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핌=김윤경 국제전문기자] 어린 시절 즐겨 본 TV 드라마 '하버드의 공부벌레들(The Paper Chase)'. 어른들은 "공부 잘 하면 하버드 가야지"라는 말로 세계 최고의 대학이 미국의 하버드 대학임을 주지시켰고 나도 하버드에 가보고 싶다는 '푸른 꿈(!)'을 키우기도 했다.
우리의 이런 `1등주의` 사고는 한 영화배우의 잘생긴 아들이 케네디 전 대통령이 나왔다는 학교를 거쳐 하버드를 '수석 졸업'했다는 언론의 호들갑스러운 오보로 확인되기도 했다. 그 주인공이 후에 하버드대엔 '수석 졸업'이란 없으며 자신은 성적이 상위 10% 내에 드는 것으로 졸업한 '최우수 졸업(summa cum laude)'을 한 것이라고 해명을 했고, 유학이 보편화되며 '모든 분야에서 1등'인 대학도 없다는 걸 알게 됐지만 우리 안의 줄 세우기식 사고가 쉽게 없어지지는 않고 있는 것 같다.
해마다 미국 내 대학의 순위를 매겨 발표하고 있는 U.S.월드& 리포트의 홈페이지. |
지난주에 여기서 내년 대학 지원을 위한 순위가 발표됐다.
우리 안에서 오랜 1등 학교인 하버드대는 종합 순위에서 2위를 기록했다. 1위는 프린스턴대였다. 예상대로 국내 많은 언론은 "프린스턴이 하버드를 제쳤다"식의 제목으로 기사를 썼다. 3위는 예일대. 인문과학대학(Libeal Arts Colleges)만을 기준으로 삼을 때엔 윌리엄스대가 1등이었다.
그러나 흥미로운 건 미국인들도 신성시했던 이 순위표 말고 다른 것을 훔쳐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불황이 계속되고 학자금 대출 부담이 커지고 있는 상황에선 어떤 대학을 졸업해야 직장에 들어갔을 때 연봉을 많이 받는 지를 따져보게 되는 것. 이런 것만 따로 알려주는 곳도 있다. 페이스케일(www.Paysacle.com)이 그런 곳이다. 페이스케일에서 이번 주에 대학 순위를 발표했는데 이건 전적으로 졸업 후 수입이나 취업률 등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페이스케일(Payscale)에선 취업률, 취업 후 연봉 등을 기준으로 미국 대학의 순위를 내 발표하고 있다. |
인문과학대학의 경우가 특히 심한데, 힐러리 클린턴 등이 나온 명문 여대 웰슬리대는 U.S.뉴스 인문대학 순위에선 7위지만 페이스케일에선 304위로 뚝 떨어진다. U.S. 뉴스 인문과학대학 25위인 오벌린 역시 페이스케일 순위에선 218위에 불과하다. U.S. 뉴스 지역대학 순위에서 1위인 엘론대도 페이스케일에선 587위를 차지할 정도니 격차가 상당히 심하다.
뉴욕타임스(NYT)는 여기엔 성별 차이(Gender gap)가 작용하며, 공과대학 졸업자들이 다른 분야에 비해 돈을 더 많이 버는 현실이 배경이 되고 있다고 15일(현지시간) 분석했다. 캘리포니아 공과대학(Caltech)이 U.S. 뉴스에선 10위지만 페이스케일에선 3위이고, 로즈-헐먼 기술대의 경우 U.S. 뉴스에선 순위에조차 들지 않지만 페이스케일에선 20위를 차지한 것이 이런 면을 잘 보여준다.
미국 역시 우리나라와 크게 다르지 않은 모양이다. "취업이나 높은 연봉도 중요하지만 그것 자체가 대학 진학과 학습의 목적이 되어선 안된다"는 말을 하면 시대착오적이 되는 상황 말이다. 미 연방 정부도 재정 지원의 조건을 따질 때 졸업생들의 연봉을 중요시하고 있다.
