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상문의 '화랑담배'는 6·25전쟁 이야기이다. 6·25전쟁 때 희생된 모든 분에게 감사드리고, 그 위대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제목을 '화랑담배'로 정했다.
김성주가 이종락을 찾아간 1929년 초여름은 그해 4월 정의부를 주축으로 국민부가 탄생했다. 이에 따라 정의부 무력이 국민부 소속으로 바뀌었다. 자연스럽게 이종락은 국민부 소속 무력 단체인 조선혁명군 소속 소대장 직책을 수행하였다. 이종락은 김성주를 구해주었던 3년 전과는 그 성격이 많이 변해있었다. 민족주의를 버리고 공산주의자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국민부가 출범하던 1929년경에는 이종락뿐만 아니라, 많은 수의 인원이 민족주의에서 공산주의로 전향하였다. 이런 가운데 국민부 내에서도 '국민부를 사회주의 혁명 단체로 개조해야 한다.'라고 주장하는 목소리가 강하게 제기되고 있었다. 소련의 약소 민족 해방 구호와 코민테른의 국제적 지원에 호감을 가지는 사람이 불어나고 있었던 거다. 이와 같은 현상은 젊은이를 중심으로 퍼져갔다. 이종락도 그런 부류의 하나로써 국민부 내 사회주의 혁명파를 자처하며, 국민부 내에서 민족주의 노선을 반대하는 '길흑농민동맹(吉黑農民同盟)'을 조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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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AI 생성 이미지] |
이 무렵 길림성 회덕현(懷德縣) 오가자(五家子)에는 한인 농가 1,000여 호가 거주하고 있었다. 이곳엔 요하농촌공소(遼河農村公所)라는 한인 자치단체 본부가 있었다. 책임자는 이만진(李萬鎭)이었다. 이종락이 1929년 가을 이곳 요하농촌공소가 있는 지역을 공략했다. 그 결과 요하농촌공소가 사라졌다. 이 지역 한인 농민들은 이종락의 '길흑농민동맹'에 세금을 내기 시작했다. 이때 김성주가 찾아온 것이다. 이종락은 김성주가 자신을 찾아오자, 부하로 받아들이고 하사 계급장을 주었다. 김성주는 이종락 명령에 따라 이통현(伊通縣), 고유수(孤楡樹), 회덕현(懷德縣), 오가자(五家子) 등지를 돌아다니며 세금을 거두었다.
이럴 즈음, 이종락은 김성주를 흥경현(興京縣) 왕청문(旺淸門)에 있는 남만주학원(南滿洲學院, 약칭 南滿學院)에 입학시켰다. 남만학원은 정의부가 세운 교육기관이었다. 군인은 소대장 요원을, 행정 요원은 자치구 구장(區長)을 양성하는 특수 기관이었다. 국민부가 조직된 이후에는 국민부에서 관장하고 있었다.
김성주는 1929년부터 1930년 말까지 남만학원에 다녔다. 당시 남만학원장 현정경(玄正卿)을 비롯하여 교사 박소심(朴素心) 등 교직원 대다수가 공산주의자가 되어 국민부를 반대하는 사회주의 혁명 교육만 했다. 국민부 지휘부에서 이 사실을 알고 교직원 체포령 내리고 숙정 작업에 들어갔다. 김성주는 이때도 도주에 성공하여 다시 이종락에게로 돌아갔다. 김성주가 이종락 부대에 다시 들어갔을 때 국민부 내부는 민족주의 계열과 공산주의 계열 간 갈등이 최고점을 향하여 가고 있었다. 이종락은 이때를 기화로 1930년 8월 '조선혁명군길강지휘부(朝鮮革命軍吉江指揮部)'라는 군조직을 만들어 국민부와 국민부 무장단체 조선혁명군에 반기를 들었다.
이종락의 '조선혁명군길강지휘부'는 중국 공산당 만주성위(滿洲省委) 반석현(盤石縣)위원회 직업 당원 김월(金月)이 조종하고 있었다. 대원수는 50여 명이었다. 이종락은 1930년에 광풍처럼 불었던 중국 공산당의 폭동 노선을 지지하며 단체 차원의 가입을 시도했으나, 중국 공산당은 승인하지 않았다. 이종락 부대원들은 당력(黨歷)이 없을 뿐만 아니라, 시류에 편승하는 기회주의자로 보았기 때문이다. 대신 개별 심사를 통해 입당하도록 했다.
/ 변상문 국방국악문화진흥회 이사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