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찌의 케링그룹, '피노 콜렉시옹' 개관으로 파리 현대미술 메카 노려
2014년 개관 '퐁다시옹 루이뷔통'은 '모로조프 특별전'으로 이에 반격
케링그룹 피노 회장과 LVMH 아르노 회장의 자존심 대결 주목
[서울=뉴스핌] 조용준 기자 = 파리의 미술관은 루브르(Louvre)와 오르세(Orsay)만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다. 둘 다 전설적인 전통의 미술관이지만, 파리에는 이들의 명성을 따라잡고 있는 새로운 강자들이 있다. 바로 '퐁다시옹 루이뷔통(Foundation Louis Vuitton)'과 '부르스 드 코메르스 - 피노 콜렉시옹(Bourse de Commerce - Pinault Collection)' 등이다.
현재의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언제나 다시 자유로운 여행이 가능해질지 모르지만, 조만간 우리나라에서도 시행될 '위드 코로나' 를 염두에 두고 파리의 새롭게 떠오른 핫 플레이스로 사람들을 모으고 있는 두 미술관을 소개한다. 이들은 럭셔리 패션업계의 두 강자 '뤼이뷔통 모에 헤네시(LVMH)'와 구찌, 보테가 베네타 브랜드 등을 소유하고 있는 케링그룹(Kering Group)이 내세운 미술관이라는 점에서도 관심을 모은다.
'퐁다시옹 루이뷔통'의 개관은 2014년 10월 20일이다. 루이뷔통은 10월 1일 패션쇼를 통해 이 새로운 건물을 참석자들에게만 미리 공개한 후, 20일에 당시 올랑드 대통령과 전 세계 유명 인사들을 초청한 공식 개관식을 열었다. 올랑드 대통령은 개관 선언을 통해 이 미술관이 "지성, 창조성, 상상력, 기술의 조합"이라고 극찬했다.
그러나 올랑드의 이런 극찬이 전혀 과장되게 느끼지 않는 것은, 이 미술관 건축을 위해 LVMH 베르나르 아르노(Bernard Arnaultㆍ73) 회장이 들인 공이 그만큼 빛을 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르노 회장은 이 미술관 건립을 위해 구겐하임 미물관 디자인으로 스페인 빌바오 시에 새로운 활력을 부여한 건축가 프랭크 게리(Frank Gehryㆍ91)와 2001년 의기투합했다.
그런 다음 2006년 루이뷔통 재단을 본격적으로 설립하고 그 해 12월 파리 시와 공공부지 임대 계약을 위한 협약을 체결해 약 10,000m² 부지를 55년 간 빌리기로 했다. 이듬해 여름 기획안 허가를 거쳐 2008년 3월 착공에 돌입, 1년 후 토목 공사를 시작했고, 다시 1년 뒤 건물 모형도를 제작해 퐁피두 메츠센터 개관전에서 건물 모형을 세상에 공개했다. 미술관 완성은 2013년 12월이었으니, 기획 단계부터 무려 13년, 공사 착공으로부터도 5년여의 시간이 흘렀다.
이렇게 탄생한 퐁다시옹 루이뷔통의 모습은 한 마디로, 파리 볼로뉴 숲 아클리마타시옹(Aacclimatation) 공원에 불시착한 외계의 유리 난파선이라 할 수 있다. 빌바오의 구겐하임이 그랬던 것처럼, 이 미술관은 마치 거대한 우주선을 탑승하는 듯한 초자연적 느낌을 준다.
[서울=뉴스핌] 조용준 논설위원 = 난파한 유리 우주선의 모습을 하고 있는 퐁다시옹 루이뷔통 미술관. 2021.10.01 digibobos@newspim.com |
현재 이곳에선 11개의 전시실에서 재단 미술관 소장품과 아르노 회장의 개인 소장품을 전시하는 컬렉션 상설전, 그리고 1년에 두 번 열리는 기획전, 음악 콘서트 등이 개최된다. 미술관의 콘서트는 공간의 제약으로 인해 매우 힘든 기획이지만, 이곳은 처음부터 공연을 위한 350석 규모의 모듈식 오디토리움을 만들었다.
