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핌] 고홍주 기자 = 심리학과 행동경제학에는 '앵커링(Anchoring) 효과'라는 말이 있다. 배가 닻을 내리면 그 자리에 고정돼 한정된 범위 내에서만 움직일 수 있는 것처럼, 특정 숫자가 기준이 되면 생각이 그 숫자를 벗어나지 못하는 현상을 뜻하는 말이다.
김영란법, 정확히 말해 공직자 등에 대한 부정청탁과 금품수수를 금지하는 법 도입은 그동안 '정'이나 '관행'으로 둔갑할 수 있는 애매모호한 상황을 불법과 합법의 영역으로 가져온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일각의 우려와는 달리 사람들은 식사 3만원, 경조사비·선물 5만원, 농축산물 10만원 기준에 금세 적응했다.
고홍주 사회문화부 기자 |
하지만 여기에는 큰 맹점이 있다. 역으로 어떤 것이든 그 기준에 도달하지 않으면 괜찮다는 잘못된 생각까지 같이 심어주게 된 것이다.
대법원 법관징계위원회는 최근 사업가로부터 골프채를 수수한 서울중앙지법 소속 A부장판사에게 감봉 3개월의 징계를 내렸다. 당초 A부장판사가 수수한 골프채는 수천만 원에 달하는 명품으로 알려졌으나, 법원 감정 결과 50여만원짜리의 소위 '짝퉁' 골프채라는 것이 이유였다. 수수금액이 청탁금지법상 처벌 기준인 '1회 100만원 이상 금품'을 넘지 않으니 검찰 고발 등 추가 조치도 없었다. 결국 짝퉁은 A부장판사에게 면죄부가 된 셈이다.
비단 이뿐일까. 지난해 연말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라임 술접대' 사건도 마찬가지다. 검찰은 김봉현 전 스타모빌리티 회장으로부터 술접대를 받았다는 검사 3명 중 1명만 재판에 넘겼다. 나머지 2명은 도중에 귀가했기 때문에 접대 받은 금액이 100만원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이후 인터넷 게시판에는 '검사님들을 위한 99만원 불기소 세트'라는 조롱글이 도배됐다. 1인당 접대 받은 술값이 얼마인지는 재판에서도 치열한 논박의 대상이 되고 있다. 공직자로서의 부적절한 접대에 대한 사과나 반성은 없고 접대 금액이 100만원을 넘느냐 마느냐만 남은 것이다.
우려스럽게도 최근 경찰에서 수사 중인 '가짜 수산업자' 사건도 논점이 금액으로 모이는 모양새다. 이동훈 전 조선일보 논설위원은 언론인 시절 가짜 수산업자 김 씨로부터 수백만원 상당 골프채 등을 수수했다는 의혹에 대해 "중고 골프채를 빌려쓴 것"이라고 해명했다. 이는 다분히 청탁금지법의 처벌 기준을 피하기 위한 주장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 주장이 인정된다면 수수금액은 100만원 미만이 될 확률이 크기 때문이다.
법률은 명확해야 하고 사안의 경중에 따라 죄책은 달라져야 하지만 본질을 생각해보고 따져야 한다. 청탁금지법의 본질은 금품을 수수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지 '100만원이상'의 금품을 수수하면 안 된다는 게 아니다. 어디에 닻을 내려야 할지 다시 생각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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