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뉴스핌 황숙혜 특파원] ‘양적완화(QE) 축소는 사전에 시한을 정할 문제가 아니다.’
벤 버냉키 연방준비제도(Fed) 의장이 17일 하원 반기 통화정책 보고에 앞서 공개한 연설문에서 밝힌 입장이다.
지난 6월19일 통화정책회의 때 연내 QE 축소와 내년 중반 종료 계획을 밝힌 것과는 발언 수위가 크게 달라졌다.
경제 지표가 연준의 기대만큼 개선돼야 한다는 전제 조건을 달았지만 불과 1개월 전 발언에서는 비전통적인 통화정책의 속도를 조절하는 데 강한 의지가 엿보였다. 하지만 이날 의회 발언에서는 한 발 후퇴한 모습을 보였다.
그는 또 고용 지표와 점진적인 수준에 그치는 경기 회복, 여기에 연준이 목표 수준에 미달하는 인플레이션 등을 감안할 때 기존의 부양적 정책 기조가 당분간 적절하다는 말로 월 850억달러의 자산 매입을 가까운 시일 안에 축소하지 않을 뜻을 분명히 밝혔다.
◆ 무엇이 버냉키의 발목을 잡았나
임기 만료 후 연준 의장직에서 물러날 것으로 확실시되는 버냉키 의장은 지난 5월 하순 이후 본인이 주도한 비전통적인 통화정책을 마무리하려는 뜻을 내비쳤다.
보다 뚜렷해지는 경기 회복 신호와 한계 수위의 연준 대차대조표, 추가적인 부양책의 제한적인 효과, 여기에 글로벌 자산 버블까지 QE 종료를 저울질해야 하는 이유가 꼬리를 물고 있지만 본인이 시작한 일에 유종의 미를 거두겠다는 속내도 함께 작용했다는 것이 투자자들의 판단이다.
하지만 이번 의회 증언으로 버냉키 의장은 빼들었던 칼을 도로 집어넣은 셈이다. 그의 발목을 잡은 것은 무엇일까.
시장 전문가들은 무엇보다 국채 수익률 급등에서 이유는 찾는다. 5월22일 버냉키 의장이 자산 매입 축소 의사를 처음 밝히기 이전 1.6% 내외에서 거래됐던 10년물 국채 수익률은 이후 1개월 사이 2.7%까지 가파르게 치솟았다.
월가에서는 연준이 실제 QE 축소에 나설 경우 국채 수익률이 4%까지 내달릴 것이라는 전망이 고개를 들었다.
국채 수익률과 함께 모기지 금리가 가파르게 오르면서 회복 기조를 보이는 주택시장에 연준이 찬물을 끼얹을 것이라는 우려가 꼬리를 물었다.
이머징마켓의 급격한 자금 유출과 이에 따른 통화 가치 급락 등 해외 자산시장의 혼란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미국 시장금리 급등이 버냉키 의장의 손발을 묶었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월가 투자자들은 입을 모으고 있다.
바클레이스의 마이클 가펜 이코노미스트는 “연준의 이중적인 메시지가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라며 “매파에서 비둘기파로 입장이 돌변한 것은 최근 시장금리 상승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메리디언 에퀴티 파트너스의 조 그레코 매니징 디렉터 역시 “연준의 목표는 10년물 국채 수익률을 2.5% 선에서 유지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 꼬인 '커뮤니케이션' 어떻게 풀어낼까
버냉키 의장이 QE 축소 가능성을 처음 언급한 이후 지속적으로 강조하는 사실은 이른바 ‘테이퍼링’이 곧 긴축은 아니라는 것이다.
일부 투자자들도 연준이 자산 매입 규모를 월 850억달러에서 650억달러로 줄인다 해도 여전히 부양책을 지속하는 것이라는 데 동의한다.
하지만 미국 국채시장을 필두로 글로벌 자산시장의 움직임에서는 이를 인정한다는 것을 확인하기 어려웠다.
미국 국채 수익률 상승 뿐 아니라 이머징마켓의 자금 유출은 연준이 유동성을 본격적으로 걷어들이는 긴축을 겨냥한 행보였다.
당장 긴축이 아니라는 점을 인정하더라도 다른 이들이 팔기 전에 먼저 발을 빼겠다는 것이 시장의 속내다.
연준의 궁극적인 목표는 금융시장의 교란 없이 전례 없는 통화정책을 종료하는 데 있다. 버냉키 의장은 투명한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이를 현실화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으나 시장은 그의 계산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도이체자산운용의 존 핀만 글로벌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버냉키 의장은 점진적인 QE 축소가 결코 긴축이 아니라는 사실을 시장에 설득하고 싶어 한다”며 “사실 QE 축소를 긴축으로 볼 수 없지만 이를 인정하더라도 투자자들의 베팅은 이와 다른 모습”이라고 말했다.
도이체방크의 안수 자인 부회장은 “투자자 입장에서 연준이 모기지 시장을 포함한 금융시장의 변동성을 자극하지 않고 점진적이고 매끄러운 행보를 취하려고 하는 점은 다행스러운 일”이라며 “연준은 처음부터 통화정책과 국채 매입이 동일하지 않다는 것을 시장에 이해시키려고 했지만 시장은 연준이 의도한 대로 움직이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 버블과 금리 상승, 딜레마 빠진 연준
연준은 극단적인 팽창적 통화정책이 자산시장의 과도한 리스크 트레이딩을 초래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이날 하원에 제시한 보고서에서 연준은 미국의 통화정책이 지나친 레버리지를 포함해 일정 부분 투자자들의 투기적 거래를 야기했다고 밝혔다.
실제로 5월 하순 버냉키 의장의 자산 매입 축소 언급 이후 이머징마켓과 정크본드 시장의 자금 유출에서 가격 상승이 상당 부분 버블이었다는 사실이 확인된 셈이다.
연준이 QE를 지속할 것이라는 확신할 경우 투자자들은 위험자산의 ‘사자’에 나설 공산이 크다. 자산 버블이 몸집을 불릴 것이라는 얘기다.
반면 QE를 축소할 것이라는 데 공감대가 형성될 때 최근 벌어진 시장 혼란이 더욱 악화될 수 있고, 미국 국채 금리 상승에 따른 회복 둔화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연준이 외줄타기를 하고 있다는 주장과 딜레마에 빠졌다는 투자가들의 지적은 이 같은 실상을 의미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뉴스핌 Newspim] 황숙혜 기자 (higrace@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