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고마기' 무속신화 통해 부침 심한 여성의 삶 노래
'깨진 아름다움'과 '누추한 아름다움'의 미학 담아
[서울 = 뉴스핌] 오광수 문화전문기자 = '다시 살아도 이렇게 살게 될 거야/ 스무 살에 연애를 하고/ 둬번쯤 긴 키스를 꿈꾸다가/ 사소한지 모르는 결혼을 하고/ 사소한지 모르는 이별을 하고/ 헐떡헐떡 뛰어가 버스를 타고/ 잠시 숨을 멈추는 동안/ 사소하고 사소하게 정찰표를 들여다보네/ 하루에도 몇 번씩 엘리베이터로 승천을 하고/ 에스컬레이터로 세상을 굽어 보며/ 내가 종족의 한 명임을 짐작하네/ 문득 별이 가까이 오는 저녁이면/ 뉴스를 보며 내가 그 여러 통계의 하나임을 실감하고/ 사소하고 사소하게 잠드네' -'인생'에서.
[서울 = 뉴스핌] 오광수 문화전문기자 = 강은교 신작 시집 '미래슈퍼 옆 환상가게' 표지. [사진 = 민음사 제공] 2024.07.30 oks34@newspim.com |
해방둥이 시인 강은교가 신작 시집 '미래슈퍼 옆 환상가게'(민음사)를 내놨다. '미래'와 '환상'이라는 단어와 달리 황혼의 조명 아래 환히 드러나는 일상의 사소한 풍경, 그 가볍고도 무거운 생의 진경을 담아낸 시집이다. '풀잎','허무집' 등의 시집을 통해 허무의 심연과 윤회적 가치관을 노래한 시인이 근래 천착해 온 테마는 '당고마기고모'다. '당고마기'는 '바리공주'와 더불어 한국의 대표적인 무속 신화다. 당고마기 서사의 핵심에는 잉태와 출산이 있다. 잉태하고 출산하는 과정에서 수난을 겪은 여성이 신이 되는 과정을 이야기한 신화 등 다양한 서사들이 당고마기를 중심으로 전승된다.
앞선 시집의 연장선상에서 이번 시집에도 당고마기고모가 등장한다. 신화적 인물에 더해 혈연 기반의 호칭이 더해져 '당고마기고모'는 유장하고 장대한 시간 속에서 개인의 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강은교만의 거리가 된다. 당고마기고모에게서 계승된 우리의 고통, 우리의 고통으로 연장된 당고마기고모의 삶이 교차하는 곳에는 '깨진 아름다움'이 있다. 젊은 날의 아름다움과는 달리 황혼기의 아름다움은 미래도, 환상도, 다 깨진 뒤에 알게 되는 누추한 아름다움이다. 그 아름다움에는 서글픈 가운데 결코 불행해지지 않는 대범하고도 담대한 사랑의 미학이 있다.
이 시집의 자서에서 강은교 시인은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문장을 쓴다. "시여, 달아나라, 시여, 떠나라, 시의 늪들을./ 그때 시는 비로소 일어서리니." 시에 대한 결심인 동시에 인생에 대한 결심이라고 해도 오독은 아닐 것이다. 인생이여, 달아나라, 떠나라, 인생의 늪들을. 그때 인생은 비로소 일어서리니. 일평생 시로 살아온 시인이 시에 대해 하는 단 한마디 말은 시로부터 달아나라는 것. 미래와 환상으로부터 달아나라는 것, 그때 비로소 미래도 환상도, 말하자면 우리가 기다리는 인생이 우리를 향해 돌아볼 것이라고 말한다.
"고모, 노을이질 때가 됐어요" 나는 이층 계단에 올라 서서 외쳤어. 그리고 마구 뛰어 올라갔어. 구석에 있던 의자를 번쩍 들고, 고모가 느릿느릿 걸어오셨어. 고모는 의자에 풀썩 앉으셨어. 마치 싫은 자리에라도 억지로 앉는 듯이, "고모, 고모, 어디 아프세요?" "아니, 아니, 노을을 보려니 내가 사라지는 것 같애" 고모의 비스듬한 웃음, 나는 고개를 숙였어. 나도 사라지는 것 같았기 때문이야. 우리는 나란히 해를 바라보기 시작했어. -'노을이 질 때'에서.
문학평론가 박혜진은 해설에서 '강은교에게 삶은 깨는 것'이라고 말한다.
'달콤하리라는 환상, 괜찮아질 거라는 환상, 한 번 더 살면 이렇게는 안 살 거라는 환상…. 환상과 미래는 붙잡으려 할 수록 더 멀어진다. 손바닥을 펴 보면 그 위에는 깨진 환상, 깨진 미래, 깨진 낭만이 부서져 반짝일 뿐. 속절없는 파편의 무리들, 그러나 깨진 반짝임이야말로 "드넓은 여기 사랑하올 것들"이자 "우리들의 누추한 아름다움"인 줄 알때, 이제 쓸쓸함을 아는 이, 이제 홀로임을 아는 이, 이제 울음을 아는 이, 그리하여 이제 늙음을 아는 이 강은교는 바야흐로 용서를 노래해도 섭섭지 않은 시인.'
시집을 덮으면 박혜진의 해석에 공감할 수 있다, 1968년 월간 '사상계' 신인문학상으로 등단한 강은교는 이제 시력 50년이 넘는 시인이 됐다. 그가 내놓은 시집의 깊이가 읽는 이의 마음을 심연으로 이끈다.
oks34@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