이 미술관의 경험은 이를테면 이런 것이었다. "루이뷔통의 가죽 가방, 디올(Dior)의 드레스, 펜디(FENDI)의 모피, 셀린느(CELINE)의 테일러드 코트, 그리고 샴페인 병들의 산더미!". 그런데 지난 9월 22일 퐁다시옹 루이뷔통이 새롭게 시작한 기획전인 '모로조프 특별전'은 이런 경험에 짙은 인상주의와 야수파의 고전적 향취를 더욱 배가시키고 있다.
[서울=뉴스핌] 조용준 논설위원 = 퐁다시옹 루이뷔통 입구에 세워진 모로조프 특별전의 대형 입간판. 2021.10.01 digibobos@newspim.com |
러시아의 대부호 모로조프 가문의 일원이었던 이반 모로조프(Ivan Aleksandrovich Morozov, 1871-1921)는 섬유공장을 경영하면서 프랑스 근대회화를 수집한 세계적인 컬렉터였다. 역시 러시아의 유명한 대수집가인 세르게이 시추킨(Sergei Ivanovich Shchukin)과 견주어지는 그의 수집품에는 세잔(17점), 고갱(11점), 고흐(5점), 마티스, 보나르, 드니, 모네, 르누아르, 피카소 등의 작품이 포함돼 있다. 이렇게 모은 수집품들은 러시아혁명 후 국가 소유가 되었으며, 1948년 이후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주미술관과 모스크바의 푸시킨미술관에 분할 소장되었다.
이번 특별전을 위해 에르미타주와 푸시킨미술관의 상당수 작품을 대여해온 탓에 이번 기획전은 기간이 그리 길지 못하고 내년 2월까지만 개최된다.
[서울=뉴스핌] 조용준 논설위원 = 퐁다시옹 루이뷔통 모로조프 특별전시실 입구. 2021.10.01 digibobos@newspim.com |
'부르스 드 코메르스 피노 콜렉시옹(Bourse de Commerce Pinault Collection)'의 '부르스 드 코메르스'는 우리말로 상업거래소다. 그러니 이 미술관은 파리의 옛 상업거래소 건물을 개조한 현대미술관이다. 지난 5월 22일 공식 개관한 '따끈따끈한' 장소다. 이는 파리 도심 레알(Les Halles) 지역에 자리한 역사적 기념물이 현대미술관으로 탈바꿈했다는 사실만으로도 화제가 되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현대 건축계의 살아 있는 전설 안도 다다오가 건물 리노베이션을 지휘한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전 세계 예술 애호가들의 기대감이 최고조에 달했다.
[서울=뉴스핌] 조용준 논설위원 = 파리 중심지구의 옛 상업거래소 건물을 리노베이션해서 개관한 피노 콜렉시옹 미술관 입장을 위해 관람객들이 줄지어 기다리고 있다. 2021.10.01 digibobos@newspim.com |
안도 타다오의 지휘로 4년간의 공사 끝에 다시 태어난 '피노 콜렉시옹'은 기본적으로 '퐁다시옹 루이뷔통'에 대적하는 케링 그룹(Kering Group) 프랑수아 피노(François Pinaultㆍ85) 회장 집념의 산물이다.
구찌, 보테가 베네타, 생로랑, 발렌시아가, 알렉산더 맥퀸 등 명품 브랜드를 소유하고 있는 케링 그룹은 매출에서는 '뤼이뷔통 모에 헤네시(LVMH)'에 뒤지는 2위이지만, 피노 회장은 자신이 예술 컬렉터로서는 아르노 회장보다 한 수 위라고 항상 생각해왔다. 그도 그럴 것이 세계 1위의 미술품 경매회사 '크리스티(Christie)'의 오너이자, 일찍이 이탈리아 베니스에 2개의 뮤지엄을 세우고 수년째 운영 중인 관록이 있기 때문이다.
