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하는 조각가 김인겸 '공간의 시학'전 개막
'물질 너머 부재로 존재 증명' 예술여정 40년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출품작 모형 등 눈길
[서울=뉴스핌]이영란 편집위원/미술전문기자=우리 현대미술계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조각가 김인겸(1948~2018)은 일평생 '존재하지 않음으로써 존재하는 조각'을 추구했다. 그는 조각가임에도 '매스'(mass), 곧 덩어리를 보여주기 보다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드러내는 일에 몰두했다. 때문에 우리는 그를 '사유하고, 질문하는 조각가'라 부른다. 그의 예술세계를 조명하는 대규모 회고전이 대구에서 막을 올렸다.
대구보건대학교(총장 남성희)의 인당뮤지엄은 조각가 김인겸의 회고전을 개막했다. 인당뮤지엄은 '김인겸: 공간의 시학(Kim In Kyum: Poetics of Space)'전을 10월 23일 개막해 2026년 1월 17일까지 전관에서 개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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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뉴스핌] 대구보건대학교 인당뮤지엄에서 개막한 조각가 김인겸 회고전 '공간의 시학' 중 2004년 작 '빈 공간'. [사진=이영란 미술전문기자] 2025.11.06 art29@newspim.com |
김인겸은 자신의 예술세계를 '정신적 영역을 열어가는 조각'이라고 일컬었다. 그는 2011년 전작도록에 버금가는 작품집을 펴내며 "예술이라는 스승을 만나기 위해 길을 나선지 40년에 가까운 시간, 그 스승은 무한이었고 영원이었다. 그리고 초월이었다"라고 썼다. 또 "조각의 물리적 조건과 공간 점유를 되도록 줄이고, 그 여백공간을 강력하게 환기시키고 싶다"고도 했다.
조각의 본질이 '물질을 다루는 예술'임에도 김인겸은 오히려 물질로부터 자유로운 조각을 추구했다. 조각의 진정한 해방을 추구하며, 맑고 명징하며 영성이 담긴 세계를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 그래서 그가 2018년 아까운 나이로 타계하자 비평가들은 김인겸을 가리켜 '사유의 공간을 조각한 예술가'라 칭하게 됐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수천, 수만년 간 '조각'이란 장르에 강하게 덧씌워진 고정관념을 훌훌 벗어던지고, 물질에서 해방된 조각, 공간과 어우러지는 조각, 부재를 통해 더욱 또렷이 존재가 드러내는 조각을 추구했던 작가가 바로 김인겸이다. 이러한 이유로 김인겸의 조각이 놓인 곳은 곧 '사유하는 공간'이 된다. 최소한의 표현으로 가장 명징한 조형세계를 보여주는 조각이 김인겸 예술의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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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뉴스핌] 대구 인당뮤지엄 1전시실에 설치된 김인겸의 철 조각작품 '묵시공간-공' 1999. [사진=이영란 미술전문기자] 2025.11.06 art29@newspim.com |
이번에 인당뮤지엄은 로비와 1,2,3,4,5전시실, 잔디광장까지 미술관 전관을 아우르며 김인겸 작가가 평생에 걸쳐 천착했던 '정신적 영역을 열어가는 조각'의 진수를 압축적으로 펼쳐보였다. 전시에는 고인이 남긴 조각, 드로잉, 영상, 모형 등 총 48점이 나왔다. 작품들은 평면과 입체, 실상과 허상, 사물과 정신이 서로 자유롭게 넘나들고 조화를 이루며 맑은 예술의 하모니를 보여준다. 비록 무쇠로 만든 작품이 많지만 어깨에 잔뜩 힘을 준 작품이 아닌, 더없이 간결하고 세련된 작업이어서 시각예술의 정점에 닿고 있다.
