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企·쪽방촌 살피며 '총리형 총재' 행보
[뉴스핌=김선엽 기자] 김중수 한국은행 총재의 행보가 예사롭지 않다. 지방 곳곳의 중소기업을 방문하더니 최근에는 서울 쪽방촌과 홈리스센터를 찾기도 했다.
정부와의 공조도 긴밀하다. 기획재정부와 한은, 두 기관은 경기회복에 대한 긍정적 판단을 공유하는 가운데, 지난 10월에는 공동으로 외환시장에 개입하기도 했다. 2008년 이후 5년 만의 일이다.
특히 최근 정홍원 국무총리가 KTX 파업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어, 다음 개각에서 김중수 총재가 하나의 선택지가 될 가능성이 엿보인다. MB정부 시절의 인사에 대한 사정의 칼날이 날카롭지만, 김 총재의 끈질긴 정치적 생존력을 고려하면 다음 개각에서 다시 무겁게 쓰일 가능성도 남아 있다.
이와 함께 최근 통화정책 관련 발언을 꾸준히 내놓고 있는 현오석 경제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이 통화정책 전문가로 변신하는 것 아니냐는 전망도 관측된다.
기재부와 한은이 서로 수장을 맞바꾸기라도 하려는 것일까. 두 경제수장이 최근 서로의 영역을 거리낌 없이 넘나들고 있다. <그래픽=송유미 미술기자> |
◆ '코드맞추기'와 '줄다리기'…오락가락했던 총재의 1년
박근혜 대통령과 김 총재의 관계는 좋지 않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지난 2011년 국회 기재위에서 가계부채 문제를 놓고 설전을 펼친데다가 총재가 'MB맨'이란 점 때문이다. 또 기준금리 인하를 두고 한은이 정부와 팽팽하게 맞섰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김 총재는 현 정부와의 코드맞추기를 포기하지 않아 왔다. 박 대통령 당선 직후 열린 중소기업인 신년인사회 참석이 그 시작이다.
당시 박 당선인이 직접 참석해 경제민주화와 중소기업 육성을 강조할 예정이었으나 인수위원회 인선 등의 일정이 겹치면서 불참했다.
중기중앙회 신년회 자리에 한은 총재가 참석한 것도 의외지만 특별히 발언 기회가 주어지지도 않은 모임에 김 총재가 얼굴을 비춘 것도 드문 일이다.
한은 김중수 총재(왼쪽 네번째)가 지난 1월 4일 서울 여의도 중소기업중앙회에서 열린 중소기업인 신년인사회에서 참석자들과 건배를 하고 있다. <사진=김학선 기자> |
4월 금통위를 앞두고는 정부 측 인사들과 회동을 가져 눈길을 끌었다. 이 모임에는 조원동 경제수석과 박 대통령의 당선인 시절 비서실장을 맡았던 유일호 새누리당 국회의원, 박병원 은행연합회장 등이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어떤 대화가 오고 갔는지는 전혀 알려지지 않지만, 이후 기준금리를 놓고 정부와 한은 간의 줄다리기가 지속됐다. 금리인하의 압박 속에서 한은 금통위는 4월 기준금리를 동결하는 대신 ‘창조형 중소기업 대상 총액한도대출’을 신설했고 결국 5월 기준금리를 내렸다.
이후 한은의 '통화정책방향'에는 미묘한 변화가 생겼다. "기준금리 인하 및 추가경정예산을 포함한 정부 경제정책의 효과를 점검한다"는 문구가 8개월째 빠지지 않는 것이다. 지난해 두 번이나 기준금리를 내렸을 때도 등장하지 않던 문장이다.
또 지난 7월에는 부장급 직원을 두 단계 위인 부총재보로 임명하기도 했다. 한은 역사상 첫 여성임원을 배출시켜 조직혁신을 도모한 것이지만, 한편으론 여성대통령과의 지나친 코드맞추기가 아니냐는 비판을 낳았다.
◆ 전국 누비며 실물경제 살피는 '총리형 총재'
올해 김 총재의 행보는 실물경제를 살피는 '총리형 총재'에 가까웠다. 지난 4월에는 1박2일의 일정으로 대전지역 중소기업 두 곳을 시찰했다. 한은의 총액한도대출에 대한 일종의 실사가 명분이었다.
