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핵심 요약
beta- 일본은 1889년 헌법과 1890년 의회를 세웠다
- 1920년대 정당정치와 보통선거가 확산했다
- 1930년대 후반 언어 변질 속 의회정치가 붕괴했다
!AI가 자동 생성한 요약으로 정확하지 않을 수 있어요.
일본 민주주의의 역사는 역설적이다. 일본은 아시아에서 가장 일찍 근대적 헌법과 의회, 선거제도를 도입한 국가 가운데 하나였다. 민주주의의 역사적 발전을 연구한 새뮤얼 헌팅턴(Samuel P. Huntington)은 일본을 19세기부터 1920년대까지 이어진 제1차 민주화 물결에 참여한 국가 가운데 하나로 분류하고 있다.
1889년 「대일본제국헌법」을 공포하고 이듬해 제1회 제국의회를 열었으며, 1910~20년대에는 정당정치와 대중정치가 빠르게 성장했다. 1918년 하라 다카시(原敬) 총리가 본격적인 정당내각을 이끌었고, 1925년에는 남성 보통선거제가 도입되었다.

1928년 최초의 남성 보통선거가 실시될 무렵 일본은 적어도 제도적 외형만 놓고 보면 아시아에서 가장 발전한 의회정치 국가 가운데 하나였다. 그런데 불과 10여 년 뒤 중일전쟁과 국가총동원법, 정당의 해체와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지며 초기 의회정치는 붕괴되고 말았다.
필자는 이 역설적 역사를 2026년 4월 캐나다 오타와에서 열린 국제회의에서 비교정치의 관점에서 다룬 바 있다. 캐나다 오타와대학교 정치학과와 콘라트 아데나워 재단(Konrad-Adenauer-Stiftung) 캐나다 사무소가 공동 주최한 이 회의에서 필자는 바이마르공화국의 독일 의회, 일본 제국의회, 그리고 한국 국회의 장기적 언어변화를 비교하면서, 민주주의의 후퇴가 반드시 헌법의 폐지나 의회의 폐쇄에서 먼저 나타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제시했다.
오히려 상대방을 설득해야 할 정치적 경쟁자로 인정하는 언어가 약해지고, 정책에 대한 반론이 상대의 충성과 정당성을 의심하는 언어로 바뀌는 과정이 제도적 붕괴보다 앞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 그 연구의 핵심 문제의식이었다.
일본은 이 비교연구에서 특히 흥미로운 사례였다. 일본의회는 1930년대에도 활발하게 활동했다. 선거도 계속되었고 총리와 장관은 의회에서 충실히 답변했으며 의원들은 정부를 비판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의회의 속기록을 장기간 따라가면 '국민', '법', '책임', '명예', '생존' 같은 익숙한 정치어휘가 같은 형태를 유지하면서도 그 의미가 조금씩 변질되는 모습이 나타난다.
1920년대에는 국민이 정부를 심판하고 정치에 참여하는 시민으로, 책임이 정부의 설명책임으로 사용되는 경향이 강했다면, 1930년대 후반으로 갈수록 국민은 국가적 목표에 동원되는 존재로, 책임은 천황과 국가를 위한 의무와 희생의 의미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일본 민주주의가 언제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는지를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 이 글에서는 법률과 선거 결과만큼이나 의원과 총리가 실제로 어떤 말을 했는지를 살펴본다.
그 핵심 자료가 일본 국립국회도서관이 운영하는 「제국의회회의록검색시스템(帝国議会会議録検索システム)」이다. 이 데이터베이스에는 1890년 11월 제1회 제국의회에서 1947년 3월 제92회 제국의회까지 귀족원과 중의원의 본회의·위원회 속기록이 수록되어 있으며, 회기와 날짜, 발언자, 의제, 실제 발언 등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자료의 흥미로운 점은 연설문만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의원의 질문과 총리·장관의 답변은 물론, 때로는 박수와 야유, 소란과 끼어들기, 의장의 제지까지 기록되어 있다.
영국 웨스트민스터 속기록의 "Hear, hear!", 바이마르 독일 의회의 Beifall(박수), Zurufe(고함·끼어들기), Unterbrechungen(발언방해)을 읽듯 일본 의회에서도 누가 어떤 발언에 박수를 받았는지, 어떤 질문에서 고함이 터졌는지, 의장이 누구의 발언권을 보호했는지를 볼 수 있다.
민주주의의 건강성을 판단할 때 중요한 것은 의회가 얼마나 경청하고 반응하는지에 대한 정보다. 감정적 격론을 나눈 뒤에도 토론이 잘 마무리 되었는지, 정부가 불편한 질문에도 성실하고 정중하게 답변에 응했는지, 의장은 소란을 잠재우고 질서를 바로 잡기 위해 어떤 조치를 취했는지, 소수의 발언권을 보호했는지 또한 민주주의의 질을 평가하는 중요한 판단근거다.