홍익대학교 조소과와 대학원을 나와 1973년 국전에 입선하며 작가로 활동을 시작한 김인겸은 40년여 년간 조각과 드로잉, 영상, 설치형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그의 예술 여정은 '환기'(1980~86), '묵시공간'(1987~91), '프로젝트'(1992~95), '빈 공간'(1999~2006), '스페이스리스'(2007~2011) 시리즈로 이어져왔다. 이번 전시는 1988년의 '묵시공간'부터 2015년 '스페이스리스' 드로잉까지 전 생애에 걸친 작품이 망라됐다.
그는 1988년 첫 개인전에서 '묵시공간' 시리즈를 발표했다. 흔히 조각이라고 하면 돌이나 나무, 금속으로 형태를 만드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그는 특이하게도 이 시기부터 철을 소재로 심플하고도 구조적인 조각을 시도했다.
이 시기 김인겸의 조각은 전통과 현대조각의 접목을 추구하며 전개됐다. 옛 사찰과 고건축, 왕릉을 찾아다니며 "우리 조상들이 남긴 조형미의 특징은 무엇인가"를 탐구했고, 서양 일변도의 조각이 아닌 우리 자신의 지혜를 담은 '묵시성'을 고찰하는데 몰두했다. 팔각의 수레바퀴, 옛 봉투, 문짝, 비석같은 전통문화의 상징적 형상들이 넌지시 담긴 것도 그 때문이다. '묵시공간'은 첫 전시 이후 평생 천착한 주제가 됐다. 이번 전시에 당시 제작한 '묵시공간'이 나와 그 의미가 새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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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뉴스핌] 작가 김인겸이 1992년 문예진흥원 미술회관에서 개인전 '프로젝트: 사고의 벽'을 개최하며 제작한 모형. 이 모형을 기반으로 대형 설치작품을 선보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인당뮤지엄 전시에 이 모형이 나와 33년 전 대단히 혁신적이었던 전시를 유추해볼 수 있다. [사진=이영란 미술전문기자] 2025.11.06 art29@newspim.com |
김인겸은 1992년 동숭동의 문예진흥원 미술회관(현 아르코미술관)에서 개인전 '프로젝트-사고의 벽'을 열어 큰 반향을 일으켰다. 당시 그는 5톤 트럭 5,6대 분량의 대형 철판을 용접해 미술회관에 12개의 비정형의 사각 방을 만들었다. 방과 방 사이에는 오목과 볼록의 스레인리스 거울을 설치했다. 하나의 프로젝트가 한 점의 설치미술이자, 하나의 전시였던 것이다.
좁은 문으로 미로같은 길을 찾아들어가면 8개의 방으로 둘러쌓인 중앙의 '사고의 방'에 도달한다. 이 내밀한 방 모서리에 삼각기둥을 설치하고 그 안에 촛불을 켜두어 어두운 공간 속 관람객이 움직일 때마다 빛과 그림자가 거울에 투영된다. 관람객이 참여하는 '공감각적 설치작업'이 그로 인해 주목받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이 프로젝트를 위해 제작한 모형과 현장 촬영영상이 이번 회고전에 나왔다.
1995년 베니스비엔날레에 한국관이 처음 들어섰을 때 김인겸은 윤형근, 전수천, 곽훈과 함께 참여했다. 김인겸의 출품작 '프로젝트21-내추럴 네트'의 모형과 한국관 설치영상도 전시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두 모형은 모두 작가가 직접 제작한 것으로, 전시 준비단계에서 언제나 해당공간의 모형을 완벽하게 만들었던 작가의 치밀한 성품을 엿볼 수 있다. 1990년대에 행한 이들 프로젝트는 기존의 조각 개념을 뛰어넘으며 '인스톨레이션'으로 전환하는 중요한 지표가 됐다. 뿐만 아니라 국내 미술계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치기에 이른다. 이를 통해 김인겸은 물리적 공간을 넘어서는 '사유의 공간'으로 조형의 지평을 더욱 넓히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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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뉴스핌] 퐁피두센터 초청으로 도불한 후 김인겸이 제작한 '드로잉 스컬프쳐'. 1997. 퐁피두센터에서 펴낸 전시리플릿에 자신의 조각(묵시공간)을 드로잉으로 선보인 '회화적 조각'이다. 이번 전시를 통해 최초로 공개되는 석점의 연작 중 한 점이다. [사진=이영란 미술전문기자] 2025.11.06 art29@newspim.com |
1996년 프랑스 퐁피두센터로부터 초청을 받아 도불한 김인겸은 8년간 프랑스에 체류하며 새로운 실험을 이어갔다. 당시 제작한 작품 중 3점의 '드로잉 스컬프처'가 이번 전시를 통해 최초로 공개된다. 퐁피두센터가 펴낸 전시리플릿 위에 김인겸은 먹을 사용해 겹겹이 서있는 조각을 단순하지만 파워풀하게 드로잉했다. 이후 김인겸에게 드로잉은 조각과 같은 무게를 지닌 창작으로 발전했다.
