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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부 한강의 기적, 대한민국을 만들다
-민주주의를 쟁취하다 1
1945년 8월, 광복을 맞은 기쁨도 잠시, 우리는 얼마 안 가 6·25전쟁을 맞게 된다. 국토는 완전히 쑥밭이 되었고, 정치사회적으로는 극심한 혼란상태가 이어졌다. 정치가 바로서지를 못해 부정과 부패가 만연했으며 국가기강이 문란했다. 당시의 우리 젊은이들은 한시바삐 나라다운 나라가 이 땅에 세워지기를 갈망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1961년 4·19일을 기해 바른 정치의 실현을 요구하며 분연히 일어섰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피를 흘리고 쓰러졌다. 그러나 상황은 크게 나아지지를 않았다.
이러한 혼란을 틈타 군부가 현실정치에 뛰어들었다. 당시 그들은 상대적으로 교육을 많이 받은 엘리트집단이었다. 실제로 그들은 나라의 질서를 바로 세우고 경제발전을 이루는데 상당한 기여를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독재정치로 흘러갔다. 결국 장기집권을 뒷받침하는 유신체제가 등장했다. 그리고 정권유지를 위한 긴급조치가 수차례에 걸쳐 발동되면서 인권유린이 이어졌다. 그러나 대학생을 중심으로 한 우리 젊은이들은 이에 끈질기게 항거했다.
그들에게는 나라를 위한 일이라면 자신의 희생은 커다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 땅에 민주주의를 뿌리내리기위한 일이라면 언제든지 자신을 던질 각오가 되어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후손들에게 떳떳하고 싶었다. 자신들은 그러지를 못했지만 다음세대들만은 버젓한 나라에서 자긍심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해 주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나라가 경제발전뿐만 아니라 정치발전도 동시에 이루어져야만 한다는 신념에 차있었던 것이다.
1979년 10월 26일, 국가원수가 시해되는 참담한 일 즉 10.26사태가 벌어진다. 그 결과 유신과 긴급조치의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 무렵 전국 방방곡곡에서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열망이 분출되었으며 연이어 시위가 벌어졌다. 이러한 사회적 현상을 두고 ‘서울의 봄’이라고 불렀다. 이는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있었던 민주화운동을 지칭하는 ‘프라하의 봄’에 빗댄 말이기도 하다.
정녕 우리에게도 봄은 왔는가? 국민들은 희망에 들떠 있었다. 따뜻한 봄이 왔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 모두가 일시적 환상이고 신기루에 지나지 않았다. 서울의 봄은 너무나 짧았다. 모든 것이 꽁꽁 얼어붙었던 겨울공화국은 그 이후 신군부 세력들이 집권하면서 약 10년 동안 더 지속되었다.
여기저기서 그동안 억눌렸던 정치적 욕구가 분출되고 있는 동안, 12․12사태로 권력을 장악한 신군부세력들은 별도의 비밀작업을 하고 있었다. 국회를 해산하고 국가비상사태 하에서 국정을 보좌하는 기관인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를 새로이 설치한다는 구상이었다. 그들은 이 구상을 착실히 실행에 옮겨 나갔다.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 되었다. 연이어 민주화를 열망하며 시위를 벌였던 광주시민들이 무참하게 학살되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인해 수많은 생명이 꽃잎처럼 떨어지던 순간, 우리 모두는 절규하였다. 총칼로 무장한 신군부 세력에 의해 민주세력의 함성은 무참히 짓밟힌다. 5․18은 우리 민족의 커다란 상처이고 아픔이다. 6․25 이후 같은 민족에게 총부리를 겨눈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그리하여 서울의 봄은 비극적인 막을 내리게 된다. 되돌아보면 우리는 정말 살얼음판을 걷는 그런 아찔한 순간을 살아왔다.
(민주주의를 쟁취하다 2에 계속)
*저자 이철환 프로필
-재정경제부 금융정보분석원장
-한국거래소 시장감시위원장
-현 하나금융경영연구소 초빙위원
-현 단국대 경제학과 겸임교수(재직)
*저서- 과천청사 불빛은 꺼지지 않는다, 한국경제의 선택, 14일간의 경제여행, 14일간의 (글로벌)금융여행 등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