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핵심 요약
beta- 사진가 이정진이 23일까지 PKM갤러리에서 명상적 사진전 'Unseen/Thing'을 열었다
- 아이슬란드 풍광을 담은 'Unseen'과 일상 사물을 응시한 'Thing' 연작이 한지 감광유제 기법으로 내면·에너지의 풍경을 시각화했다
- 사진과 수묵화 경계를 넘나드는 독창적 질감과 구도로 국내외에서 호평받는 이정진은 수행 같은 아날로그 작업으로 사진 매체성을 확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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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사유를 하게 만드는 수묵화 같은 사진
한지에 은염 발라 프린트해 독특한 미감 창조
[서울=뉴스핌]이영란 편집위원/미술전문기자=사진이 기록의 수단을 넘어 '사유와 명상을 부르는 장르'가 될 수 있을까? 그 물음에 답하는 작가 이정진(Jungjin LEE)이 서울 PKM갤러리에서 개인전을 갖고 있다.

종로구 삼청로의 PKM갤러리(대표 박경미)는 명상적인 사진작업으로 세계 무대에서 주목받아온 사진가 이정진의 개인전 'Unseen/Thing'을 오는 5월 23일까지 개최한다. 이정진은 PKM갤러리에서 지난 2020년 'VOICE'라는 타이틀로 개인전을 가졌고, 이번 전시는 6년 만이다. 폐막까지 일주일 남은 이번 전시는 사진을 좋아하는 사람은 물론, 특별한 예술세계를 접하길 원하는 미술팬이라면 놓쳐선 안될 전시다.
이정진에게 카메라는 세계를 사실적으로 기록하는 수단이 아닌, 스스로의 내면과 외부세계가 맞닿고 스파크가 이는 '창(窓)'이다. 또한 그의 사진은 독특한 질감과 깊이감이 특징이다. 사진인지, 수묵화인지 헤아리기 힘든 검고 묵직한 사진들은 시간성을 오롯이 품고 있다. 작가는 한지 위에 붓으로 감광유제를 펴바른 뒤 사진을 프린트하는 독창적인 아날로그 인화방식을 창안했다. 바로 이 엄청난 공력과 시간을 요하는 기법 때문에 그의 사진은 특별한 깊이감과 시간성을 드러낸다.
PKM갤러리 전관에서 열리는 전시에는 대서양 북부 아이슬란드의 장대한 풍광에서 출발한 최신작 'Unseen'(2024)과 일상의 사물을 따뜻한 시선으로 담아낸 'Thing'(2003~2007) 시리즈를 함께 감상할 수 있다.
이번 전시에서 연작 형태로 한국 최초로 공개되는 'Unseen'은 화산암과 빙하, 거친 파도가 넘실대는 아이슬란드의 원초적 풍광을 담은 작업이다. 이정진은 일찌기 미대륙의 적막한 사막지대를 파인더에 담았던 것과는 달리, 2년 전 아이슬란드에서는 정반대의 체험을 해야 했다. 시시각각 급변하는 날씨와 역동적인 공기, 거친 파도로 그야말로 생동하는 장소였던 것이다.

작가는 "미국 서부사막에서는 고요함 속에서 내면으로 침잠했다면, 아이슬란드에서는 경외와 두려움을 느꼈다. 마치 다른 행성에 와있는 듯했고, '왜 이제야 이곳에 왔을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나의 영토'임을 직감했다"고 밝혔다. 이정진은 이 낯설고 험한 시공간에 몸과 정신을 맡긴 채, 장엄한 풍경이 온전히 자신을 통과하는 순간을 카메라에 담아냈다.
그 결과 'Unseen' 속 짙은 화산암과 흰 눈, 포말이 이는 파도, 거친 바위의 모습은 작가가 바라본 풍경을 그대로 포착한 것이라기 보다, 그가 대자연과 마주하며 투영한 스스로의 내면의 풍경을 추상적 이미지로 시각화한 것이다.
이정진의 'Unseen' 연작은 지난해 영국 런던과 스위스 취리히에서 가진 개인전을 통해 처음 공개됐는데 당시 영국의 '더 가디언'과, 'FT(파이낸셜타임즈) 매거진' 등 해외 언론으로부터 "내면의 모든 울림을 담아낸 풍경"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특히 가디언은 별 다섯 개(평범) 중 네 개를 주며 "자연의 위대함을 강렬하게 드러내는 풍경은 실존적 불안과 은유적인 사색의 표현"이라고 평했다.

사실 북극권 나라 아이슬란드의 장대하고 원초적인 풍경은 로니 혼, 올라퍼 엘리아슨을 비롯해 여러 작가들이 오랫동안 작업에 담아왔다. 하지만 이정진의 사진연작 'Unseen'은 보다 묵직하고, 심연을 건드리는 명상적 작업이란 점에서 차별성과 고유성을 지니고 있다.
전시에 출품된 이정진의 'Unseen #62'는 저 멀리 짙은 안개 속 삼각뿔처럼 솟은 현우암 섬이 수면에 투영돼 검은 산과 그림자, 그리고 흰 눈이 형언키 어려운 묵시적 풍경으로 직조됐다. '깊은 아름다움'이라는 수식어가 모자랄 정도로 숭고한 미감을 드러낸다. 아이슬란드의 원초적인 풍경이 이정진에 의해 압도적 이미지로 우리 앞에 다가온다. 흐릿하게 번진 수평선으로 바다와 육지는 구분되지만, 작가의 화면은 명확한 재현을 거부한다. 남는 것은 형태가 아니라 이미지다.