그가 '이미지 조각'이라 부른 '스페이스리스' 연작은 '회화적 조각'에 해당된다. 회화와 조각, 현실과 이상, 물질과 정신의 개념을 질문하고 그 경계를 넘나드는 김인겸 예술의 '혼성과 융합'이 결집된 세계가 곧 이 연작이다.
'빈 공간' 시리즈에서 김인겸의 조각은 '종이접기'처럼 더욱 자유로워졌다. 철판을 얇게 제작해 마치 종이를 접듯 접거나 둥글게 마는 방식으로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이 방식으로 그의 조각엔 보다 높은 유연성이 더해졌다. 조각의 입체감도 더 살아났다. 작품은 U자형이나 배 모양으로 세워지기도 하고, 살짝 구부려 벽에 기대지는 등 철의 숨은 속성인 유연성으로 다양한 표현이 가능해졌다. 조각의 부피는 줄었지만 접는 방식에 따라 표현의 다양성도 확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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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뉴스핌] 인당뮤지엄 5전시실에 설치된 김인겸 작가의 1990년도 작품 앞에서 포즈를 취한 작가의 딸 김재도 홍익대학교 초빙교수(왼쪽)와 아들인 사진작가 김산. [사진=이영란 미술전문기자] 2025.11.06 art29@newspim.com |
'빈 공간' 시리즈는 보이지 않는 부분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촉발됐다. 그것은 곧 자신의 조각이 더 깊은 사유의 공간으로 거듭나 정신성이나 영성을 드러내길 바라는 의지에서 비롯된 작업이다.
인당뮤지엄 로비에 전시된 '묵시공간-존재'는 총 7점의 작품이 하나로 연결된 군집형 설치미술이다. 단독으로 독립된 작품이지만 공간에서 상호작용하는 설치작품으로 변용된 것. 서로 다른 물성(녹슨 철, 브론즈, 투명아크릴, 불에 탄 나무 등)으로 제작된 의자 형상의 작품은 철제 테이블을 중심으로 말없이 모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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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뉴스핌]이영란 미술전문기자=김인겸 '묵시공간- 존재' 1996. [사진=인당뮤지엄] 2025.11.08 art29@newspim.com |
이 작품은 존재가 남긴 흔적, 그렇지만 지금은 부재한, 그러나 존재하는 '드러나는 공간-존재'를 보여준다. 조각을 단순히 형태미나 조형미에 가둬두길 거부하고 공간적, 감각적, 개념적 사유를 수반하는 영역으로 넓힌 김인겸의 예술관이 잘 스며든 작품이다.
