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거미 지는 어스름 저녁의 시간
석양은 아름답지만 찰나일 뿐
[서울 = 뉴스핌] 오광수 문화전문기자 2024.01.31 oks34@newspim.com |
[서울 = 뉴스핌] 오광수 문화전문기자 = 해가 질 무렵은 모든 것의 경계에 있다. 황혼과 석양이 물들고, 땅거미가 지면서 어스름 저녁이 찾아온다. 순식간에 빛과 어둠으로 나뉜다. 지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해가 뜰 때보다 해가 질 때 더 감상적이 된다. 태어남보다는 죽음에 가까운 시간이다.
[서울 = 뉴스핌] 석양 무렵 바다 저편으로 지는 태양. [사진 = 양재명 작가 제공]오광수 문화전문기자 2024.01.31 oks34@newspim.com |
'어렸을 적 낮잠 자다 일어나 아침인 줄 알고/ 학교까지 갔다가 돌아올 때와/ 똑같은, 별나도 노란빛을 발하는 하오 5시의 여름 햇살이/ 아파트 단지 측면 벽을 조명할 때 단지 전체가 피안 같다/… / 어디선가 웬 수탉이 울고, 여름 햇살에 떠밀리며 하교한 초등학생들이/ 문방구점 앞에서 방망이로 두더지들을 마구 패대고 있다.' - 황지우 시인 '아주 가까운 피안' 일부.
누구나 한 번쯤 짓궂은 부모님이나 형, 누이에게 속아서 낮잠을 자다가 일어나 허겁지겁 학교에 간 경험이 있을 것이다. 아침인지 저녁인지 분간할 수 없는 낮과 밤의 경계 어디쯤에 있는 '해질 무렵'은 그래서 아름다운 시간이다. 어린 시절 즐겨보던 다큐멘터리 '동물의 왕국'에서 해가 지는 아프리카 초원을 가로지르는 기린이나 사자, 코끼리의 모습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 동물들보다도 이글이글 타던 태양이 아프리카 초원을 달구며 서쪽으로 넘어가는 웅장한 석양의 풍경 때문에 더 오래 기억에 남아있다.
[서울 = 뉴스핌] 길 위에서 만나는 황혼은 우리네 인생의 한 순간을 닮았다. [사진 = 양재명 작가 제공] 오광수 문화전문기자 2024.01.31 oks34@newspim.com |
'누군가 삶을 마감하는가 보다/ 하늘에는 붉은 꽃이 가득하다// 열심히 살다가/ 마지막을 불태우는 목숨/ 흰 날개의 천사가/ 손잡고 올라가는 영혼이 있나 보다// 유난히 찬란한 노을이다' - 서정윤 '노을' 전문
해가 지는 저녁, 서쪽 하늘을 물들이는 노을은 우리를 황홀하게 만든다. 매일 모습을 달리하는 황혼은 마치 인간에게 주는 슬픈 선물 같다. 이승철이 영화 '청연'의 주제곡으로 처음 부른 뒤 Mnet의 '슈퍼스타K'에서 울랄라세션이 불러 유명해진 '서쪽 하늘'은 노을과 잘 어울린다.
'서쪽 하늘로 노을은 지고/ 이젠 슬픔이 돼버린 그대를/ 다시 부를 수 없을 것 같아/ 또 한 번 불러 보네/ 소리쳐 불러도 늘 허공에/ 부서져 돌아오는 너의 이름/ 이젠 더 견딜힘조차 없게/ 날 버려두고 가지.'
그러나 이 노래와 연관됐던 연예인들 중에서 세상을 달리한 사람이 많다. 영화의 주인공이었던 장진영과 김주혁이 차례로 세상을 떠났고, 환상적인 편곡을 선보였던 울랄라세션의 리더 임윤택도 저 세상 사람이 됐다.
'난 너를 사랑하네/ 이 세상은 너뿐이야/ 소리쳐 부르지만/ 저 대답 없는/ 노을만 붉게 타는데'로 친숙한 이문세의 '붉은 노을'은 고 이영훈이 만든 곡이다. 그도 이 세상에 없지만 그가 만든 붉은 노을은 오늘도 서쪽 하늘을 물들인다. 윤도현밴드나 빅뱅 등 수많은 가수가 리메이크하면서 여전히 사랑받고 있다. 해질 무렵 차를 몰고 한강을 건너다가 지는 노을에 취할 때가 있다. 그럴때면 문득 서해 어디쯤으로 차를 몰아 달려가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서울 = 뉴스핌] 빛과 어둠의 경계에 석양이 걸려 있다. [사진 = 양재명 작가 제공] 오광수 문화전문기자 2024.01.31 oks34@newspim.com |
우리에게 서해는 일몰(日沒)의 바다다. 붉은 낙조와 밤의 고요, 끝없는 갯벌의 바다다. 하여, 한 해가 저물 때면 동해보다 서해가 먼저 떠오른다. 정태춘은 서해의 속살을 가장 잘 아는 가수다.
'서해 먼 바다 위론 노을이 비단결처럼 고운데/ 나 떠나가는 배의 물결은 멀리멀리 퍼져간다/ 꿈을 꾸는 저녁 바다에 갈매기 날아가고/ 섬마을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물결 따라 멀어져 간다.' -'서해에서' 일부.
정태춘에게 고향 평택에서 가까운 서해는 특별했다. 재수생활을 접고 인천 부근 해안가에서 군 복무할 때 쓴 곡이다. 고래를 잡으러 떠나던 송창식의 바다도, 영일만 친구가 있는 최백호의 바다도 아니었다. 그에게 서해는 간척지를 밑천 삼아 농사를 짓던 고향 사람들의 땀과 눈물이 배어있는 삶의 터전이었다.
해질 무렵은 늘 찰나의 시간이다. 붉은 석양이 온 하늘을 물들이는 순간은 우리 인생의 행복했던 한때처럼 짧고 강렬하다. 그 찰나를 붙들어 둘 재주를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마음속에 꼭 담아두었다가 한 번씩 펼쳐볼 일이다. 조용필의 '서울 서울 서울'을 배경으로 깔아도 좋다. '해질 무렵 거리에 나가 차를 마시면/ 내 가슴에 아름다운 냇물이 흐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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