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 송영길 대표의 포항제철 발언에 대해
[서울= 뉴스핌] 조용준 논설위원 = 더불어민주당 송영길 대표가 지난 7일 국회에서 열린 민주당의 반도체기술특별위원회 회의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 만들어진 포항제철(현 포스코)은 일본 야하타 제철소를 벤치마킹한 것"이라고 말했다. 송 대표는 또 "당시 일본, 미국 등이 포스코 건설을 반대했다"면서 "박정희 정권이 포철을 만든 것은 대단히 의미 있는 성과로 생각한다"고 밝혔다.
박정희 정권 때 포항제철을 만든 것은 분명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성과다. 기공식은 1970년 4월 1일이었는데, 1968년 기준으로 국민소득이 200 달러도 되지 않았던, 방글라데시보다 가난한 나라에서 철강공장을 세우는 일은 기본적으로 피와 땀, 눈물의 결정체였다.
그러나 당시 한일관계에서 포항제철 건설은 매우 복합적인 의미를 지닌다. 특히 일본이 포항제철 건설을 반대했었다는 송 대표의 말은 잘못됐다.
1965년 한·일청구권 협정으로 일본이 건넨 8억 달러 가운데 3억 달러는 무상 경제협력기금이었다. 그런데 무상기금이 가장 많이 투입된 곳은 포항제철이다. 일본이 포항제철 건설에 동의한 것은 1969년 말로, 전체 청구권 자금의 15% 수준인 1억1948만 달러를 투입하는 협약을 맺었다. 무상 협력기금 용도를 농업 분야로 국한했던 일본 정부가 갑자기 포항제철 건설에 동의해준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1970년 4월 1일 포항제철 기공식. 왼쪽부터 당시 박태준 사장, 박정희 대통령, 김학렬 부총리(국가기록원 사진). |
1950년대와 60년대 일본은 중금속 오염병인 이타이이타이병과 미나마타병으로 환경오염 문제가 극심했다. 일본 미쓰이금속광업의 폐수로 인해 1910년대부터 나타나기 시작해 1970년대까지 이어졌던 이타이이타이병은 그 이름부터가 인근 주민들이 고통을 받으면서 '아프다, 아프다'라고 말한 것에서 비롯됐다. 미나마타병 역시 구마모토 현 미나마타 시의 공장 폐수에 의해 바다가 오염된 인류 역사상 최초의 대규모 수은중독 사건이었다.이 병은 1956년에 공식적으로 발견되었는데, 1997년이 돼서야 미나마타 만이 안전하다고 어업 재개가 허용됐다.
따라서 1960년대의 일본에서는 제철소나 화학공장 등을 늘리는 것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매우 컸다. 미쓰이광업에 대한 소송은 1968년부터 본격 시작됐다. 그런데 제철업은 공장에서 폐수가 많이 나온다. 환경문제로 골치가 아플 수밖에 없다.
1970년 한·일 협력위원회 총회 문건을 보면, 일본 측이 철강, 알루미늄 등의 공업을 위한 토지 이용과 관련해 공해 대책에 협력할 수 있는지 한국 측에 묻는다. 공해 물질이 나오는 공장이라도 받을 수 있냐는 질문이다.
바로 여기에 일본의 검은 속내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당시 일본에서 환경문제로 공장을 더 이상 짓기 어렵게 되자 가까운 한국에 공장을 지음으로써 활로를 뚫으려 한 것이다.
아울러 포항제철 건설은 한국의 포항 남쪽 공업지역과 여기서 가까운 일본의 돗토리(鳥取), 야마구치(山口), 기타규슈(北九州), 오이타(大分) 일부 지역을 아우르는 한·일 협력경제권을 만들려 했던 당시 일본 경제정책의 핵심이기도 했다. 한국에서 관세를 면제해주는 보세 지역과 자유항을 늘리고, 일본 제품을 가공해주는 합작회사를 세워서 일본의 기술력과 한국의 노동력을 결합시키려 한 것이다. 다시 말해 한국을 중공업 일본의 하청기지, 경공업 중심으로 키우려는 의도였다.
실제 우리나라 산업계에서는 일본 중소기업들이 기초 소재를 대주고, 한국 공장이 완제품을 만드는 하청 구조가 1970년대 중반부터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지금도 우리가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가마우지 경제'다. 가마우지를 시켜 물고기를 낚는 것처럼, 한국이 부품, 소재, 기계를 일본서 가져와 저임금 노동과 결합해서 외국 수출로 돈을 벌면 그 돈의 상당수를 일본에 다 갖다 준 것이다. 이런 일의 반복이 1970년대부터 최근까지 50년 넘게 이어졌다.
일본 경제 상황으로 봤을 때도 1960년대 말은 내수를 벗어난 해외 시장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단계에 접어든 때였다. 따라서 한일 국교정상화나 경제 원조는 수출 시장을 넓히려는 일본 자본 대팽창의 수단으로 이용된 것이기도 했다.
포항제철 건설은 이를 수주했던 신일본제철과 미쓰비시상사 등 전범 기업에게도 큰 이익을 안겨줬다. 당시 한국이 이들 기업으로부터 사들인 설비 금액만 해도 1억7765만 달러로, 지원 자금보다 50% 가량 더 많다.
포항제철 건설은 흔히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든 성공신화로 많이 이야기된다. 물론 그런 측면도 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위와 같은 일본의 검은 장삿속이 작용했고, 우리가 이에 이용당했다는 사실 역시 기억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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