U.S. 뉴스측은 "사람들이 대학을 다니며 많게는 24만달러에 이르는 돈을 투자해야만 하는데 졸업 후 얼마나 연봉을 받을 수 있는 지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것도 어불성설"이라면서도 "그러나 과학자와 기술자를 만들어 높은 연봉을 받게 해주는 학교라고 미국 내에서 가장 좋은 학교라고 할 수 있진 않다"고 했다. 사립대학교협의회(The Council of Independent Colleges)의 리처드 에크만 대표도 "수입(Income)이라는 데이터가 유용한 지표이긴 하지만 이 자체가 (대학 경쟁력에 대한)변별력을 갖고 있진 않다"고 지적했다.
(출처=CNN머니) |
몇 년 전 대학 자체가 시장 논리로 살아남지 못하면 안된다며 "학생들이 대학의 주인이 아니다"란 발언으로 물의를 일으킨 적이 있었던 국내 한 대학 이사장이 이번엔 "교수평가해서 3년 연속 최하위를 기록하면 연구실을 뺏겠다"고 해서 화제다.
대기업 그룹 오너 일원이며 계열사 회장이기도 한 이 이사장은 2년 전 "학생이 학교에 대해 과도한 주인의식을 갖는 것이 문제고, 대학은 기업같은 방식으로 운영되어야 세계적인 명문대학으로 발돋움할 수 있다"고 한 일간지 칼럼을 통해 목소리를 높여 논란을 일으켰던 주인공이다.
하지만 이 주장은 위험하다. 대학이 경제 논리를 무시한 채 경영되어서야 안되겠지만 기업마냥 이윤창출이나 오너의 입맛에 맞게 운영되어서도 안 될 일이다. 그러나 이 대학은 마치 계열사를 통폐합하듯 '실용성'과 '취업' 등을 최고의 가치로 삼아 학과를 통폐합하는 '만행'을 자행했고, 모든 학생들이 재무제표쯤은 읽을 수 있어야 한다며 회계학을 전공필수로 지정해 버렸다. 아울러 학생들의 학내 집회와 시위를 불법화하는 교칙까지 만들었다.
그리고 이제는 총장을 뽑을 수 있다며 권리를 주장하고 있는 교수들의 힘을 꺾어버리기 위한 의도인지 "평가성적이 저조한 경우 정년 보장(테뉴어)과는 상관없이 내년 1학기부터는 3년 연속 최하위 등급을 받으면 연구실을 몰수하고 대학원 강의를 제한하는 조치를 하겠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틈만 나면 학교에 적을 둔 채 정치권을 기웃거린다든지 새로운 학문 연구와 개발에 힘쓰지 않고 자리 보전에만 급급하며 특권의식을 드러내려는 교수들도 분명히 있다. 그런 이들이라면 이런 구조조정의 대상이 되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실력으로 평가해 정년을 보장한 교수에게까지 모두 싸잡아 기업 논리의 칼날을 겨눈다는 것에 대해선 어리둥절해 진다. 등급은 또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비즈니스 성과? 발표된 논문의 수?
일본 교토대(京都大)는 몇 년간 논문 하나 내지 않고 연구에 몰두해도 그것을 포용해 주는 여유와 존중의 문화가 있기에 도쿄대에 비해서도 노벨상 수상자를 많이 배출할 수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지난해 노벨 생리학상을 야마나카 신야(山中伸弥) 교토대 교수가 받자 아사히 신문은 "포용력이 큰 사람과 장소가 있어야만 독창적인 발견도 생긴다"며 교토대 특유의 자유로운 발상과 포용력에 대해 찬사한 바 있다.
요즘은 기업조차 그래야 발전한다고 한다. 채찍질만 하고 당장의 성과에만 집착한다고 이윤이 창출되는 것이 아니며 창조적 열정을 가진 개인들을 키우는 기업 문화가 필요하다는 건 경영학 교과서에도 나오는 얘기다. '시장논리로 평가한다'는 말이 성경 잠언도 아니다. 신자유주의식의 '시장'이란 잣대도 유효하지 않다. 예외를 인정하지 않는 것 또한 시장의 논리는 아닐 것이다.
[뉴스핌 Newspim] 김윤경 국제전문기자 (s914@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