한은 관계자는 "총재가 산업현장을 방문하는 것은 사실상 처음일 것"이라며 "전임 총재는 지역본부장 회의에 참석하는 일도 드물었다"고 말했다.
김중수 한은 총재가 4월 26일 대전광역시 중소기업 엔씨디를 방문해 내부시설과 장비 등에 대해 설명을 듣고 있다. <사진=김학선 기자> |
12월 18일 김 총재가 연말을 맞아 서울 영등포구 영등포 역전 쪽방촌을 둘러보고 있다. <사진=뉴시스> |
골든북은 16개 한국은행 지역본부가 지역 내 업체 등을 대상으로 실시한 모니터링 결과를 집계한 것으로 이를 받아 본 우근민 제주도지사와 박맹우 울산시장이 김 총재에게 직접 감사편지를 써 보냈고 최문순 강원도지사는 직원을 보내 한은 본관으로 옥수수를 배달시키기도 했다.
김 총재의 총리스타일 행보는 최근 더욱 두드러진다. 이달 13일에는 부산에 위치한 두 중소기업을 방문, "지역사회가 창의와 혁신을 통해 새로운 가치를 창조할 수 있도록 한은 지역본부가 적극 뒷받침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당시 한은은 예정에 없던 보도자료까지 추가하며 이를 알렸다.
이어 18일에는 영등포의 쪽방촌과 홈리스센터를 방문해 눈길을 끌었다. 또 20일 열린 금융협의회에서는 "내년 새해는 세계 경제가 새로운 패러다임에 들어온 해가 될 것"이라며 "이런 외적인 변화가 한국 경제에는 오히려 기회가 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문제에 대처해나가야 한다"며 미래 국가비전을 제시하기도 했다.
바쁜 '내치(內治)' 때문일까. 빈번했던 해외출장도 11월 12일 스위스에서 귀국한 이후 뚝 끊겼다.
◆ 청와대 간담회에 초대받지 못한 김 총재
한편 지난 20일 박 대통령이 금융인 34명을 청와대로 불러 오찬 간담회를 갖은 자리에 김 총재는 초대를 받지 못했다. 현 부총리, 신제윤 금융위원장, 최수현 금융감독원장 등 금융정책 당국자들이 대거 참석했는데 김 총재만 제외됐다.
박 대통령과 김 총재의 관계가 가깝지 않은데다가 증권사와 자산운용사 등 민간업계 대표들까지 두루 참석한 모임이었던 것을 고려하면 한은 총재의 불참에 대해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청와대 역시 "업계 얘기를 듣는 자리라 한은 총재는 부르지 않았다"고 입장을 밝혔다.
곰탕회동의 힘일까. 6월 이후 기재부와 한은이 불협화음 없이 찰떡궁합을 과시하고 있다. 경기회복에 대한 긍정적 판단을 공유하는 가운데 지난 10월에는 두 기관이 공동으로 외환시장에 개입하기도 했다. 사진은 지난 6월 4일 현 경제부총리와 김 총재가 서울 중구 명동의 하동관에서 조찬 회동을 갖는 모습. <사진=김학선 기자> |
흥미로운 점은 김 총재가 직원을 시켜 이번 모임의 초대명단에 자신이 빠진 이유를 알아보도록 지시했다는 루머가 흘러나왔고 한 언론이 지면을 통해 이를 보도한 것이다.
기대가 없으면 실망도 없기 마련이다. 만약 이 루머가 사실이라면 차기 자리에 대한 김 총재의 기대가 일방적인 것만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이에 김영삼 정부 시절 청와대 경제비서관을 역임하고 이명박 정부에서 초대 청와대 경제수석을 지낸 김 총재가 'MB맨'이란 꼬리표를 벗어 던지고 박근혜정부에서 다시 한 번 중용될지 관심이 집중된다.
또 현 정부에서 개각설이 나돌 때마다 1순위로 이름이 거론되는 현 부총리가 김 총재의 자리를 대신할 것인가도 지켜볼 대목이다.
[뉴스핌 Newspim] 김선엽 기자 (sunup@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