전시를 기획한 인당뮤지엄 김정 관장은 "이번 김인겸 작가의 전시는 조각이 단순히 형태를 만드는 행위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인식하게 하고, 사유하게 하는 예술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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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뉴스핌] 김인겸 작가의 '공간의 시학'전을 기획한 인당뮤지엄 김정 관장. 작가가 남긴 작품들이 워낙 방대하고 앞선 작업들이 많아 이를 선택과 집중을 통해 김인겸 예술세계를 압축적으로 전달하는 것이 가장 어려웠다고 밝혔다. [사진=이영란 미술전문기자] 2025.11.06 art29@newspim.com |
◆인당뮤지엄은 어떤 곳?=대구보건대학교의 인당뮤지엄은 본래 인당박물관으로 출발했다. 2007년 한국의 전통목가구와 규방용품 등을 컬렉션하고 전시하는 전문박물관으로 개관해 운영하다가 2016년 현대미술을 담는 인당뮤지엄으로 전환됐다. 이후 박선기, 홍경택, 이명미, 이배, 윤희, 오수환, 남춘모, 최병소 개인전 등 획기적인 기획전을 잇따라 개최해 대구에서는 물론 전국적으로 호응이 이어지고 있다.
인당뮤지엄은 국내의 대학 부설 미술관 중 단연 톱클래스다. 대학교가 설립해 운영하는 미술관 가운데 서울대미술관 등을 제외하고는 기획전시라든가 각종 프로그램에서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사립대학교 미술관 중에서는 가장 괄목할만한 뮤지엄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설립자 부부의 문화예술에 대한 깊은 통찰과 비전, 열정 때문이다. "보건대학교에 왜 미술관이 필요하냐?"고 의아해하는 이들이 있지만 인당뮤지엄은 예술인문학의 필요성이 어느 때보다 중요시되는 시기에 재학생들은 물론, 일반 대중에게 우수하고 혁신적인 프로그램으로 문화예술을 향수할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인당뮤지엄이 적지않은 예산을 투입해 매년 선보이는 기획전을 보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대구를 찾는 이들이 늘고 있다. 골수 관람객도 적지않다. 인당은 예술애호가들 사이에 '꼭 가봐야 할 뮤지엄'으로 자리매김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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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뉴스핌] 대구보건대학교 캠퍼스에 자리잡은 인당뮤지엄. 미술관 앞 잔디광장에 회고전이 한창인 김인겸 작가의 돌 조각이 설치됐다. 인당뮤지엄은 매년 3~4건의 다양한 기획전시와 프로그램을 지속적으로 선보이고 있다. [사진= 이영란 미술전문기자] 2025.11.09 art29@newspim.com |
이번 '김인겸: 공간의 시학'전을 개최하며 인당뮤지엄을 총괄하는 남성희 총장이 홈페이지에 남긴 글이 인상적이다. "종종 '철인'이라는 말을 듣습니다. 한번 뜻을 품으면 불리한 외부환경이나 내부 파열음도 다독거리며 해내고야 마는 성격이라 그 표현이 싫지만은 않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놓치고 있는 게 있지요. 철의 물성 중 '연성'입니다. 온도에 따라 잘 늘어나고 얇게 펴지기도, 쉽게 접히거나 구부러지기도, 단단하게 압축되기도, 다른 성분과 결합해서 부식의 공포에서 벗어나기도 합니다. '연성'은 맞닥뜨린 상황에 따라 다양한 변주가 가능한 철의 가장 큰 장점이지요. 어려운 과제를 잘 풀어내기 위한 지혜를 철에서 배웁니다. 강하기만 해서는 안 되고, 유연하며, 내 마음을 반쯤 비워 너에게도 공간을 내어주고, 의지가 없이 누워있다면 소원지처럼 접어서 일으켜 세워야 합니다.
김인겸 선생님이 '비워내기의 달인'인 것은 철을 닮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아니 철이 곧 당신이었나봐요. 생 속이었던 철덩어리를 당신의 숙명으로 끌어안고 펴고, 접고, 비우고 누군가가 들어올 공간을 넓히고 넓혀 텅 빈 공간을 충만하게 채우는 마술. 철의 마지막으로 꼽히는 물성은 열전도율이라지요. 김인겸 선생님의 마술로 데워진 인당의 공간 속에서 여러분들도 서늘한 가을밤의 한기를 데워보시면 좋겠습니다". 인당뮤지엄의 김인겸 회고전은 내년 1월 17일까지 계속된다. 일요일 휴관.
art29@newspim.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