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롭다. 송곳 끝같이 외롭다.
글은 나를 밝혀주는 척하며 가로막는다. 이 따위 글나부랭이가 무슨 소용인가. 글보다는 시원스런 잠실 야구운동장을 좋아하는 아내. 상대가 바라는 그것에 초점을 맞추지 못하는 사랑의 과잉은 폭력이며 파시즘일뿐.
성격차이이며 악연이라고까지 아내가 말한 적이 있다. 충청도와 경상도의 문화차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해보려 한 적도 있다며 비참한 웃음을 지은 적도 있다. 내게 바라는 건 회사 열심히 다니고, 집에서 웃고, 생기 있게 사는 게 다라고 그 소박성을 절망적인 빛으로 얘기한 적도 있다. 자기가 원하는 건 배려, 격려라고 단 두 단어로 압축해 말한 적도 있다. 우리 둘을 잘 아는 혁은, 둘 다 좋은 사람인데 물과 기름 같은 관계라고 하기도 했다.
“현주가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후부터 줄곧, 울면서 저에게 전화했어요....”
언제부터, 도대체 언제부터, 매캐한 유황 냄새 가득한 폐광이 아내 가슴속에 가설되기 시작했을까. 혹시 우리가 연애할 때 나눈 그 몇 마디 대화가 균열의 시초였을까. 아니었을까.
아카시아 향기 진동하는 초여름이었다. 작약도에서 돌아온 몇 달 후였을 것이다. 대학로에서 영화를 같이 보고 시원한 바람 속을 걸어나갔다. 스물셋의 한창 물오른 그녀에겐 싱그런 포플러 향기가 났다. 민다나오에서 돌아와 기자 시험을 준비하고 있던 나 역시 패기가 넘쳐 있던 때라 우리 둘 사이가 잘 어울린다는 말을 듣곤 했다.
그녀는 나와의 결혼을 은근히 꿈꾸는 듯했고, 나는 그녀를 좋아하면서도 미래 개척과 사랑을 동시에 품어야 하는 다소 복잡한 감정을 겪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와 가까워질수록, 나에 대해 잘 모르면서 아낌없이 사랑을 베풀어주는 이 순진한 처녀에게 뭔가 잘못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자책이 들어 고민 끝에 말을 하고야 말았다.
“현주야. 너한테 할 말이 있어”
“뭔데, 오빠 과거 있어?”
“응....너 이전에 두 명의 여자를 사랑했어. 한 여자는 대학 첫미팅에서 만난 여잔데 너무 순수하게 사랑해서 손 한번 제대로 잡지 못했어. 두번째 여자는....같이 잤어”
현주는 하~ 하며 웃었다.
“내가 오빠를 이렇게 좋아하는데 어떻게 하란 말야. 괜찮아”
웃는 얼굴을 살짝 돌리는 저쪽 까페 유리면에, 굳어지는 표정이 언뜻 비쳤다.
나는 말 못할 감동에 빠졌다. 뜻밖에도 의연하고 관용적인 그녀의 반응에 며칠 내내 고민하던 마음의 굴레가 한꺼번에 풀리며 푸근한 포용의 바다에 빠져들고 말았다.
그 일에 대해 아내는 지금껏 추궁 한번 한 적이 없다. 다만 그날 이후 며칠이 지났을 때 이런 의미심장한 말 한마디를 내게 던졌을 뿐이었다.
“오빠하고 같이 잤다는 두 번째 여자한테보다도, 오빠가 정말 순수하게 사랑해서 손도 제대로 못 잡아봤다는 그 여자에게 질투가 느껴졌어”
그 말이 내 가슴에 던진 애잔한 여운은 세월이 흐른 지금도 내 마음에 선연한 파문을 드리운다. 내가 세상 물정을 너무 모르고 괜한 소리를 했다는 자책과 더불어. 내 마음 속의 불편한 이끼를 거둬내려고 나를 믿고 모든 것을 던지는 여자에게 너무 가혹한 짐을 안겨주었으므로. 그것도 진실의 이름으로. 진실이란 허영으로 인해 그녀의 장밋빛 희망에 잿빛 소금을 뿌렸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