라이벌 아르노 회장이 일찌감치 파리에 '퐁다시옹 루이뷔통'을 만들어 대중적 인기도를 이끌어가면서 예술적 지명도를 끌어올린 반면, 자신은 정작 고국에 그럴싸한 자신의 업적을 남기지 못한 사실에 늘 아쉬움을 갖고 있다가 드디어 팔순이 넘어 필생의 과업을 실현한 것이다.
피노 회장은 인터뷰에서 "사업(럭셔리 패션업)에 있어선 아르노와 라이벌일 수 있으나 뮤지엄에 있어서는 라이벌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 경쟁할 의사 또한 없다"고 선을 그었지만, 럭셔리 패션사업의 두 숙적이 각기 파리에 미술관으로 세운 이상 공개적인 대결 구도는 불가피하다. 현대 미술에 대한 전시 공간이 크게 부족한 파리의 특성을 고려해 피노 콜렉시옹이 현대미술관으로 방향을 정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파리 시로서는 피노 콜렉시옹의 등장을 통해 파리가 현대미술의 전진기지로서도 부상할 것을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피노 회장이 건물 재단장에 무려 1억7천만달러를 퍼붓고, 평소 친분이 있던 안도 타다오를 데려오는 등 엄청난 물량공세를 한 것에 비하면 미술관 내부는 지극히 단조롭다. 잔뜩 기대를 걸고 갖던 사람은 실망할 수도 있다. 이는 기본적으로 파리 시가 건물의 외관과 내부 문화유산에 어떠한 변경도 허락치 않은 제약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안도 타다오는 지름 40미터에 달하는 뻥 뚫린 원형 공간에 지름 30m, 높이 9m의 콘크리트 벽을 만드는데 그쳤다. '로통드(Rotonde)'라는 이름이 붙은 이 원형 전시관은 일단 구조물 자체로는 어떤 예술적 감흥을 느끼기 힘들고, 다만 이 구조물이 안에 놓일 예술품과 어떤 상관관계를 형성하느냐가 주된 포인트가 된다.
미술관의 심장부인 로통드를 차지한 영예의 첫 주인공으로 우르스 피셔(Urs Fischer)의 조각이 선정된 것도 아마 그런 이유였을 것으로 보인다. 각기 다른 시대와 국적의 의자, 인물상, 고전주의 조각상을 왁스 소재로 재현한 피셔의 조각은 전시의 시작과 함께 점화되어 서서히 녹아내리도록 고안되었다. 고전주의의 대리석 조각상과 달리, 가장 정적인 예술 매체인 조각에 '소멸'이라는 시간성을 부여함으로써 작품과 관객 사이의 새로운 긴장관계를 형성한다.
[서울=뉴스핌] 조용준 논설위원 = 피노 콜렉시옹 로통드 전시관 중앙에 놓인 우르스 피셔(Urs Fischer)의 왁스 조각상. 대리석 조각과 달리 시간의 흐름에 따라 녹아내리는 새로운 개념의 조각이다. 2021.10.01 digibobos@newspim.com |
전시실 역시 중앙의 원형 공간을 따라 바깥에 만들어진 계단을 통해 중앙과 외벽 사이 형성된 전시실을 옮겨 다니는 매우 단순한 구조다. 기본적으로 안도 타다오 특유의 상상력이 발휘되기에는 건물 특성의 한계가 명확했다는 사실이 엿보인다. 이런 단조로움을 극복하기 위해 미술관 측은 1측 원형의 회랑에서 24개 쇼윈도를 배치해놓았다.
이 쇼윈도에는 1889년 만국박람회를 위해 만들어진 베르트랑 라비에(Bertrand Lavier)의 작품을 전시해놓았다. 이제는 흘러간 옛 소비재 오브제를 모티브로 한 라비에의 작품들은 '새빨간 립스틱에 나름대로 멋을 부린 마담에게 실없이 던지는 농담'같은, 혹은 '옛날식 다방에서 즐기는 도라지 위스키 한잔'같은, '그야말로 가버린 세월이 서글퍼지는 추억'을 떠올리게 만든다.
