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에 걸쳐 시집 3권 펴내고 2009년 투병 끝에 작고
선후배 시인들 유고시선집 '빨간 우체통 앞에서' 펴내
[서울 = 뉴스핌] 오광수 문화전문기자 = '새를 띄우려고 우체통까지 가서는 그냥 왔다/ 오후 3시 정각이 분명했지만 그냥 왔다/ 우체통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지만 그냥 왔다/ 난 혓바닥을 넓게 해 우표를 붙였지만 그냥 왔다/ 논병아리로라도 부화될 것 같았지만 그냥 왔다/ 주소도 우편번호도 몇 번을 확인했다 그냥 왔다/ 그대여 나의 그대여 그 자리에서 냉큼 발길을 돌려서 왔다/ 우체통은 빨갛게 달아올랐다/ 알 껍데기를 톡톡 쪼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냥 왔다/ 그대여 나의 새여 하늘은 그리도 푸르렀건만 그냥 왔다/ 새를 조각조각 찢어버리려다가/ 새를 품에 꼬옥 보듬어 안고 그냥 왔다.'- '빨간 우체통 앞에서' 전문.
[서울 = 뉴스핌] 오광수 문화전문기자 = 시인 신현정. 2024.03.28 oks34@newspim.com |
2009년 작고한 신현정 시인의 시세계에 대한 재조명 작업이 활발하다. 세상을 떠난 지 15년이 됐지만 최근 선후배 시인들이 뜻을 모아서 유고 시선집 '빨깐 우체통 앞에서'(도서출판 도훈)를 펴냈다. 환갑을 갓 넘긴 나이에 지병으로 투병하다가 세상을 떠난 시인은 마지막 순간까지 시를 놓지 않았다. 그는 문학청년 시절부터 죽는 날까지 진정성을 가지고 시를 쓰던 천상 시인이었다.
'꽃말을 알지 못하지만 나는/ 사루비아에게/ 혹시 병상에 드러누운 내가/ 피가 모자랄 것 같으면/ 수혈을 부탁할 거라고/ 말을 조용히 건넨 적이 있다/ 유난히 짙푸른 하늘 아래에서가 아니었는가 싶다/ 사루비아, 수혈을 부탁해.'- '사루비아' 전문.
소설가이자 시인의 대학 후배인 소설가 이시백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병고 속에서도 그가 잃지 않았던 시에 대한 사랑은 삶에 대한 조용한 그의 웃음이며, 그가 꿈꿔온 세상의 화창함이었다"면서 "그는 세계와 자아 사이에 연결된 아주 섬세한 더듬이를 가지고 있어 보인다"고 쓰고 있다. 특히 작고하기 전 5년에 걸쳐 잇달아 3권의 시집을 펴내면서 오롯이 시를 향해 달린 그의 시정신을 높이 평가했다.
[서울 = 뉴스핌] 오광수 문화전문기자 = 신현정 유고시선집 '빨간 우체통 앞에서'. [사진 = 도서출판 도훈 제공] 2024.03.28 oks34@newspim.com |
홍일표 시인은 이번 시선집의 발문에서 "무위와 천진난만한 웃음, 선량한 시심이 신현정 시의 고유한 특징이다. 그는 평소 지론대로 사물을 주인공으로 세우고 자신은 엑스트라가 되어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넘나들며 무위와 실컷 놀다 간 시인"이라고 썼다.
이건청 시인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한국시인협회상 심사 당시 일화를 공개했다. 이건청 시인은 "신현정의 시집 '자전거도둑'이 나왔을 때, 나는 한국시인협회상 심사에 참여하게 되었다"면서 "당시 예심을 거쳐온 10권의 시집이 결선에 올랐는데 신현정의 것이 독보적이었다"고 밝혔다. 이시인은 "신현정은 아직 젊은 시인이니, 다음 기회를 보자는 중론이었다"면서 "그때 치열한 논의를 거쳐 신현정의 시를 선정, 그의 시가 옳게 평가받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했다.
신현정 시인은 중앙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한 뒤 1974년 '월간문학'으로 등단, 서라벌문학상(2003), 한국시문학상(2004), 한국시인협회상(2006)을 받으면서 서정적이면서도 해학이 넘치는 시로 주목받았던 시인이었다. 시집 '대립', '염소와 풀밭', '자전거 도둑'. '바보사막', '난쟁이와 저녁식사를', '화창한 날'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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