야생의 거친 바위절벽을 과감한 구도로 찍은 'Unseen #44'는 검은 색과 흰색, 잿빛의 무채색 톤과 바윗덩어리가 뒤엉킨 가운데 비현실적 추상화로 다가온다. 조물주가 빚은 대자연을 이정진은 추상의 짙푸른 Funeral(장송곡)처럼 장중하게 담아냈다.
이처럼 이정진의 작품은 구도와 질감이 남다르다. 그는 아이슬란드라는 거친 시공간에서 대면한 대자연의 풍광을 대담한 구도와 강한 임팩트를 살리며 '검은 추상의 시'로 밀도있게 표현했다. 구구한 내러티브와 디테일을 건너 뛴 압축적인 화면은 보는 이로 하여금 깊은 사유에 빠져들게 만든다.
▲오래 응시한 일상의 기물에 생명력 부여한 'Thing'연작
PKM갤러리 별관에 전시된 이정진의 'Thing'시리즈는 작가의 유일한 스튜디오 작업이다. 'Unseen'이 먼 곳의 자연을 향한다면 'Thing'은 작가 곁의 익숙하고 소박한 사물을 '줌 인'하듯 들여다본다. 이정진은 스튜디오에 놓인 토기, 나뭇잎, 머그, 숟가락이 본연의 본질을 드러내는 순간을 포착했다.

'Thing' 연작은 흰 여백 위에 대상들이 하늘로 날아오른 주인공처럼 표현돼 이채롭다. 토기, 숟가락, 머그 등의 사물은 작가에 의해 본래 용도나 관념으로부터 해방돼 고유한 영혼을 획득한 존재가 된다. 이 시리즈는 한지 인화를 포함해 전 과정이 아날로그 방식으로 제작됐다. 화랑 측은 "이번 전시에서는 아날로그 기법의 라스트 에디션 등 희소성 높은 'Thing' 작업들이 나왔다"고 전했다.
이들 두 시리즈 사이에는 20년의 시차가 존재하지만, 옷의 안과 밖처럼 하나의 본질을 향하고 있다. 'Thing'이 형상 이면에 내재된 삶을 통찰적 시선으로 보여준다면, 'Unseen'은 미지의 풍경에 감춰진 에너지를 과감하게 드러낸다. 결국 사물의 이면과 미지의 기운을 담아낸다는 점에선 한 지점에서 만난다.
▲수행처럼 오랜 시간과 공력을 요하는 후반작업
이정진의 사진은 사진과 회화의 경계에 오가는 것이 특징이다. 마치 수묵화나 목탄화를 연상시키는 특유의 질감과 분위기를 띄고 있다. 이는 작가가 창안한 아날로그 기법의 후반작업에서 비롯된다.
작가는 꽉 막힌 암실에서 한지 전체에 감광유제를 바른 뒤 그 위에 인화하고, 이를 다시 디지털로 스캔해 보정작업을 한 다음 비로소 프린트한다. 엄청난 공력이 드는 이 과정은 작가 본인이 해야만 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정진은 "아이슬란드 현지촬영에 한 달이 걸렸는데, 후반작업에 열 달이 걸렸다. 마치 수행하듯 작업해야 비로소 원하는 이미지를 얻을 수 있다"고 토로했다.
그는 "전통 한지에 감광유제를 바르면 마치 살아있는 피부처럼 깊은 곳에서 이미지가 배어나오는 질감을 얻을 수 있다"며 "또 한지의 물성은 관람자가 사진을 눈으로 읽는 게 아니라, 몸으로 느끼도록 만든다"고 전했다.
그의 작품은 사진이지만 붓질이 언뜻언뜻 남아있고, 특유의 질감이 목탄화나 수묵화로 다가온다. 이정진은 "사진을 가지고 시를 쓴다고 생각해본다"며 "사진이냐, 수묵화냐고 많이들 묻는데 경계에 있는 상태 자체를 받아들여 달라"고 했다.
국립현대미술관 송수정 전시과장은 "이정진 작가의 작품은 구도와 질감이 독보적이다. 한지에 은염을 발라서 만들어낸 프린트의 입체적인 질감은 풍경을 한순간의 장면이 아니라 거친 자연의 섭리를 통과해온 묵직한 생명처럼 마주하게 한다"며 "그의 작품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다. 그것은 사진의 속성을 벗어나는 일이니 어떤 면에선 매체성마저도 초월하거나 확장하고 있는 셈이다."라고 평했다.

이정진은 대학(홍익대학교 미술대학)에서 도예를 전공하고 다큐멘터리 사진으로 사진예술 세계에 입문했다. 1988년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의 사막'(1990~1995) 시리즈를 기점으로 전통한지에 감광유제를 도포해 인화하는 독창적인 방식을 고안해 발전시켰다.
2010~2011년에는 토마스 스트루트, 스테판 코어, 조셉 쿠델카 등 저명한 사진가 12명과 함께 'This Place' 프로젝트에 유일한 아시아 작가로 참여하며 국제 사진계에서 주목받았다. 2016년 스위스 빈터투어미술관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가졌고, 그 순회전이 2018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개최됐다. 1988년 첫 사진집 '먼 섬 외딴 집'(열화당)을 시작으로 2009년 'WIND'(아퍼쳐), 2016 'Evergladed'(나즈베리 출판사), 2025년 'Thing'(닻프레스)까지 모두 19권의 사진집을 펴냈다.
그의 작품은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휘트니미술관, 로스앤젤리스 카운티미술관, 파리 국립현대미술기금,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등에 소장돼 있다. 카메라가 포착한 '보이지 않는' 세계를 만날 수 있는 이정진의 PKM갤러리 전시는 5월 23일까지 계속된다. 무료관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