오프닝을 의미하는 '우베르튀르(Ouverture)'라는 개관 기념 이번 전시에서 단연 주목을 끌고 있는 것 중 하나는 미술관 2층 전체를 할애한 현대 회화 전시다. 설치미술이 유럽 미술계의 주류로 자리매김하면서 현대미술관에서 평면 미술인 회화의 입지는 과거에 비해 많이 위축되었지만, 미술관은 나름대로 이를 타파하려는 새로운 시도의 회화 작품들을 잔뜩 배치해놓았다.
[서울=뉴스핌] 조용준 논설위원 = 피노 콜렉시옹을 들어서면 프랑스 현대작가 마르샬 레스(Martial Raysse)의 2012년 그림 '이 해변에서처럼(Ici plage, comme ici-bas)'이 제일 먼저 반겨준다. 2021.10.01 digibobos@newspim.com |
'개념 회화'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루돌프 스팅겔(Rudolf Stingel), 신체와 섹슈얼리티, 욕망을 탐구하는 여성주의 작가 미리암 칸(Miriam Cahn), 유럽 현대 회화 신의 대표적인 화가 피터 도이그(Peter Doig), 프랑스 미술계의 루키 클레어 타부레(Claire Tabouret), 가나 출신의 영국 작가 리넷 이아돔 보아키(Lynette Yiadom-Boakye)에 이르기까지 동시대 작가들을 한자리에 모아 현대 회화계의 역동성을 한눈에 볼 수 있게 해주고 있다.
사실 개인적 입장에서는 이 건물의 창을 통해 미술관 뒷편의 넬슨 만델라 정원과 샤틀레 레알(Châtelet–Les Halles)의 복합 쇼핑몰 건너편으로 보이는 퐁피두 미술관 전경이 제일 좋았다. 따라서 뭔가 이런 확장성을 염두에 두고 안도 타다오 특유의 감성을 발휘했더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짙게 남았다.
어쨌든 총면적이 3,000㎡에 달하는 이 건물은 전시실, 레스토랑, 명상실 등으로 구성돼 있다. 꼭대기 층의 레스토랑에도 피노 회장은 미슐랭 3개에 빛나는 스타 셰프 미셸과 세바스티앙 브라(Michel and Sébastien Bras) 부자를 데려왔다. 미셸은 지명도를 가진 가장 부유한 셰프의 한 명으로, 피노 회장은 이들을 데려오는데 막대한 돈을 들였다고 한다. '피노 콜렉시옹'이 '퐁다시옹 루이뷔통'을 능가하는 사교계의 중심이 되기 위해서는 미술관내 레스토랑이 그만큼 지명도가 있어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피노 콜렉시옹은 미술팬이라면 누구나 찾는 퐁피두센터와 루브르박물관 근처라는 점에서 일단 퐁다시옹 루이뷔통보다 지리적 이점을 안고 있다. 퐁다시옹 루이뷔통은 파리 외곽으로 접근성이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장을 위해 대기하는 줄은 루이뷔통이 더 길었다.
이 두 미술관의 위용에 조금은 눌린 모습이지만, 1984년 세워진 '퐁다시옹 카르티에(Foundation Cartier Pour l'art contemporain)'에서는 올해 1월부터 미술시장의 스타작가 데미안 허스트(Damien Hirst)의 특별전 '체리 블라섬(Cherry Blossoms)'이 열리고 있다. 재기발랄한 상상력으로 현대미술을 이끌어온 데미안 허스트도 이제 나이를 먹었는가. 1965년생으로 아직 환갑도 안되었지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작품에 꽃을 끌어들인 것은 뭔가 빈약해 보이기도 한다.
패션의 도시답게 역시 미술관 전시도 럭셔리 패션업계가 주도하고 있는 파리. 파리의 가울은 이렇게 흘러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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