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을 설치고 출근한 다음 날의 피로와 거래 실수. 박살 나는 구좌들. 피곤과 부담, 압박의 누적. 또 설치는 잠. 그런 와중에 동료들과 함께 하는 술자리. 매일 그런 건 아니지만 이런 식으로 쌓인 피로의 연속. 아내는 아내대로, 나는 나대로 이런 피로 속에서 줄곧 견뎌온 것이었다.
물론 이런 것들은 그다지 심각한 것은 아니었다. 틈틈이 피로를 풀어나가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서로에 대한 신뢰와 애정, 삶과 미래를 향한 아픈 몸부림들, 그리고 가족이라고 하는 알 수 없는 힘을 가진 맹신과도 같은 흡인력, 한번도 의심한 적도 부정한 적도 없는 기이한 일체감, 허리가 끊기도록 힘들어도 피하고 싶지 않은, 오히려 그 안으로 저벅저벅 들어가고 싶게 하는 숭고한 당김, 신성하다고까지 할 수 있는 그 무엇에 의해 절로 녹아버리곤 했다. 그러면서도 순간순간 솟구치는 짜증들.
“집이 아니라, 회사야 회사! 회사보다도 더해!”
내 입에서 이런 말이 튀어나올 때도 어떤 심각함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럴 때면 아내는, “나도 그러고 싶어 그러는 줄 알아?”라며 곧바로 되받아쳤다.
이런 일도 있었다. 퇴근 후 귀가해 소파에 누워 책을 보는데, 텔레비전 소리가 거슬렸다. 아내는 설거지를 하고 있었고 텔레비전을 귀로 듣고 있었다. 사실 우리 집엔 텔레비전이 켜 있는 시간이 많다. 거의 항상 켜 있다. 객장 소음에 지쳐 집에서만큼은 조용히 있고 싶은 나로선 불만이었다. 텔레비전 좀 끄라고 몇 번 얘기했지만 아내는 설거지 중에도 마음은 그리로 쏠려 있는지 끄지 않았다.
내가 껐지만 아내는 도로 켰다. 그리 중요한 내용도 아니었다. 뻔한 스토리의 멜로드라마였다. 아무리 해도 안 돼 내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문을 꽝 닫고. 책에 집중할수록 소음은 더 크게 들렸다. 참고 있다가, 책과 신문지 몇 장을 주섬주섬 들고 복도로 나왔다. 홧김에 겉옷도 안입고 입고 있던 러닝 차림 그대로. 들고 나온 신문지를, 컴컴한 아파트 복도, 전등 아래 깔고 그 위에 앉았다. 옆집 사람들이 지나가도 모른척, 책에 눈을 박았다.
책이 읽히는 것도 아니었다. 책은 계속 읽고 싶은데, 읽을 곳이 없었다. 그냥 책에 눈을 박고 있었다. 그러니 얼마나 우스꽝스럽겠는가. 멀쩡해 보이던 직장인이 캄캄한 아파트 복도에 신문지를 깔고 앉아, 희미한 전등 아래 러닝 차림으로 책을 보고 있으니! 아내는 이웃에 창피하니까 들어오라고 소리 지르면서도 텔레비전은 끄지 않았다.
예전 같으면 텔레비전을 끄든가, 미소를 지으며 복도로 나와 내 손을 잡고 들어가든가, 내가 고집을 피우면 자기도 신문지 위에 앉아 있겠다고 버티든가 했을텐데, 그러지 않았다. 텔레비전을 듣지도 못하고 있을 것이다. 아이들 칭얼거리는 소리. 싱크대 물소리.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 식기를 닦으며 부지런히 움직여야 하는 손. 나에 대한 신경.....
이런 에피소드들은 얼마든지 있다. 내면에서는 절박한 것들이 행동으로 나오면 괴상하게 보이는 일들이 내게 점점 늘어갔다. 내가 운전을 할 때 옆 좌석에서 아내가 잔소리가 심해지면 악셀레이터를 더 세게 밟고 한손으로만 핸들을 돌리며 앞 차들을 추월하면서 지그재그로 달려나간 적도 있다.
아내가 운전 중일 때 말다툼이 벌어지면, 달리는 차에서 문을 열고 그냥 내려버린 날도 있다. 차속이 십 내지 이십 킬로가 되는 적당한 때를 기다리긴 했지만. 차도에 발을 딛는 순간 뒤로 심하게 밀리며 넘어질 듯했지만 몇 번 하다 보니 중심 잡는 일을 터득하게 되었고 뒤에서 달려오는 차에 치이는 일은 용케 한 번도 없었다.
스트레스가 커지고-그까짓 스트레스쯤이야 얼마든지 견딜 수 있지만 견디기 어려운 것은 먹고 살기 위해 하고 있는 일의 치욕스러움이었다. 내면 속에 꽉꽉 차오르는 강렬함들이 절망의 솥뚜껑에 눌려버릴 때마다 내 기괴한 행동들은 도가 심해졌고 그런 것을 통해 야릇한 쾌감이 느껴지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