리 갔죠. 아프실 때는 장남이라 먼저 결혼해서 손자를 안겨드려야 하나 했어요. 7년 가까이 투병하셔서 조바심이 나기도 했죠. 돌아가시고 난 후에는 어머니껜 죄송하지만 조금은 기다려주셨으면 해요. 일에 더 집중해야 할 때 같아요. 지금은 일하는 게 정말 좋아요. 안피곤하다면 거짓말이지만 일할 수 있다는 게 행복하고요. 연애요? 한다면 현명하고 마음이 따뜻한, 나를 믿어주는 사람이 1번이에요. 물론 예쁘고 몸매도 좋으면 금상첨화겠죠." 특히 그는 과거 한 인터뷰에서 '미안하다 사랑한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착한 남자'의 이경희 작가가 강은탁이란 예명을 지어줬다는 일화를 밝히기도 했다. 그는 "작가님 작품을 정말 좋아하는데, 이름값을 못해 안불러주시나봐요"라며 약간은 서글프게 말했다. "데뷔 당시에 회사 대표님이 친분이 있어서 사진을 보여드리고 예명을 부탁했는데, 강은탁이란 이름을 주셨대요. 다음 작품 주인공으로 쓰셨다는데 좀 만화같아요. 만화같이 나온 사진을 갖고 가셨나봐요. 아직 이름 값을 못해서 안불러 주시는 건지.(웃음) 이젠 이름 값 잘 할테니 불러주셨으면 좋겠어요. 제가 '미안하다 사랑한다'를 정말 좋아해요. 데뷔 전에 봤던 드라마인데, 아직까지 항상 제 머리에 많은 장면들이 남아있죠. 작가님과 작품으로 꼭 만나뵙고 싶네요." |
[뉴스핌 Newspim] 양진영 기자 (jyyang@newspim.com)·이형석 기자(leehs@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