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핌] 김용석 선임기자 = "내가 곡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곡이 나를 선택했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이 틀린 말이 아니다."
올해 데뷔 70주년이자 여든 번째 생일을 맞는 피아니스트 백건우는 30일 여의도 신영체임버홀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음악과 남은 생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는 대부분 음악 얘기를 했고,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은 말하지 않았다.

◆ 슈베르트는 고른 것이 아니라 돌아온 것
최근 그는 2013년 슈베르트 녹음 이후 13년 만에 다시 슈베르트 앨범을 내놨다. "내가 곡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곡이 나를 선택했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이 틀린 말이 아니다." 백건우는 슈베르트를 '선택'했다는 표현을 거부했다. 피아노 소나타 13번(D.664)은 그가 처음으로 공부한 슈베르트 소나타다. 20번(D.959)은 오랫동안 답을 찾지 못해 내려놓았던 곡이다. 이번 앨범에 소나타 13·14·18·20번 네 곡을 담은 것은 그러니까 '연주 인생의 시작과 끝을 아우르는 선택'인 동시에, 그의 말을 빌리면 '항시 같이 해왔던' 음악과의 재회다.
백건우는 "한 작곡가, 한 작품이 한 시기에 집중적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선택해서 이 곡이 나왔다는 생각이 안 든다. 내 속에 잠재돼 있던 음악이 그 시기에 맞춰 나오는 것이다. 필연적이라는 생각이 든다"라고 새 앨범에 대해 설명했다.
슈베르트를 모차르트와 나란히 놓으며 '인간이 구상할 수 있는 음악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이라고 했다. 백건우는 "모차르트는 구성이 복잡한데 슈베르트는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 이 음악이 인간이 쓴 건가 천국에서 쓴 건가, 착각이 올 때 있다'라며 슈베르트를 다시 선택한 이유를 설명했다.
◆ 연주자의 의무는 '소리로 이해시키는 것'
1946년 서울 출생인 백건우는 열 살에 그리그 협주곡으로 무대에 섰고, 1961년 줄리어드 유학을 떠났다. 이후 70년, 그가 밟은 무대는 한국·미국·유럽을 넘나들었다. 그는 '세상도 많이 변했고 겪은 세계도 많이 변했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그러면서도 연주자의 역할에 대해서는 단호했다. '소리로서 사람들이 음악을 이해하게 하는 것이 나의 의무다. 소리로 충분히 이해가 될 것이라고 믿는다.' 어떤 곡을 왜 선택했는지 말로 설명하는 것에는 선을 그었다. '말(언어)로 표현하기는 어렵다. 소리로 표현하고 싶지 말로 표현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음악을 좋아하는 것 같다"는 소회를 밝혔다.
곡 하나를 제대로 해석하려면 적어도 세 번은 되돌아와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백건우는 "그렇게 하면 20년, 30년이 걸린다. 무언가 아직 불만스러운 것이 남아 있기 때문에 계속하는 것이다. 죽을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라고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 유튜브 조회수로는 자기 속의 음악을 키울 수 없다
오늘날 젊은 연주자들에게 쓴소리를 한 얘기도 들려줬다. 콩쿠르 입상과 빠른 인지도 획득에 집중하는 한국 풍토, 그리고 무엇보다 넘치는 정보가 오히려 음악가를 망가뜨릴 수 있다는 경고였다.
그는 조언을 구해온 후배에게 '너는 음악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고 냉정하게 말한 적이 있다고 했다. 상대도 결국 그 말을 인정했다고. 그가 딸에게 처음 내준 숙제는 시에서 무엇을 느끼는지 써오는 것이었다. '주어진 답은 거부한다. (유튜브) 조회수에는 답이 없다. 음악에 있어서는.'
백건우는 "한국에도 인포메이션이 많지만 유럽으로 간 이유는 그 정보를 지우기 위해서다. 자기 속의 음악을 키워야 하는데, 지금은 자기 자신을 키우기 힘들어졌다"라며 "유튜브 조회수 등에 영향을 받는 것은 안 좋다. 본인이 아닌 유튜브에 영향을 받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라고 했다.

◆ '한국 연주자들, 현대 음악도 많이 해 주길'
그는 음악 세계의 광대함을 이렇게 표현했다. "음악은 천 개의 얼굴을 갖고 있다. 우리는 될 수 있으면 많은 음악의 세계를 알고 싶고 접근하고 싶고, 그런 것이 인생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알려진 레퍼토리가 음악 세계 전체에 비하면 너무 작다고 했다. '앞으로 알아야 할 곡이 너무나 많다."
이번 앨범 외에도 그의 머릿속에는 여전히 하고 싶은 음악이 가득하다. 레퍼토리 면에서 영국 음악, 스페인 음악, 그리고 현대 작품까지 아직 손도 못 댄 곡들이 줄을 서 있다고 했다. 줄리어드 재학 시절 현대 음악을 충분히 배우지 못한 것이 여전히 아쉬움으로 남는다.
백건우는 "우리가 200~300년 전 음악에 머물러 있어야 하냐는 질문을 스스로 라곤 한다. 한국 연주자들이 현대 작품도 많이 해 주었으면 좋겠다. 연주자들로 인해 세상에 새로운 음악이 탄생하면 좋겠다"라고 했다.
그는 "오랜 시간 연주 활동을 하면서 무언가를 보여줘야 한다는 부담도 있었다. 스트레스도 받았다. 하지만 데뷔 70주년·팔순을 맞으며 결국 남는 것은 음악을 즐기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제부터는 좀 더 자유롭게 음악을 즐기고 싶다"고 했다.
4월부터는 전국 12개 도시 리사이틀 투어가 예정돼 있다. 서울 공연은 생일에 맞춰 5월 10일 예술의전당에서 열린다. 자서전 출간도 함께 준비 중이다. 그는 "70년간 세상이 많이 변했고 그 사이 겪은 이야기가 많다. 나이가 드니 돌이켜 보게 되고, 겪은 세계가 지금과 많이 다르다는 게 느껴진다"고 되내었다.
'구도자'라는 별명에 그는 "일생을 음악하고 살다 보니까 그것의 연속인 것 같다. 내겐 (별명이) 좀 무겁게 다가온다.구도자는 사실 누구나 자기 하는 일에 충실하고 노력하는 분이면 다 구도자"라고 했다.
'음악가에게 은퇴란 없다'는 말에 그는 짧게 웃었다. "인생이 너무 짧다"고.

fineview@newspim.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