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핌=김사헌 기자] 워싱턴과 월가가 연말로 다가온 '재정절벽(Fiscal Cliff)' 협상 방안을 놓고 줄다리기하는 가운데, 또다른 대형 '절벽'이 다가오고 있어 주목된다.
미국 금융시장에 충격을 줄 수 있는 이 두 번째 '절벽'은 바로 연방예금보험공사(FDIC)가 위기 때 도입한 무제한 거래계좌 무제한 보증 프로그램(Transaction Account Gurantee(TAG) program)이다.
2008년 위기가 절정에 달할 때 한시적으로 도입된 이 제도는 올해 연말 종료된다. 경우에 따라서는 대규모 자금이 인출되면서 안전자산으로 이동, 일부 중소은행들이 무너질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금융정책 당국자나 은행, 기업 재무팀 관계자들이 아니면 잘 들어보지 못한 'TAG'는 사실 기업 구제금융 만큼이나 중요하지만 일반인들은 잘 모른다. 원래 FDIC는 이 제도를 도입하기 전에는 은행 예금에 대해서는 구분없이 25만 달러까지만 원금 이자를 보장했다. 기업이나 개인이나 이 이상으로 예금을 보유하고 있을 경우 해당 은행이 망하면 보장금액 이상의 예금을 날리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TAG'가 도입되면서 FDIC는 무이자 거래계좌에 대해서는 액수를 '무제한'으로 예금보험을 적용했다.
이 같은 임시 조치가 평상적인 시기에 종료되었으면 큰 문제가 아니지만, 지금은 유로존 부채 위기 때문에 막대한 기업과 부유층의 자금이 국경을 넘어 움직였기 때문에 사정이 다르다.
채권수익률이 급락하면서 'TAG'를 이용할 수 있는 거래계좌를 이용하는 비용도 줄어들었고, 보장이 없는 머니마켓펀드(MMF)에서 이 계좌로 자금을 파킹하려는 수요도 크게 증가하는 등 이 'TAG' 계좌의 잔액이 3분기 말 현재 1조 5000억 달러에 이르렀다. 은행 자산의 13%나 되는 규모로, 그 절반 이상이 기업들의 보유한 계좌다.
FDIC는 은행들이 위기 발생 시보다는 훨씬 건강해졌기 때문에 이 문제를 '질서정연한 방식으로' 적절하게 통제할 수 있을 것이란 판단을 내놓고 있다. 은행들은 2006년 이래 최대 분기 실적을 냈고, 등록된 은행들 중에서 문제적인 곳은 지난해 연말 888곳에서 지금은 694곳 정도로 줄었다. 또 기업이나 여타 예금주들 역시 이 'TAG'가 올해 연말에 종료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미리 잘 대비했을 것이란 판단이다. 일부 은행권은 기업 재무팀에 자금을 보관할 장소로 '초단기 채권펀드'라는 금융상품을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문제는 'TAG'로 보증되는 계좌 규모가 제어할 수 없을 만큼 커졌다는 데 있다. 기업 재무팀이 미국 은행들의 건전성에 대해 안심하고 있고 다른 투자 대안이 없다는 점을 잘 인식하고 있다면 이 예금을 연말 이후에도 유지하거나 천천히 뽑아내면 되겠지만, 갑작스럽고 일방적이로 자금을 인출할 경우 은행들은 물론 채권시장 전반이 흔들릴 가능성이 있다.
전문가들이 판단하는 계좌 자금 인출 예상 규모는 천차만별이다. JP모간은 약 1000억~3000억 달러 정도가 이탈할 것으로 보고 있고, RBS의 분석가들은 그 두 배 정도를 예상한다. 이들 자금은 인출될 경우 대부분 단기 재무증권으로 파킹될 가능성이 높은데, 이럴 경우 금리가 급격히 하락하고, 나아가 급격히 마이너스권으로 진입하면서 자본시장의 왜곡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미국은행협회(ABA)는 이에 따라 'TAG'의 만기 연장을 위해 로비에 나섰다. 그런데 상원 다수당인 민주당의 해리 리드 의원이 이런 내용을 담은 의안을 냈지만, 공화당과 대형은행은 반기를 들고 있다. 반기를 든 이유는 'TAG'와 같은 제도는 더욱 큰 시장의 혼란을 야기하는 것이며, 그냥 두면 앞으로 더 큰 문제를 야기할 것이란 판단에 있다.
현재 미국 정치판의 구도에서 이 문제가 어떤 식으로 결론이 날지 확실치 않다. 그러나 재정절벽이 당장 연말 시한이 지나더라도 합의 시한이 남은 것과 달리 'TAG'는 연말까지 합의되지 않으면 곧장 문제가 터질 수 있는 뇌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경계를 늦출 수 없는 대목이다.
겉으로 평온해 보이는 미국 금융시장의 수면 아래에서는 'TAG'와 같이 대중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감추어진 기제들이 작동하고 있다. 이 기제들은 중독성이 강해서 출구전략이 제대로 확립되지 않을 경우 또다른 위기를 만들어 낼 수 있지만, 이를 미리 해결하려는 노력이 충분치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뉴스핌 Newspim] 김사헌 기자 (herra79@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