강대국을 만든 국가, 초기의회를 만든 국가의 언어
일본의 의회정치를 이해하려면 먼저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이 얼마나 빠른 속도로 국가 자체를 다시 만들었는지를 살펴 보아야 한다. 1868년 당시 일본에는 전국적인 철도망도, 전신망도, 통일된 근대 우편과 화폐체계도 없었다. 그러나 메이지 정부는 서구 열강의 기술과 제도를 분야별로 선택해 받아들이면서 중앙집권적 행정과 교육, 교통·통신, 산업과 군사제도를 거의 동시에 구축해 나갔다.
마리우스 잰슨(Marius B. Jansen)은 『The Making of Modern Japan』(2000)에서 메이지 유신을 단순한 왕정복고나 정권교체로 설명하지 않는다. 그의 연구에서 제시된 메이지 일본의 핵심은 국가가 지방과 계급으로 분절되어 있던 사회를 하나의 행정·경제·군사체제로 재편해 나간 데 있었다. 앤드루 고든(Andrew Gordon) 역시 일본의 근대화가 산업화만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와 사회의 관계가 재구성되는 과정이었다고 강조해왔다.
외국의 영향도 컸지만 단순한 모방은 아니었다. 철도와 조선, 해군과 공학에서는 영국의 역할이 컸고, 육군과 법제, 헌정제도에서는 프로이센·독일의 영향이 강했다. 일본은 1872년 신바시와 요코하마를 잇는 최초의 철도를 개통했고, 영국인 기술자 에드먼드 모렐(Edmund Morel) 등을 초빙해 철도기술을 습득했다.
전신과 우편망도 빠르게 확대됐으며, 1871년 신화조례를 통해 엔화를 중심으로 하는 통일화폐체계가 마련됐다. 공부성은 철도·전신·광산·조선소·공장을 묶어 산업화를 추진했고, 해외 기술자들에게 의존하던 초기 단계를 지나 일본인 기술자와 관료들이 그 운영을 넘겨받았다.
올리브 체크랜드(Olive Checkland)는 『Britain's Encounter with Meiji Japan, 1868–1912』(1989)에서 이러한 영국과 일본 사이의 기술·인적 네트워크를 상세히 분석했고, 메이지 일본이 철도와 해운·조선, 공학교육에서 영국의 경험을 적극적으로 흡수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헌법은 다른 방향을 택했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비롯한 일본의 헌법제정자들은 유럽을 조사한 뒤 특히 독일·프로이센 계통의 국가론과 헌법학에 주목했고, 독일인 법학자 헤르만 뢰슬러(Hermann Roesler)의 조언도 받아들였다. 이 결과 1889년 탄생한 대일본제국헌법은 천황의 강한 통치권을 인정하면서도 선출된 중의원이 법률과 예산 심의에 참여하는 독특한 입헌군주제를 만들었다.
바로 이 지점이 일본 정치사에서 중요한 대목이다. 일본은 강한 국가를 만들면서 동시에 의회를 만들었다. 근대적 군대와 산업시설뿐 아니라 정부가 자신의 예산과 정책을 공개적으로 설명해야 하는 공간도 함께 만들어졌다.
1890년 제1회 제국의회가 열리면서 정부는 세금과 군사비를 늘릴 때 의원들을 설득해야 했고, 중의원은 예산을 삭감하거나 정부를 공격할 수 있게 되었다. 민주주의는 아직 국민주권까지 가지 않았지만, 권력이 의회에서 말을 통해 설득하는 정치가 시작된 것이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승리는 일본에 엄청난 자신감을 준 계기가 되었다. 일본은 대만을 식민지화하고 1910년 한국을 병합했으며 강대국 반열에 진입했다. 이러한 외교적 성과와 동시에 국내에서는 정당정치가 확대되고 있었다는 점이 매우 특별하다.
앤드루 고든은 『Labor and Imperial Democracy in Prewar Japan』(1991)에서 이러한 모순을 '제국적 민주주의(imperial democracy)'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노동자와 도시대중이 정치에 참여하고 정당이 표를 의식하기 시작했지만, 그 민주주의는 천황제와 제국을 해체하지 않았다. 민주주의와 제국주의가 교대로 등장한 것이 아니라 상당 기간 함께 동반 성장했음을 보여준다. 다이쇼 민주주의가 최적의 민주적 운영은 아니었으나 적어도 군국주의를 의회에서 관리하는 정치적 가능성이 동시에 열려 있던 시기였다.

*필자 최연혁 교수는 = 스웨덴 예테보리대의 정부의 질 연구소에서 부패 해소를 위한 정부의 역할에 관한 연구를 진행했다. 스톡홀름 싱크탱크인 스칸디나비아 정책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매년 알메달렌 정치박람회에서 스톡홀름 포럼을 개최해 선진정치의 조건에 대해 함께 고민하고 그 결과를 널리 설파해 왔다. 한국외대 스웨덴어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정치학 석사 학위를 받은 후 스웨덴으로 건너가 예테보리대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고 런던정경대에서 박사후과정을 거쳤다. 이후 스웨덴 쇠데르턴대에서 18년간 정치학과 교수로 재직했으며 버클리대 사회조사연구소 객원연구원, 하와이 동서연구소 초빙연구원, 남아공 스텔렌보쉬대와 에스토니아 타르투대, 폴란드 아담미키에비취대에서 객원교수로 일했다. 현재 스웨덴 린네대학 정치학 교수로 강의와 연구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저서로 '우리가 만나야 할 미래' '좋은 국가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민주주의의가 왜 좋을까' '알메달렌, 축제의 정치를 만나다' '스웨덴 패러독스' 등이 있다.
kimsh@newspim.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