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핌] 최원진 기자= 미국이 베네수엘라 정권에 대한 압박 수위를 끌어올리면서, 베네수엘라산 저가 원유에 의존해 온 쿠바가 경제 붕괴 위기로 내몰리고 있다.
쿠바는 이미 식량난과 전염병 확산, 만성적인 정전 사태에 시달리고 있는 가운데, 핵심 에너지원인 베네수엘라 원유 공급마저 위협받으면서 상황이 한층 악화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21일(현지시간)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미국은 최근 베네수엘라 니콜라스 마두로 정권을 겨냥해 제재 대상 유조선을 표적으로 한 부분적 원유 봉쇄에 나섰다.
미국이 겨냥한 유조선들은 베네수엘라 원유 수출의 약 70%를 운송하는 선박들로, 이미 미 당국은 약 200만 배럴의 베네수엘라 원유를 싣고 가던 유조선 두 척을 나포한 상태다. 이날 세 번째 유조선도 추격 중이라고 미 당국자들은 밝혔다.

이번 조치는 카리브해 일대에서의 미군 증강 배치, 베네수엘라 마약 밀매와 연관됐다고 주장하는 선박에 대한 공습, 베네수엘라 본토에 대한 군사적 위협 등과 함께 진행되는 대(對)마두로 압박 전략의 일환이다. 베네수엘라의 원유 수출이 중단되거나 급감할 경우, 쿠바 경제에 미칠 충격은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텍사스대 오스틴 캠퍼스에서 쿠바·베네수엘라 에너지 관계를 연구하는 쿠바계 망명자 호르헤 피뇬은 "베네수엘라 원유 공급이 끊기면 쿠바 경제는 의심의 여지 없이 붕괴할 것"이라고 말했다.
쿠바와 베네수엘라의 밀착 관계는 1999년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정권부터 본격화됐다. 당시 차베스는 양국 관계를 '행복의 바다로 묶인 동맹'이라고 표현했고, 쿠바는 체육 지도자와 의료진, 정보 요원을 베네수엘라에 파견했다. 특히 쿠바 정보기관 요원들은 차베스 정권 전복을 시도할 수 있는 군 내부 반대 세력을 색출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 대가로 베네수엘라는 하루 약 10만 배럴의 원유를 쿠바에 공급했다.
이후 베네수엘라의 원유 생산이 급감하면서 현재 쿠바로 향하는 원유 물량은 하루 약 3만 배럴 수준으로 줄었지만, 여전히 쿠바 에너지 수입의 약 40%를 차지하고 있다. 쿠바는 일부 자국 생산 원유와 멕시코·러시아산 원유를 수입하고 있지만, 베네수엘라산 원유는 발전소 가동과 교통, 소규모 민간 경제를 떠받치는 핵심 자원이다.
쿠바 정보기관 요원들은 여전히 베네수엘라에 남아 마두로 정권을 보호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들은 군과 정부 내 불충 세력을 숙청하는 데 관여하며 마두로가 권력을 유지하도록 돕고 있다. 쿠바 정부가 마두로 정권의 안위를 사활적으로 관리하는 이유 역시, 그가 실각할 경우 쿠바로 향하는 원유 공급망이 붕괴될 수 있기 때문이다.
토머스 A. 섀넌 주니어 전 미 국무부 고위 외교관은 "쿠바는 마두로와 그의 직계 후계자들을 매우 철저하게 보호하고 있다"며 "쿠바는 조용히 어둠 속으로 사라질 생각이 전혀 없다"고 말했다.
쿠바 정부는 미국의 군사력을 직접적으로 견제할 수단은 없지만, 미국의 카리브해 군사 증강과 유조선 압류를 강하게 비난하고 있다. 미겔 디아스카넬 쿠바 공산당 제1서기 겸 대통령은 최근 공산당 중앙위원회 연설에서 "드레이크와 모건의 시대를 연상케 한다"며 "도널드 트럼프는 해적을 풀어 베네수엘라 유조선을 노골적으로 약탈했다"고 비판했다.
"드레이크와 모건의 시대"는 16~17세기 카리브해를 무대로 활동했던 영국계 해적·사략선의 전성기를 가리키는 비유다. 엘리자베스 1세 시기 영국이 '사략 면허'를 내준 해적들을 동원해 스페인 등 타국 선박과 식민지를 약탈했던 관행에 빗대 '국가 공인 해적질'이라고 지적한 셈이다.
이 같은 외부 압박은 쿠바가 1959년 혁명 이후 최악의 경제 위기를 겪고 있는 가운데 가해지고 있다. WSJ는 현재의 위기가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겪었던 '특별 시기'보다 더 길고 혹독하다고 전했다.
뉴욕 바루크칼리지의 쿠바 전문가 테드 헨켄 교수는 "상황은 절망적"이라며 "희망은 사라졌고 사람들은 탈출을 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2020년 이후 약 270만 명, 즉 쿠바 인구의 4분의 1가량이 섬을 떠났으며 이 중 수십만 명이 미국으로 향했다는 분석도 있다.
쿠바 내부에서는 식량 부족과 장시간 정전, 쓰레기 적체, 뎅기열과 치쿤구니야 같은 전염병 확산이 일상화됐다. 싱크탱크 사회권 감시센터(Social Rights Observatory)가 지난 여름 한 달간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쿠바 인구의 90% 가까이가 극심한 빈곤 속에서 살고 있으며, 70%는 하루 최소 한 끼를 굶고 있다. 일부 지역에서는 하루 18시간 이상 정전이 발생한다. 물 공급이 끊겨 씻거나 화장실을 이용하지 못하는 경우도 잦고, 많은 아이들이 학교에 가지 못하고 있다.
쿠바 인권운동가 마누엘 쿠에스타 모루아는 "이것은 생존의 문제"라며 "우리는 하루하루 버티고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베네수엘라 원유 공급이 더 줄어들 경우 쿠바 경제가 감당 불가능한 국면에 접어들 수 있다고 경고한다. 워싱턴 아메리칸대의 쿠바 경제학자 리카르도 토레스 페레스는 "지금도 최악이지만, 더 나빠질 수 있다"며 "베네수엘라 원유 공급이 몇 주나 몇 달 안에 더 줄어든다면 상황은 더 이상 지속 불가능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wonjc6@newspim.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