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저널 그날` 광복 70년 신년기획 [사진=KBS 1TV `역사저널 그날` 제공] |
3일 오후 방송되는 KBS 1TV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임진왜란 이후 조선에서 일본인의 출입이 허락되었던 유일한 곳, 초량왜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초량왜관은 1678년 조선과일본의 외교와 무역을 위해 새롭게 건설됐다. '역사저널 그날'은 일본과의 교섭창구로 만들어졌지만 일본의 조선 첩보기관으로 이용된 초량왜관의 두 얼굴을 조명한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 정부는 일본인들이 머무는 공간을 왜관으로 제한해, 조선에 건너오는 일본인들을 통제하려 했다. 하지만 일본은 역으로 왜관을 조선의 기밀 정보를 입수하는 첩보기관으로 이용했다. 조선의 주요 수출품인 인삼의 생뿌리는 물론, 조선의 민감한 정세를 기록한 기밀 서적들도 왜관을 통해 일본으로 유출됐다고.
또 초량왜관에서는 매일같이 조선인과 일본인 사이에 무역시장이 열렸다. 양산, 접부채, 모기장, 일본도 등 일본 상품들은 고가의 사치품으로 조선인 사이에서 인기를 끌었다. 말과 문화가 다른 두 민족이 한 공간에서 만난만큼 활발한 문화 교류도 이어졌다.
조선과 일본, 양국의 다양한 상품이 오가던 초량왜관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이 한 가지 있었다는데, 바로 ‘여인’이었다. 엄격한 성리학 국가였던 조선은 왜관에 여인이 출입하는 것을 철저하게 금했기 때문. 하지만 1690년 이명원이란 조선인이 자신의 처와 딸, 여동생을 남장시켜 초량왜관에 들여보낸 사건이 발각됐다. 사건에 관계된 조선인들은 모두 극형을 받고, 그중 5명은 왜관 밖에서 효시됐다.
하지만 이후에도 조선인 여인과 일본인 남성의 교간 사건은 끊이지 않았다고. 결국 1711년, 조선과 일본은 교간에 대한 처벌을 규정한 신묘약조를 맺는다. 금녀의 공간, 왜관에서 벌어진 교간사건의 전말을 따라가 본다.
1872년 일본은 군대를 보내 초량왜관을 무력으로 침탈한다. 그리고 4년 후, 조선 최초의 불평등조약인 강화도조약 체결 후 초량왜관은 200년 역사의 막을 내린다.
임진왜란 이후 조·일 우호와 평화의 상징이었던 초량왜관을 통해 한·일 공존의 미래를 모색하는 KBS 1TV '역사저널 그날'은 3일 밤 9시40분 방송한다.
[뉴스핌 Newspim] 장윤원 기자 (yunwon@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